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개성 경천사에 조성된 ‘경천사지 10층 석탑’
보기 드문 대리석 석탑, 홀수 층 아닌 짝수 층
1907년 일본인에 의해 강제 반출…국제적 비판 여론에 1918년 반환
10년간 보존처리 후 국립중앙박물관에…분단으로 고향으로 못 가
국립중앙박물관 로비의 경천사지 10층 석탑 / 사진 출처 = 위키백과
2025년 한 해 동안 국립중앙박물관에는 600만 명 넘는 관람객이 방문했다. 우리 문화를 소재로 한 만화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흥행과 외국인 관광객 수 증가, 거기에 ‘뮷즈(박물관 기념품)’의 흥행 등이 한 데 겹친 결과이다.
케데헌과 뮷즈(박물관 굿즈)
아트 뉴스페이퍼(The Art Newspaper)가 집계한 2024년 세계 박물관 관람객 통계에서도 루브르(약 873만 명), 바티칸박물관(약 682만 명), 영국박물관(약 647만 명)에 이어 세계 4위권에 진입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립중앙박물관 로비에는 웅장한 높이(13.5m)의 ‘경천사지 10층 석탑’이 있다. 고려 충목왕(1348년) 때 지금 북한의 개성에 대리석으로 10층으로 만들었다. 석탑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제작되는데 대리석은 색감이 화강암보다 뽀얗고, 강도가 물러 조각 표현이 수월하며, 질감도 더 매끈하다.
경천사지 10층 석탑(국보)
탑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스투파(Stupa)’를 뜻하는 솔탑파(率塔婆)가 불교가 전래되는 과정에서 ‘탑(塔)’으로 줄어들었다.
스투파는 석가모니가 열반한 다음 몸에서 나온 사리를 봉안한 반구형의 구조물로 인도에서 유골을 보관하던 무덤에서 유래되었는데 이후 불교에서 중요한 건축물로 발전했다.
석가모니의 사리를 담은 스투파(1세기경)
통일 신라 시대에는 주로 3층탑,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는 5층탑, 7층탑, 9층탑 등 층수가 많아지고 홀수 층으로 탑을 세웠다. 하지만 고려 후기에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경천사지 10층 석탑처럼 화려한 모양을 새긴 짝수 층의 탑을 만들었다.
고려는 1231년부터 1270년까지 대략 40년 동안 몽골(원나라)과 전쟁을 벌였다. 전쟁에 패한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며 약 100년 동안(1270년~1356년)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다.
개성의 경천사
원래 경천사는 현재 황해북도 개풍군 광덕면 부소산에 세워진 고려 초기 사찰로 원나라 순제의 부인이자 고려인 출신이 ‘기황후’로 책봉되면서 고려와 원나라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던 시기였다.
드라마 기황후 / 사진 출처 = MBC
경천사 10층 석탑의 백미는 석탑 전체에 불교의 존상(불, 보살, 사천왕, 나한), 그리고 불교 설화적인 내용이 층층이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는 것이다.
법회 장면 등은 불교적인 내용을 표현하고 있지만, 존상 등을 한자리에 모아 부처의 세계를 수직적으로 표현한 것은 마치 백제 ‘금동대향로’ 등에서 볼 수 있는 도교적인 표현을 연상시키고 있다.
백제의 국보 중의 국보 '금동대향로'
우선 기단부에는 밑에서부터 사자, 용, 연꽃, 소설 <서유기>의 장면, 그리고 나한 등 불법을 수호하는 존재들이 새겨져 있다.
1층부터 4층까지 탑신부에는 부처의 법회(佛會) 장면이 총 16장면(불회도)으로 새겨져 있고, 5층부터 10층까지는 선정인 또는 합장한 부처님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불교의 존상들을 불교적 위계에 따라 층층이 표현한 것이다.
경천사지 10층 석탑의 기단부
탑의 1~3층은 위에서 보면 평면이 ‘亞’(아)자를 닮은 형태로 원나라 때 성행한 몽골·티베트계 불교인 라마교의 불탑이고, 4~10층까지의 평면은 전통 석탑처럼 사각형이다. 고려 전통과 원나라 외래문화의 융합인 셈이다.
탑의 1층에는 “원과 고려 왕실의 안녕을 바란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천사 석탑은 약 110년 이후 조선 시대 초기(세조 때)에 제작된 ‘원각사지 10층 석탑’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종로 탑골 공원 내 원각사지 10층 석탑(국보)
경천사지 10층 석탑은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와 함께하고 있다.
1907년에 순종의 결혼식 때 일본 특사로 온 다나카 미스야키는 고종 황제에게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선물로 요구했지만, 고종이 역사적 유물이자 백성의 재산이라며 거절했다.
1907년 3월 야밤에 개성의 경천사에 200여 명의 일본군을 동원해 “고종이 경천사 탑을 하사했다.”라는 거짓말로 주민들을 속이고 톱과 곡갱이로 탑을 해체하고 140개 조각으로 나눠 일본 도쿄 자신의 집으로 옮겨갔다.
경천사지 10층 석탑을 강제 반출한 다나카 미스야키
석탑 강탈 사실은 외국 언론인들의 적극적인 비판 기사, 기고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특히 월간지 <코리아 리뷰>의 발행인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와 <대한매일신보>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의 발행인 어니스트 베델(Ernest T. Bethell)의 노력이 석탑 반환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베델과 대한매일신보 사설
영국인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논설을 통해 석탑의 약탈을 알렸고, 선교사로 고종의 외교 조언자였던 미국인 헐버트 박사는 경천사를 직접 방문해 현장 촬영과 주민들을 인터뷰 내용을 토대로 1907년 4월 4일 일본 고베의 지역 언론이자 영자 신문인 <재팬 크로니클>과 미국 <뉴욕 포스트>에 약탈을 비판하는 기고문을 올렸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로 가서 관련 만행을 폭로하였고 국제적 비판 여론이 퍼지자 일제는 결국 조선총독부가 나서 반환을 압박했고, 결국 1918년 석탑은 다시 돌아왔다.
참고로 이 두 분은 현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마포구 합정동)에 잠들어 계신다.
헐버트 박사와 '재팬 크로니클' 기고문 / 사진 제공 = (사)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하지만 그 운반 과정에서 많이 훼손되어 원래 자리인 개성의 경천사가 아니라 당시 조선총독부가 있던 경복궁 회랑에 방치되었다.
한국전쟁으로 개성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1960년에 경복궁 전통공예관 앞에 세웠다가 산성비에 약한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부식되는 문제로 1995년 해체되었다.
10년 간 보존 처리 후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의 용산 이전과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개성 경천사(좌)와 경복궁(우)에 있는 경천사지 10층 석탑
배성식 / 여행작가
평소 여행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 한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모아 2022년에 아빠들을 위한 주말 놀거리, 먹거리 프로젝트 <아빠와 함께하는 두근두근 보물찾기>를 발간하였다.
2024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 최대의 언론사 그룹인 여행요미우리출판사를 통해 한국의 관광명소와 외국인들이 꼭 경험해 볼 만한 곳들을 소개한 ‘한국의 핫 플레이스 51’을 일본어 <韓国のホットプレイス51>로 공동 발간했다.
이메일 ssbae100@naver.com / 인스타그램 @k_stargram51
<저작권자© 트롯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배성식
기자
트롯뉴스 © 트롯뉴스 All rights reserved.
트롯뉴스의 모든 콘텐츠(기사 등)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