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살의 공포와 액운을 쫓으려는 주술적인 믿음
‘잔을 비운다’라는 의미로 서로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

한 해가 저물어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송년회, 회식 자리에서 친구, 동료들과 술잔을 부딪치며 외치는 우렁찬 ‘건배’를 아마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술잔을 부딪치는 행위는 흥을 돋우고, 위로의 말을 전하는 등 술자리 분위기에 따라 다양한 의미가 있다.
건배는 단순히 잔을 들어 올리는 행동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유대감과 신뢰를 나타내는 중요한 문화적 행위이다.
건배는 원래 한국에서는 없었고 외국에서 들어온 술 문화이지만, 지금은 만국 공통어이다. 하지만, 이 익숙한 행위에는 생각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때로는 섬뜩하기까지 한 역사가 숨어있다.
물 또는 다른 음료와 달리 유독 술을 마시기 전에 왜 건배를 하는 것일까?
술 대신 물로 건배하면 종종 눈총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죽은 이를 기리며 물로 축배를 든 풍습 때문이다. 물로 건배하면 상대의 불행이나 죽음을 비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서 차라리 빈 잔으로 건배하는 게 낫다는 말도 있다.
건배 관련 정확한 유래와 기록은 없지만, ‘쇼너시 비숍 스톨’(Shaughnessy Bishop-Stall)이 2019년에 출간한
<술의 인문학_ Hungover>에서는 크게 3가지 설을 제기했다.
사진 출처 = yes24
1. “내 잔엔 독이 없소” 안전함의 증표
중세 유럽에서는 전쟁이 잦았고, 화해 시점에서는 상대방의 술잔에 독을 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잔을 세게 부딪히며 서로의 잔에 술을 넘나들게 함으로써 안전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특히 바이킹이 사용한 술잔은 유리가 아닌 소나 동물의 뿔(Horn)로 만들어 술을 담기에는 좋지만, 테이블에 내려놓기가 불편하여 손에 들고 있는 상태로 술을 모두 마시는 습관이 있어서 건배는 곧 ‘원샷’이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가볍게 ‘쨍’하고 부딪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술이 출렁거릴 정도로 강하게 부딪혔다고 한다.
잔을 더 세게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더 큰 신뢰감이 형성되었다. 이렇게 서로의 술이 섞이도록 잔을 세게 부딪히게 하고 같이 마시는 모습이 가장 강력한 건배의 시초라는 것이다.
2.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는 오감 완성의 마지막 퍼즐!
술을 마실 때 눈으로 보는 색, 향, 맛, 입술에 닿은 감촉으로 인간의 네 가지 감각을 일깨운다고 했다.
그렇지만 소리를 통해 귀로 느끼는 것은 힘들었는데 술잔을 부딪칠 때 ‘짠’하고 나는 소리가 다섯 번째 감각을 자극한다고 했다. 이렇듯 오감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술에 부족한 청각적인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건배를 하기 시작했다는 설이다.
3. “악마야, 물러가라!” 시끄러운 소리로 액운을 쫓다
서양에서 술을 처음 만들 때 악마가 도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래서 술을 ‘악마의 음료’라고 불렀고, 술잔에는 악마의 기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술을 마시기 위해 입을 벌리면 악마가 몸속으로 들어간다고 믿었다.
술잔을 부딪칠 때 ‘쨍’하고 내는 맑고 경쾌한 소리와 우렁찬 ‘건배’ 소리가 악마의 접근을 막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믿었다.

마치 동짓날에 팥죽을 뿌리거나, 나쁜 기운을 쫓기 위해 소금을 뿌리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런 의미로 독일어로 ‘프로스트(Prost)’, 프랑스어로 ‘상떼(Santé)’, 러시아어로 ‘자 즈도라비에(Na zdorovye)’ 등 일부 국가에서는 ‘건강’이라는 단어를 ‘건배’의 의미로 쓰고 있다.
‘건배’의 또 다른 이름 ‘토스트(toast)’
영어로 ‘make a toast’는 ‘토스트를 만들다’라는 뜻이 아니라 ‘건배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영미권에서는 건배를 ‘토스트(toast)’라고 하는데, ‘건배’와 ‘구운 빵’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있다.

