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을 걷는 일은 곧 서울의 역사와 옛사람들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 사진=배성식 제공
옛날에는 지방에서 과거를 보러 한양에 온 선비들이 합격을 기원하며 도성을 한 바퀴 돌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왕과 백성은 물론 종로의 상인들도 도성을 돌며 소원을 빌거나 상점의 번창을 기원했다고 한다. 도성 안팎의 풍경을 감상하며 성곽을 걷는 풍습은 ‘순성(巡城)놀이’로 이어졌다.
한양도성은 조선의 수도 한성부를 둘러싸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곽으로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 등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며, 전체 길이는 약 18.6km에 이른다. / 사진=서울시문화재관리과 서울을 처음 여행한다면 어디부터 가야 할까?
명동의 쇼핑 거리와 남산 전망대, 홍대와 강남의 핫플레이스도 좋지만, 먼저 한양도성을 걸어보자. 서울의 지형과 역사를 이해하면 명소 사이의 관계가 보이고 여행 동선도 한결 효율적으로 짤 수 있다. 유명한 장소를 하나씩 방문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도시 전체를 읽는 것, 서울 여행을 더욱 깊이 있게 즐기는 방법이다.
궁궐과 성곽이 품은 도시, 서울
한양도성은 조선의 수도 한성부를 둘러싸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곽이다. 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 등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이어지며, 전체 길이는 약 18.6km에 이른다. 1396년 처음 축조된 뒤 여러 차례 보수와 개축을 거쳐 조선의 도읍을 지켰다. 근대화 과정에서 상당 부분 훼손됐지만, 현재도 옛 성벽이 남아 있거나 복원된 구간을 따라 걸을 수 있다.
한양도성은 단순한 방어 시설을 넘어 서울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도성 안과 밖의 생활 공간이 구분됐고, 죽은 사람을 도성 밖에 묻는 관습도 있었다. 성벽 곳곳에 남은 축성 기록에서는 성을 쌓은 지역과 담당자, 공사 책임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도성을 걷는 일은 곧 서울의 역사와 옛사람들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이다.
북악산이라고 불리는 백악산은 해발 342m로 한양도성 내사산 가운데 가장 높다.
등산과 역사를 함께 즐기는 백악 구간
한양도성은 일반적으로 백악·낙산·남산·인왕산 구간으로 나뉘어 있다. 처음 걷는 여행자라면 창의문에서 백악산을 넘어 숙정문과 말바위안내소 방면으로 이어지는 백악 구간을 추천한다. 가파른 계단과 성곽길을 오르는 수고가 있지만, 서울의 지형과 성곽의 아름다움을 함께 만날 수 있는 코스다.
백악산(白嶽山)은 북악산이라고도 불리며, 해발 342m로 한양도성 내사산 가운데 가장 높다.
조선의 궁궐과 도성은 이 산을 주산으로 삼아 자리 잡았다. 정상 부근에 서면 경복궁과 광화문, 남산을 비롯한 서울 도심이 한눈에 들어오고, 뒤편으로는 북한산의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백악산 정상석 / 사진=배성식 제공
백악산 일대는 1968년 1·21 사태 이후 오랫동안 출입이 제한됐다. 이후 단계적으로 개방됐으며, 2026년 10월 17일에는 청운동 방면의 마지막 미개방 탐방로 1.32km가 개방됐다. 이로써 1968년 이후 약 59년 만에 북악산의 모든 탐방로를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게 됐다.
기존 백악 구간에 만세동방과 청와대 전망대 갈림길 등을 포함한 새로운 탐방로가 더해지면서, 성곽뿐 아니라 북악산의 자연과 역사적 장소를 함께 살펴볼 수 있게 됐다.
사소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문, 창의문
창의문(彰義門)은 인왕산과 백악산 사이에 자리한 한양도성의 문으로, 자하문(紫霞門)이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사소문 가운데 옛 문루와 문짝이 잘 보존된 역사적인 성문이다. 이곳에서 출발해 가파른 성곽길을 오르면 왼편으로 북한산의 능선이 펼쳐지고, 뒤돌아보면 인왕산의 기암절벽이 눈에 들어온다. 도성의 문을 지나 산을 오르는 길은 서울의 옛 모습과 자연을 동시에 만나는 여정의 시작이다.
