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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인터뷰 : 김순곤 ①] 학교 백일장을 휩쓸던 소년, ‘고추잠자리’로 ‘가왕’ 조용필을 깨우다

박강민 기자 oasis365@gmail.com

등록 2026-08-21 11:12

초등학교 시절에 어른들 책까지 모조리 섭렵

백일장 대회 나가면 ‘대상’ 전국 휩쓸며 명성

당대 최고 조용필과 3년간 동고동락하며 작사

‘바람의 노래’,‘남자라는 이유로’,‘초혼’ 등 남겨

자신만의 문법으로 대중가요 언어 진일보시켜

□ 트로트 명곡제조기 김순곤 인터뷰 ①

 

김순곤은 요즘 새벽이면 밭으로 간다. 작은 텃밭에 물을 주고, 심어 놓은 각종 채소의 상태를 살피고 탄저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고 있는 텃밭의 고추를 걱정한다. 

한때 한국 대중가요의 가장 뜨거운 현장에서 조용필과 밤새워 음악을 이야기하던 청년은 이제 자연의 시간 속에서 하루를 시작한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 달라진 것은 공간이지 호기심은 아니다. 여전히 음악을 듣고, 새로운 노랫말을 구상하고, 곡을 만들고, 편곡 아이디어를 찾는다.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고 책을 디자인하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도 찍는다.

자신을 ‘작사가’라는 한 단어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그의 성격과 맞지 않는지도 모른다.

김순곤은 말한다.

“애초에는 작사·작곡을 다 하고 싶어서 했던 일들인데, 조용필 형을 만나 작사를 하다 보니 작사가로 규정된 거죠.”

그에게 작사는 처음부터 직업이라기보다 하나의 표현 방식이었다. 대학에서도 산업미술을 전공했지만, 학교생활에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글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는 일 자체에 관심이 많았다. 음악과 디자인을 서로 다른 영역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40년 넘게 음악 현장에서 살아온 그의 작품은 1,000곡 안팎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에는 ‘고추잠자리’, ‘못 찾겠다 꾀꼬리’, ‘바람의 노래’, ‘문밖에 있는 그대’, ‘인디안 인형처럼’, ‘나만의 것’, ‘흔적’, ‘초혼’, ‘남자라는 이유로’처럼 세대가 달라도 여전히 불리는 노래들이 많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자신을 ‘천재’라고 부르는 말을 손사래 친다.

“천재까지는 아니고요.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노력하는 편입니다.”

 

주변의 평가는 다르다.

작곡가 임종수는 김순곤을 만난 뒤 자신의 작곡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고 회고했고, 저서에서는 그를 두고 “김순곤은 천재예요.”라고 평가했다. 처음에는 서로의 작업 방식이 맞지 않았지만, 결국 김순곤의 한마디가 임종수의 작곡법을 바꿔 놓았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한 작곡가의 작업 방식까지 바꿔 놓았을까?

그 답은 그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된다.


 수많은 명곡의 노랫말을 써온 김순곤은 지금 파주의 작은 텃밭을 일구며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하지만 그의 창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음악을 듣고 새로운 노랫말을 구상하며 곡을 만들고 편곡 아이디어를 다듬는다. 컴퓨터로 음악을 만들고 책을 디자인하는가 하면,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다양한 방식으로 창작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수많은 명곡과 창작의 아이디어가 탄생한 일산의 작업실 겸 스튜디오. / 사진= 양희수 기자

 

학교보다 책이 먼저였던 소년

 

김순곤의 유년기는 평범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사업이 무너지면서 가족이 흩어졌고, 어린 그는 외할머니와 살게 됐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약 3년의 공백이 있었다.

“아버지 사업이 파산하면서 가족들이 다 뿔뿔이 흩어졌어요. 3학년 다니다가 할머니 집에 가서 살았는데 할머니가 뭘 잘 몰라서 나를 학교 보낼 생각도 안 했던 거죠. 그래서 학교도 안 가고 할머니랑 둘이 살면서 3년 정도를 쉬었어요.”

 

학교를 떠난 3년은 역설적으로 훗날 작가 김순곤의 가장 큰 자산이 됐다.

할머니 집에는 삼촌들이 읽던 책이 많았다. 문학 전집부터 시사잡지까지 종류도 다양했고, 어린아이가 읽기에는 어려운 한자가 가득했다.

하지만 할 일이 없었다.

“매일 할 일이 없으니까, 심심하니까 그냥 닥치는 대로 책만 읽었죠.”

친구도 없었다. 그는 할머니를 관찰했고, 깊은 우물을 바라보며 혼자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책과 혼자 있는 시간이 아이를 또래보다 빨리 어른으로 만들었다.