17세기 영국에서는 와인의 풍미를 더 하고 침전물을 걸러내기 위해 살짝 구운 빵 조각이나 양념을 한 빵 조각을 술잔에 넣어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 당시 와인은 지금처럼 정제된 맛이 아니라 산미가 강하거나 불순물이 섞여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빵을 넣으면 불쾌한 맛을 흡수해 목 넘김을 더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한 연회장에서 당대 최고의 미녀에게 찬사를 보내던 한 남자가 술잔에 담긴 빵 조각을 가리키며 “이 아름다운 여성의 명성에 비하면 이 술은 별것 아니지만, 이 빵 조각이 술의 맛을 돋우듯, 그녀의 존재는 이 자리를 더욱 빛나게 합니다.”라고 외쳤고, 이 재치 있는 발언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이후 아름다운 여인을 기리며 토스트를 넣고 마시는 게 유행하면서 ‘토스트’는 축하와 경배의 상징이 되었다.
와인에 빵 조각 건배의 또 다른 이름 'toast'
‘건배(乾杯)’라는 단어는 중국에서 왔다. ‘마를 건(乾), 잔 배(杯)’는 말 그대로 ‘잔을 비운다’라는 뜻이다.
당나라 시절, 연회에서 순서대로 잔을 비우는 풍습이 있었고 송나라 때부터 요리가 나올 때마다 작은 잔으로 술을 마셨는데 잔을 비우는 게 예의라는 생각했다. 지금도 중국에선 ‘건배’를 외치면 정말 잔을 비워야 한다.
중국의 건배가 일본에서 ‘간파이’로 그리고 일제강점기 일본의 영향을 받아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송나라의 미식문화를 묘사한 ‘문회도’ / 사진 출처 = 교양인
그러나 한국의 전통 술 문화엔 건배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건배’라는 단어 대신 ‘수작(酬酌)’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갚을 수(酬)’, ‘술 부을 작(酌)’ 즉, ‘술잔을 서로 주고받으며 친목을 다진다'는 의미이다.
윗사람에게 두 손으로 정중히 술잔을 채우고, 윗사람이 다시 아랫사람에게 술을 부어주는 수작 문화였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한 장면 / 사진 출처 = JTBC
통일 신라 시대 연회장소인 경주 포석정에서도 왕과 신하가 술을 주고받으며 시를 읊으며 놀았다고 한다.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한다는 말을 종종 들어봤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음주 예절인 ‘주도’를 중요하게 여겨 학문과 덕이 있는 사람이나 나이 많은 사람을 윗자리에 두고 주도를 배웠다.
경주 포석정 / 사진 출처 = 천재교육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좋지 않고 불편한 이야기를 하거나, 처음부터 상대방을 취하게 하여 다른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수작’의 다른 의미는 ‘남의 말이나 행동 계획을 낮잡아 이르는 말’로 흔히 사용하는 ‘수작 부리다’, ‘개수작’ 등이 바로 우리 술 문화에서 유래되었다.

지금은 술병이 투명해서 술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알 수 있지만, 옛날에는 표주박으로 만든 호리병이나 도자기 같은 불투명한 술병으로 인해 어림잡아 술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림쳐서 헤아리다’라는 의미의 ‘짐작(斟酌)’은 ‘짐작할 짐(斟)’, ‘술 부을 작(酌)’으로 술 문화에서 파생되었고, 상대방에게 술을 따를 때 어느 정도의 양을 부어야 하는지 마음속으로 정하는 것을 ‘작정(酌定)한다’라고 한다.
표주박의 호리병과 도자기 술병
그리고 법정에서 죄질이 무거운데도 상황을 이해하여 형량을 줄인다는 정상참작이란 표현을 많이 사용하는데, '참작(參酌)'은 ‘참여할 참(參)’, ‘술 부을 작(酌)’. 즉, '같이 술을 따르던 자리에 있다'라고 직역된다.
좀 더 풀이하면 같은 상황, 나아가 같은 사회에 있기 때문에 책임이 오직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며, 상황을 헤아린다는 뜻으로 이어지는데 모두 우리 술 문화에서 파생되었다.
이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건배라는 행위에는 독살의 공포를 이겨내려던 조상들의 지혜, 액운을 쫓으려던 주술적 믿음, 그리고 술의 맛을 돋우려던 낭만적인 풍습까지 단순한 음주 행위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건배는 단순한 술자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를 넘어,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특별한 의식이다.
배성식 / 여행작가
평소 여행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 한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모아 2022년에 아빠들을 위한 주말 놀거리, 먹거리 프로젝트 <아빠와 함께하는 두근두근 보물찾기>를 발간하였다.
2024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 최대의 언론사 그룹인 여행요미우리출판사를 통해 한국의 관광명소와 외국인들이 꼭 경험해 볼 만한 곳들을 소개한 ‘한국의 핫 플레이스 51’을 일본어 <韓国のホットプレイス51>로 공동 발간했다.
이메일 ssbae100@naver.com / 인스타그램 @k_stargram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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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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