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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퍼진 축구, 국제대회 필요성 대두
월드컵의 아버지, ‘쥘 리메’ FIFA 초대 회장
1930년 우루과이에서 첫 월드컵 개최
전쟁을 넘어 세계인의 축제로 성장한 월드컵
2026년 북중미 월드컵 대한민국과 체코 경기 모습 / 사진=연합뉴스
2026 북중미 월드컵은 대한민국 축구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 준 대회였다. 한국 대표팀은 조별리그에서 탈락했고, 패배의 충격은 경기장 안을 넘어 밖으로까지 이어졌다. 감독의 전술과 선수 기용은 물론, 감독 선임 과정과 대한축구협회의 운영 방식까지 거센 비판을 받았다. 팬들은 이번 탈락이 단순한 한 번의 실패가 아니라 오랫동안 누적된 한국 축구의 구조적 문제가 드러난 결과라고 평가했다.
결국 대한축구협회장과 대표팀 감독은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축구협회를 향한 개혁 요구도 더욱 거세졌다.
이처럼 FIFA 월드컵은 올림픽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국제 스포츠 행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에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경기를 시청하고, 거리마다 국가대표팀을 응원하는 사람들로 활기를 띤다. 선수들에게 월드컵 우승은 최고의 영예이며, 국민에게는 국가를 하나로 묶는 특별한 순간이 된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 잡은 월드컵도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월드컵은 국제 축구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문제와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탄생한 대회였다.
특히 국제축구연맹(FIFA)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축구 운영 방식과 선수 참가 자격을 둘러싼 견해 차이는 월드컵 창설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축구의 시작은 19세기 영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에서는 학교와 지역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축구를 즐기고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공을 손으로 들고 달릴 수 있었고, 어떤 곳에서는 발만 사용할 수 있었다.
경기 규칙이 제각각이다 보니 서로 경기를 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러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1863년 영국축구협회(FA)가 창설되면서 현대 축구의 규칙이 정리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 축구 규칙의 출발점이 되었다.
규칙이 통일되자 축구는 놀라운 속도로 세계로 퍼져 나갔다. 당시 영국은 세계 곳곳과 무역을 하던 나라였기 때문에 상인과 선원, 철도 기술자, 유학생들이 축구를 다른 나라에 전파했다.
유럽은 물론 남아메리카에서도 축구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도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했다. 공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점도 축구가 빠르게 퍼진 이유였다.
축구가 세계적인 스포츠로 성장하면서 나라별 축구협회가 만들어졌고 국가대표팀도 생겨났다. 여러 나라가 친선경기를 열며 실력을 겨루었지만, 세계 챔피언을 가리는 공식 대회는 없었다. 당시 가장 권위 있는 국제 스포츠 대회는 올림픽이었기 때문에 축구 역시 올림픽 종목으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올림픽 축구는 점차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아마추어 정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IOC는 운동으로 돈을 버는 프로 선수는 올림픽에 참가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스포츠는 순수한 아마추어 선수들이 경쟁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올림픽의 기본 원칙이었다.
반면 축구는 다른 종목보다 훨씬 빠르게 프로 스포츠로 발전하고 있었다. 영국과 이탈리아, 스페인, 우루과이, 아르헨티나에서는 프로 리그가 만들어졌고, 뛰어난 선수들은 축구를 직업으로 삼기 시작했다. 팬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선수들도 대부분 프로 선수였다.
IOC와 FIFA의 갈등으로 생겨난 월드컵
그러나 이 선수들은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었다. 결국,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빠진 상태에서 국제대회가 열리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FIFA는 이런 현실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축구는 이미 세계적인 스포츠가 되었는데 최고의 선수들이 출전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세계 챔피언을 가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IOC는 올림픽의 전통과 아마추어 정신을 포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양측은 여러 차례 협의했지만, 의견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결국, FIFA는 새로운 결정을 내리게 되는데 올림픽에 의존하지 말고 축구만을 위한 독립적인 세계선수권대회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이 계획을 가장 적극적으로 추진한 인물은 프랑스 출신의 변호사이자 축구 행정가인 ‘쥘 리메’였다.
그는 누구보다 축구를 사랑했으며, 스포츠가 국경과 문화를 넘어 사람들을 하나로 이어 줄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을 직접 겪으면서 전쟁이 수많은 생명과 행복을 앗아가는 모습을 목격한 그는, 전쟁터에서 총을 겨누는 대신 운동장에서 공을 차며 경쟁하는 세상이 훨씬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월드컵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FIFA 초대 회장이었던 '쥘리메' / 사진=위키디피아
그래서 그에게 월드컵은 단순히 새로운 축구대회를 만드는 일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같은 규칙 아래에서 공정하게 경쟁하고, 승패를 떠나 서로를 존중하며 우정을 나누는 새로운 국제 문화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러한 신념은 결국 세계 최초의 국제 축구대회인 FIFA 월드컵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오늘날 월드컵이 세계인을 하나로 묶는 축제로 자리 잡는 밑거름이 되었다.
초대 FIFA 회장이었던 쥘 리메는 FIFA 회원국들을 하나하나 설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반대하는 나라들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생각에 공감하는 나라가 늘어났다. 프로축구가 계속 발전하면서 올림픽만으로는 세계 최고의 축구대회를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이 인정하게 된 것이다.
마침내 192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FIFA 총회에서 세계 축구선수권대회를 창설하기로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FIFA 월드컵의 출발이었다.
첫 개최지는 남아메리카의 우루과이로 결정되었다. 당시 우루과이는 세계 최강의 축구 국가였다.