 

학교에 다시 들어갔을 때 문제가 생겼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친구들이 너무 어려 보였다.

세계 문학 전집, 수필, 김유정의 단편 등 어른들이 읽던 문학책을 이미 많이 읽은 탓이었다.

“애들이 대화해보니 너무 아기들 같았어요. 그래서 요즘으로 치면 일진 같은 애들 만나도 쓰다듬으면서 ‘그러면 안 되지.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야지’ 하면서 동생 다루듯이 타이르고 했어요.”

 

작문 시간에는 더 난감한 일이 벌어졌다.

선생님이 그의 글을 보고 불러 세웠다.

“너 어디서 베꼈냐.”

아이답지 않은 단어와 표현을 쓰니 선생님이 믿지 못했던 것이다.

“‘기암절벽’ 같은 단어를 썼더니 선생님이 ‘너 기암절벽이 무슨 뜻인지 알아?’ 그러세요. 그래서 저는 ‘저 한자로도 쓸 수 있는데요’ 그랬죠.”

 

그 일을 계기로 그의 이름은 글짓기 대회에서 빠르게 알려졌다.

전국의 백일장에 나가면 상을 휩쓸었다. 문예지에 작품이 실렸고, ‘소설 주니어’ 같은 잡지에 중편 소설을 쓰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시집도 냈다.

학교생활은 그 반대였다.

고등학교만 네 곳을 다녔다.

“학교에 적응이 안 되어서 다니기가 싫은 겁니다. 친구도 없었어요. 한 학교에 오래 안 다녔으니까.”

그러나 학교에서는 그를 쉽게 내치지도 못했다. 대회에 나가 상을 받아오면 교장은 조회 시간마다 그를 칭찬했다.

학교는 답답했지만 글쓰기는 달랐다.

그는 학교 밖에서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인생을 쓰기엔 너무 어렸다”

 

그가 대중가요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노래의 주류 소재는 사랑과 이별, 인생이었다.

하지만 김순곤은 다른 것을 쓰고 싶었다.

‘고추잠자리’였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쓴 가사를 방송사 공모전에 출품했고 연말 결선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 가사를 눈여겨본 PD가 조용필에게 건넸고, 조용필은 그 가사에 곡을 붙였다. 그렇게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됐다.

 

왜 하필 잠자리였을까?

그에게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사랑이나 이별 이야기를 쓰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어요.”

당시 가요의 주된 소재를 자신이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있는 기억을 찾았다.

동심이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겪는 공통 관심사가 동심이잖아요. 그래서 동심에 대한 걸 좀 많이 써야겠다. 그때 그래서 그런 걸 계속 연작으로 썼었어요.”

그렇게 ‘고추잠자리’가 나왔고 ‘못 찾겠다 꾀꼬리’ 같은 작품도 이어졌다.

소재는 동요 적이었지만 음악은 동요가 아니었다.

김순곤이 쓴 것은 동심이었고, 조용필이 만든 것은 새로운 대중음악이었다.

당시의 익숙한 가요 문법으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사를 조용필은 오히려 반겼다.

“조용필은 달랐어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 가사를 보면 ‘여기다 어떻게 곡을 붙여?’ 그랬겠죠.”

두 사람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김순곤은 새로운 언어를 가져왔고, 조용필은 그 언어에 음악을 입혔다.

 

 

“여고생이 썼다” 소문에 가짜 등장도

 

‘고추잠자리’의 탄생에는 또 하나의 숨은 이야기가 있다. 

노래가 처음 발표될 당시, 정작 원작자인 김순곤의 이름은 없었다. 대신 가사를 조용필에게 전달했던 당시시 TBC 신광열 PD가 작사자로 표기됐다.

사연은 이렇다. 

김순곤이 고등학교 시절 써두었던 ‘고추잠자리’로 TBC 방송 공모에 응모해 연말 대상을 차지한 것이 발단이었다. 김순곤은 “당시 담당 PD가 ‘이 작품이 재미있고 독특하니 이걸로 한번  해보라’며 가사를 조용필 형에게 건넸고, 용필이 형이 곡을 붙인 뒤 작사자를 그 PD의 이름으로 발표했다”라고 회고했다.


이처럼 원작자의 이름이 가려진 탓에 노래의 주인을 둘러싼 황당한 소문까지 돌았다. 

‘어느 여고생이 쓴 가사’라는 이야기가 퍼졌고, 진짜 작사가를 찾는다는 소문이 나자 전국에서 20~3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내가 쓴 가사”라며 나서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하지만 베일에 싸여 있던 실제 작사가는 고교 시절 이미 시집을 냈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을 보였던 스물한 살의 청년 김순곤이었다. 