백악 구간의 출발점인 창의문은 한양도성의 사소문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성문이다. / 사진=배성식 제공
서울을 한눈에 담는 백악산 정상
백악마루는 백악산의 정상부로, 한양도성의 높은 지점에서 서울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발아래로 경복궁과 광화문 일대가 펼쳐지고, 멀리 남산과 도심의 빌딩 숲이 어우러진다. 서울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도 실감할 수 있다. 지도를 펼쳐 놓고 궁궐과 도성, 주요 산의 위치를 살펴보면 이후 서울 여행의 방향을 잡는 데도 도움이 된다.
백악산 정상에 오르면 경복궁과 광화문 일대가 펼쳐지고, 멀리 남산과 한강, 강남 등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 사진=lyu1388 제공
산과 물의 조화를 담은 풍수지리
조선은 도읍을 정할 때 산과 물의 형세를 중요하게 여겼다.
경복궁 뒤로는 주산인 백악산이 자리하고, 앞쪽으로는 청계천이 흘렀다. 좌우에는 낙산과 인왕산이 놓이고, 남쪽으로는 남산이 도시를 감싼다. 산이 뒤를 받치고 물이 앞을 흐르는 지형은 전통 풍수지리에서 이상적인 입지로 여겨졌다.
동서남북의 방위에는 각각 청룡·백호·주작·현무라는 상징이 대응한다. 동쪽은 청색, 서쪽은 백색, 남쪽은 적색, 북쪽은 흑색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한양도성과 궁궐의 배치를 이해할 때 이러한 전통 사상을 함께 살펴보면, 서울의 공간에 담긴 조선의 세계관까지 엿볼 수 있다.
만세동방 약수터, 임금의 장수를 기원한 바위
북악산 계곡을 따라 걷다 보면 바위에 글귀가 새겨진 만세동방 약수터를 만난다. ‘만세동방 성수남극(萬世東方 聖壽南極)’이라는 글귀에는 임금의 만수무강과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만세’는 오랜 세월을, ‘성수’는 임금의 수명을 뜻하며, ‘남극’은 사람의 수명을 관장한다고 여겨진 남극성을 상징한다. ‘동방’은 장수의 상징으로 알려진 동방삭의 전설을 떠올리게 한다.
‘만세동방 성수남극(萬世東方 聖壽南極)’이라는 글귀에는 임금의 만수무강과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 사진=배성식 제공
거대한 천연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약수와 주변 계곡은 도심 가까이에서 자연의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바위에 새겨진 글귀를 찬찬히 살펴보면 장수를 기원했던 옛사람들의 염원과 조선시대의 역사적 정취가 함께 전해진다.
분단의 상처를 간직한 1·21 사태 소나무
성곽길을 걷다 보면 몸통에 탄흔이 남은 소나무가 눈길을 끈다.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에 침투하면서 군경과 교전이 벌어졌다. 이 사건이 바로 ‘1·21 사태’다. 당시 총탄을 맞은 것으로 알려진 이 소나무에는 15개의 탄흔이 남아 있어 ‘1·21 사태 소나무’라 불린다.