1924년과 1928년 올림픽 축구에서 연속 우승하며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고, 1930년은 독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기도 했다. 우루과이는 경기장 건설과 대회 운영 비용을 부담하고 참가국들의 이동 비용 일부까지 지원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개최권을 얻었다.
하지만 첫 월드컵 준비는 결코 쉽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비행기를 타면 하루 만에 지구 반대편으로 갈 수 있지만, 당시에는 대부분 배를 이용해야 했다. 유럽에서 우루과이까지는 대서양을 건너 2주 이상 항해해야 했고 여행 경비도 매우 비쌌다. 경제 불황까지 겹치면서 여러 유럽 국가가 참가를 망설였다.
결국, 첫 월드컵에는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 남아메리카 국가들과 미국, 멕시코, 프랑스, 벨기에,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등 모두 13개 나라만 참가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작은 규모였지만, 세계 여러 나라가 축구만을 위해 모인 최초의 국제대회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는 매우 컸다.
1930년 월드컵 초대 챔피언 우루과이에 쥘리메컵을 전달하고 있는 쥘리메 1930년 7월 13일, 역사적인 첫 월드컵 경기가 시작되었다. 경기장은 수많은 관중으로 가득 찼고 사람들은 새로운 세계대회의 탄생을 직접 지켜보았다. 결승전에서는 개최국 우루과이가 아르헨티나를 4대2로 꺾으며 역사상 첫 월드컵 우승국이 되었다. 이 대회의 성공은 FIFA가 선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다.
참고로, 1회 월드컵부터 우승컵이 ‘빅토리’, ‘FIFA컵’으로 불리다가 1946년 룩셈부르크 FIFA 총회 때 쥘 리메 회장의 공을 기리기 위해 ‘줄리메컵’으로 명명되었다. 1930년 컵을 기증할 때 쥘 리메 회장은 “어느 나라든 먼저 3차례 우승하는 국가에게 이 컵의 영구 소유권을 준다.”라는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월드컵은 곧 또 다른 시련을 맞게 되는데, 1942년과 1946년 월드컵은 개최되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50년 브라질 월드컵을 통해 대회는 다시 시작되었고, 이후에는 한 번도 중단되지 않고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축구 황제 펠레를 축으로 한 브라질이 1958년 스웨덴 월드컵, 1962년 칠레 월드컵에 이어 1970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승하며 줄리메컵을 영원히 소유하게 되었다.
브라질은 1958, 1962, 1970년 월드컵 3회 우승으로 쥘리메컵을 영구 소장
1974년부터 월드컵 우승국에 주는 FIFA 월드컵은 시상식 때 잠깐 수여된 후 즉시 회수하는데, 매 대회마다 우승국 이름과 해당 연도의 숫자가 트로피 하단에 새겨진다. 대신 복제품을 우승국가에게 준다.
참고로, 월드컵 트로피는 높이 36.5cm, 무게 6.175kg, 18K 금 5kg, 초록색 부분은 공작석으로 제작되었으며, 사용기한은 2038년(예상)이다.
1974년 대회부터는 우승국을 트로피 하단에 새기고 복제품을 수여 / 사진=연합뉴스
세월이 흐르면서 FIFA와 IOC의 관계도 변화했다. 처음에는 프로 선수 문제를 놓고 크게 충돌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역할을 인정하게 되었다. 올림픽 축구는 젊은 선수들이 국제 경험을 쌓는 무대로 발전했고, 월드컵은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최고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무대로 자리 잡았다.
두 대회는 서로 경쟁하기보다 축구 발전을 위해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역시 월드컵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나라다. 1954년 처음 본선 무대를 밟은 이후 꾸준히 월드컵에 참가했고, 2002년에는 일본과 함께 월드컵을 공동 개최했다. 당시 한국 대표팀은 폴란드와 포르투갈을 꺾고, 이탈리아와 스페인까지 연이어 물리치며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 4강 진출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붉은악마와 수백만 명의 국민이 거리에서 함께 응원하던 모습은 지금도 세계 스포츠 역사에 남아 있는 명장면으로 평가받는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은 스페인을 물리치고(2002년 6월 22일 광주) 아시아 최초로 4강 신화 달성 / 사진=배성식 제공 오늘날 월드컵은 단순히 우승팀을 가리는 축구대회가 아니다.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 종교와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공을 중심으로 함께 기뻐하고 함께 감동하는 세계인의 축제이다. 그리고 그 시작에는 올림픽과 FIFA의 갈등, 프로 선수 문제, 전쟁을 넘어 평화를 꿈꾸었던 쥘 리메의 신념, 그리고 축구를 사랑했던 수많은 사람의 노력이 있었다.
월드컵의 역사를 알고 나면 한 경기, 한 골의 의미도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우리가 4년마다 즐기는 이 대회는 우연히 만들어진 행사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도전과 열정, 그리고 시대의 변화가 만들어 낸 세계 축구의 소중한 유산인 것이다.
배성식 / 여행 작가
평소 여행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 한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모아 2022년에 아빠들을 위한 주말 놀거리, 먹거리 프로젝트 <아빠와 함께하는 두근두근 보물찾기>를 발간하였다.
2024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 최대의 언론사 그룹인 여행요미우리출판사를 통해 한국의 관광명소와 외국인들이 꼭 경험해 볼 만한 곳들을 소개한 ‘한국의 핫 플레이스 51’을 일본어 <韓国のホットプレイス51>로 공동 발간했다.
인스타그램 @k_stargram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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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식
기자
ssbae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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