결국 그가 ‘고추잠자리’의 진짜 주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후 음반에도 그의 이름이 제대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고추잠자리’는 김순곤에게 작사가로서의 화려한 데뷔작이자,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의미 깊은 작품이 됐다.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는 김순곤이 작사가의 길에 첫발을 내딛게 한 데뷔작이다. 사진은 ‘고추잠자리’가 수록된 조용필 앨범. 


조용필의 집에서 보낸 3년의 경험

 

김순곤에게 조용필은 단순히 함께 작업한 가수가 아니었다.

한동안 같은 집에서 살며 작업한 사람이었다.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청년에게 별다른 연고지가 없었다.

“갈 데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시골에서 올라와서 호텔에 갈 수도 없고, 그냥 용필이 형네서 지내면서 작업한 거죠.”

그렇게 조용필의 집에서 먹고 자며 음악을 만들었다. 낮에는 각자의 스케줄을 보내고, 밤이 되면 다시 음악 이야기를 나눴다.

 

그 시간이 3년 가까이 이어졌다.

조용필과는 아홉 살 정도 차이가 났지만, 김순곤에게는 큰 의미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형들과 일해서 그런지 9~10년 형들은 그냥 한두 살 많은 형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함께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듣고 밤새 이야기를 나눴다.

때로는 의견이 부딪혔다. 김순곤은 자기 생각을 강하게 주장했고 조용필 역시 쉽게 물러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김순곤이 기억하는 것은 갈등보다 조용필의 배려였다.

“제 느낌에 이 사람이 나를 굉장히 아끼는구나. 그런 생각이 딱 들었어요. 자기 집에서 잠도 재우고 그랬잖아요. 그것도 당대의 대스타가.”

 

지금 돌아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한국 대중 가요사에서 상당히 특별한 장면이었다.

한쪽에는 당대 최고의 스타가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아직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젊은 작사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 집에서는 나이와 명성보다 음악이 먼저였다.


 

“나는 늘 새로운 일을 꿈꿨다”

 

그렇다고 김순곤이 작사가로 성공해야 한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 일을 꼭 해야겠다, 여기에 인생을 걸어야겠다,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나는 그냥 뭔가 새로운 걸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으니까.”

그에게는 글도, 음악도, 그림도 결국 표현이었다.

게다가 당시 작사는 지금처럼 매력적인 직업도 아니었다. 히트곡을 써도 작품료는 크지 않았고, 저작권료도 지금과 같은 구조가 아니었다.

“그날 소주 한 잔 먹으면 딱 좋은 5만 원 정도였으니까. 이 일에 목숨 걸고 매달릴 만한 매력적인 일은 아니었죠.”

 

결국, 그는 조용필과의 작업을 잠시 멈추고 광주로 내려갔다.

전남대 후문 근처에 음악 다방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평범하게 하지 않았다.

당시 음악 다방은 모든 손님이 같은 볼륨으로 음악을 들어야 했다.

김순곤은 생각했다.

“어떤 애는 공부하고 싶을 수도 있고.”

그래서 모든 좌석에 헤드폰을 설치했다. 거액을 들여 배선을 깔고 테이블마다 헤드폰을 네 개씩 놓았다. 대한민국 최초의 헤드폰 음악 다방이었다.

하지만 며칠 지나자 헤드폰을 훔쳐 가거나 뜯어 놓는 일이 생겼다. 결국, 두세 달 만에 문을 닫았다.

실패였다.

하지만 그 공간에서 광주의 젊은 음악인들이 모였고, 방송 PD와 DJ를 비롯해 훗날 지역 음악계에서 활동한 사람들도 그곳을 거쳐 갔다. 김순곤은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을 만나고 연결하는 일을 계속했다.

그의 삶에서 실패는 끝이 아니었다.

늘 다음 실험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었다.


 김순곤은 일산의 스튜디오에서 새로운 노랫말을 구상하고 곡과 편곡 아이디어를 다듬으며 꾸준히 창작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 지영빈 감독 제공

 

서울로 돌아와 다시 쓴 노랫말

 

광주에서의 또 다른 인연은 ‘바위섬’이었다.

통기타 음악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 노래를 듣고 음반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예향의 젊은 선율’이라는 옴니버스 음반을 만들었고 ‘바위섬’을 타이틀 곡으로 내세웠다.

노래는 가요톱텐 2위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묘했다.