아름다운 성곽길에 남은 전쟁과 분단의 흔적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1968년 북한 무장공비들이 박정희 암살을 위해 침입한 1.21 사태로 인해 교전 중에 생긴 총탄 자국 / 사진=배성식 제공
한양도성 최고의 조망 명소, 청운대와 백악곡장
청운대는 성곽길을 걷다가 잠시 쉬어 가기 좋은 전망 지점이다. 서울 도심과 궁궐, 멀리 북한산의 봉우리까지 바라볼 수 있어 산행의 즐거움을 더한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백악곡장도 만난다. 곡장은 성벽 일부를 바깥으로 둥글게 돌출시켜 쌓은 방어 시설로, 성 밖의 움직임을 살피고 적의 접근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성벽에 남은 글씨도 놓치지 말자. 축성에 참여한 지역과 담당자 등의 기록은 성을 쌓은 사람들의 흔적이자, 오랜 세월에 걸쳐 도성을 보수하고 관리했던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사진=lyu1388 제공
북쪽의 문, 숙정문
숙정문(肅靖門)은 한양도성의 북쪽에 자리한 문으로, 흔히 북대문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풍수와 음양에 관한 관념(음기가 강해) 때문에 문을 자주 열어 두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가뭄이 들면 남쪽의 숭례문을 닫고 북쪽의 숙정문을 열어 기우제를 지냈다는 풍습도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성문이 단순한 출입구를 넘어 당시 사람들의 생활과 믿음에 깊이 연결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숙정문에서 성곽길을 따라 이동하면 말바위안내소와 삼청공원 방면으로 이어진다.
산행을 마친 뒤에는 삼청동의 카페와 식당을 둘러보거나 성북동으로 발길을 옮겨 서울의 또 다른 매력을 즐겨도 좋다.
백악 구간은 창의문에서 시작해 보통 말바위 안내소나 와룡공원에서 마무리 된다. / 사진=배성식 제공
성벽의 작은 구멍, 총안의 비밀
성곽을 자세히 살펴보면 일정한 간격으로 뚫린 작은 구멍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총안(銃眼)이라고 하며, 성벽 안에서 바깥을 살피거나 무기를 사용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이다. 성벽 아래 가까운 곳을 겨냥하는 근총안과 멀리 있는 곳을 겨냥하는 원총안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작은 구멍에도 도성을 지키기 위한 옛사람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총안은 성벽의 안쪽에서 바깥을 살피거나 무기를 사용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이다. / 사진=배성식 제공
여행 팁 | 백악 구간을 걸을 때
- 추천 출발점: 창의문
- 주요 볼거리: 백악마루, 1·21 사태 소나무, 청운대, 백악곡장, 숙정문, 만세동방
- 추천 마무리: 말바위안내소 또는 삼청공원 방면
- 참고: 탐방로별 개방 여부와 출입 시간은 방문 전 공식 안내를 확인
주변 맛집
혜화칼국수
혜화로터리 주유소 오른쪽 골목 왼편에 위치해 있다. 사골로 국물을 낸 안동국시가 일품으로 석쇠에 구운 바싹불고기나 담백한 맛의 생선튀김도 맛있다. 일요일엔 한적해서 좋다. 국시, 바싹 불고기, 생선튀김, 빈대떡 등이 주 메뉴다. 창경궁로35길 13
페르시아궁전
성균관대 정문 앞에 위치한 정통 카레 전문점이다. 6조각의 닭고기 요리에 카레를 얹고 페르시아산 쌀로 누룽지처럼 바싹하게 구워낸 라이스케이크가 포함된 페르시아 정식이 대표 메뉴다. 10단계까지 매운 정도를 선택할 수 있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자면 카레의 원조는 인도가 아니라 이란이다. 성균관로6길 9
자하손만두
창의문 부근에 일반 가정집을 개조해 만든 식당이다. 인공 조미료를 일절 쓰지 않고 직접 담근 장으로 담백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SNS 등을 통해 워낙 유명세를 탄 터라 주말엔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 잡기 어렵다. 만둣국, 떡만두국, 만두전골, 빈대떡. 백석동길 12
배성식 / 여행 작가

평소 여행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 한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모아 2022년에 아빠들을 위한 주말 놀거리, 먹거리 프로젝트 <아빠와 함께하는 두근두근 보물찾기>를 발간하였다.
2024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 최대의 언론사 그룹인 여행요미우리출판사를 통해 한국의 관광명소와 외국인들이 꼭 경험해 볼 만한 곳들을 소개한 ‘한국의 핫 플레이스 51’을 일본어 <韓国のホットプレイス51>로 공동 발간했다.
인스타그램 @k_stargram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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