“대박은 났는데 돈은 못 벌었어요.” 음반은 팔렸지만 큰 수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겪으며 다시 서울로 돌아왔고, 다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때 나온 곡이 나미의 ‘인디안 인형처럼’이었다.

이 곡도 처음부터 타이틀 곡으로 주목받은 것은 아니었다. 당시 회사가 밀던 곡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강남과 다운타운 클럽에서 먼저 반응이 터졌다.

“어느 날 제작자가 오라고 하더니 ‘야, 너 보너스 좀 줘야겠어!’ 그러더라고요. 왜냐고 물었더니 ‘이거 방송 이걸로 다 바꾸고, 지금 난리야, 이 노래가’라고 하는 거예요.”

 

그 성공을 계기로 다시 작품 활동에 힘을 쏟았다.

김완선의 ‘가장무도회’와 ‘나만의 것’, 박강성의 ‘문밖에 있는 그대’, 최유나의 ‘흔적’ 등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작품 세계는 더욱 넓어졌다.

장르의 경계는 중요하지 않았다.

발라드든 댄스든 트로트든, 결국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담는 그릇일 뿐이었다.

 

 

임종수의 작곡법을 바꾼 작사가

 

그의 창작 방식이 얼마나 독특했는지는 작곡가 임종수와의 일화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레전드 작곡가 임종수는 ‘트로트 야사’를 기록한 자신의 저서에서 김순곤과의 기막힌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임종수는 좋은 가사를 먼저 봐야만 곡을 쓰는 스타일이었다. 반면 김순곤은 정반대였다. “멜로디를 들어야 가사가 나온다”며 찾아온 그를 보고 임종수는 속으로 ‘미친 놈이네’라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라고 점잖게 거절했다.

그때 새까만 후배 김순곤이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만약 앞으로 10년 동안 마음에 드는 가사가 안 나오면 10년 내내 곡을 안 쓰실 겁니까? 선생님은 선천적으로 멜로디 감각이 좋으시니, 멜로디만 먼저 써주시면 제가 기가 막히게 가사를 붙이겠습니다.”

이 도발적인 제안은 임종수의 오랜 작곡 루틴을 단번에 뒤집어 놓았다. 

생애 처음으로 가사 없는 멜로디를 완성한 대선배 임종수는 바짝 긴장한 채 후배를 불렀다. “야 순곤아, 내가 곡을 하나 썼는데 너한테 심사를 좀 받아야겠다.”

임종수는 가사의 주제를 던져주었다. 

이른바 ‘주(酒)식회사’, 즉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헌신하며 유흥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애환을 눈물겹게 담아달라는 주문이었다.

일주일 뒤, 김순곤이 가져온 첫 소절은 이랬다.‘화려한 불빛 그늘에 숨어 사랑을 팔고 살지만.’

임종수가 “어린 처녀가 사랑을 사고파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지적하자, 김순곤은 “선생님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써봤다”며 능청스럽게 즉석에서 단 한 글자를 바꿨다. 

‘팔고’를 ‘잊고’로.

‘사랑을 팔고 살지만’이 ‘사랑을 잊고 살지만’으로 바뀌는 순간, 뻔할 수 있었던 이야기가 고결한 희생의 드라마로 탈바꿈하며 노래의 정서가 완전히 달라졌다. 

단 한 글자로 인물의 삶과 노래의 운명을 바꾼 이 곡이 바로 히트곡 ‘부초’다.

베테랑 작곡가는 훗날 이 일화를 기록하며 후배를 향해 짧고 굵은 찬사를 남겼다.

“김순곤은 천재예요.”


 김순곤의 일산 스튜디오에는 그의 오랜 음악 인생과 화려한 이력을 말해주듯, 곳곳에 수많은 트로피와 기념패가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 사진=양희수 기자


“김순곤 선생은 언제 오시나요?”

 

‘부초’를 통해 그의 이름이 트로트계에도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재미있는 인연도 생겼다.

어느 날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저, 남일해라는 사람인데 김순곤 선생을 뵙고 싶습니다.”

‘빨간 구두 아가씨’의 남일해였다.

약속 장소에서 남일해는 앞에 앉은 청년을 한참 바라봤다.

“김순곤 선생은 언제 오시는 건가요?”

“전데요?”

잠시 뒤 또 물었다.

“김순곤 선생은 언제 오시는 거예요?”

김순곤이 “제가 바로 김순곤입니다”라고 하자 남일해는 깜짝 놀랐다.

그가 훨씬 나이가 많은 원로 작가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김순곤은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에 찢어진 옷을 입고 다녔다.

“그러니 제가 김순곤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셨던 것 같아요.”

남일해는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아껴두었던 양주를 꺼냈다.

그날의 만남은 형님과 동생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지금도 두 사람은 가까운 사이로 지낸다.

 

 

취해서 쓰고, 취해서 잊은 ‘초혼’

 

장윤정이 부른 ‘초혼’은 김순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주부들의 노래방 애창곡에 항상 상위권에 있을 정도로 사랑을 받는 노래다. 

그러나 노래의 탄생 과정은 놀라울 만큼 솔직하다. 

“그때 내가 거의 알코올 중독이었어요. 어느 날 술을 마시고 있는데 작곡가 임강현이 술집으로 악보를 가지고 왔더라고. 그걸 받아 놓고 어느 날 가사를 써서 줬어요. 그런데 기억이 안 나.” 받을 때도 취해 있었고, 쓸 때도 취해 있었고, 넘길 때도 취해 있었다.


그 뒤 몸이 좋지 않아 수술을 받았고 회복하는 데 몇 년이 걸렸다. 그러다 어느 날 TV에서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중에 노래를 듣는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노래가 자꾸 나오는 거야.”

자신이 쓴 가사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것이다.

그의 말에는 웃음이 섞여 있었지만, ‘초혼’의 작사 과정은 오히려 김순곤의 작법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 노래가 김소월의 시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했다. 동명의 시가 있었지만,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다. 단지 그가 좋아한 것은 두 글자의 제목이었다.

 

최유나의 ‘흔적’도 그랬다.

“두 글자 제목의 노래 시리즈 중 하나였죠.”

두 글자 제목에는 나름의 작법이 있었다. 느린 노래는 악보의 분량 자체가 짧고, 그만큼 가사도 많을 수 없다.

“그 짧은 가사로 스토리를 만들기에는 너무 짧아요. 그러면 상징화하고 함축시켜서 문장보다 단어를 골라 써야 전달력이 생겨요.”

문장 대신 이미지와 단어를 남기는 방식이다.

그는 ‘장미의 가시로 남아서’ 같은 표현을 예로 들었다. 문장만 놓고 보면 다소 비약적이지만, 노래에서는 그 한 덩어리의 이미지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김순곤에게 노랫말은 문장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하나의 감정을 전달하는 일이다. 

  사진=장윤정 '초혼', 최유나 '흔적' 앨범


‘흔적’은 왜 오래 남았을까?

 

최유나의 ‘흔적’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당시 KBS PD의 연락을 받고 최유나를 만났다. 멜로디는 괜찮은데 가사가 아쉽다는 이유였다. 오랜 무명 생활을 했고 김순곤과 같은 동향 출신이라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그는 가수의 상황을 알고 가사를 썼다. 그리고 노래는 크게 성공했다.

“음반이 엄청나게 팔렸어요. 심지어 해적판을 만들어 팔다가 걸릴 정도로.”

그 가운데 유난히 기억에 남는 한 줄이 있다.

‘절반의 책임마저 당신은 모르겠죠.’

사랑의 책임을 절반만 묻는다는 표현은 당시에는 상당히 독특했다.

김순곤의 가사는 거창한 수사를 앞세우기보다, 익숙한 말을 살짝 비틀어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냈다. 

한 단어를 바꾸고, 하나의 문장을 덜어내고, 남은 자리에 여운을 남기는 식이다.

그의 노랫말이 쉽게 들리면서도 오래 기억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김순곤의 작사는 ‘시’가 아니다

 

이제 그의 작사론이 선명해진다.

김순곤은 자신의 노랫말을 시와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는 눈으로 읽지만, 노랫말은 귀로 들어온다.

그래서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다.

곡의 템포, 가수의 발음, 음역, 리듬, 코드의 흐름까지 생각해야 한다.

우리말은 받침이 많고, 고음에서 발음하기 어려운 말도 많다. 그는 실제로 가수의 발성을 고려해 모음을 고르고, 멜로디가 이어지는 곳에서는 문장을 함부로 닫지 않는다.

“그 가사가 필요한 것은 노래를 위해서 필요한 거지, 그냥 시처럼 글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노래할 상황을 계속 연구하면서 쓰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에게 작사는 감성만의 영역이 아니다.

음악을 이해하고, 가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대중이 어떻게 들을 것인가 까지 계산해야 하는 전문적인 작업이다. 그래서 그의 가사는 쉬워 보이지만 쉽지 않다.

노래하는 사람에게는 편하고, 듣는 사람에게는 자연스럽지만, 그 안에는 음악과 언어에 대한 오랜 고민이 들어 있다.

그리고 그 작사론의 정점에 선 한 곡이 있다.

‘바람의 노래’다. 


  < ②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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