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여 년, 시대를 울린 가수 최진희 인터뷰 ②
“왜 최진희가 트로트를 부르면 발라드가 되느냐?”
KBS ‘가요무대’에서 전통 트로트 ‘찔레꽃’을 부른 뒤 담당 PD들에게 들었던 말이다. 최진희는 이 질문을 수십 년째 받아왔고, 그때마다 같은 대답을 해왔다.
“저는 트로트 가수라기보다 스탠다드 발라드 가수죠.”
밴드와 팝으로 가창의 뼈대를 세운 가수가 트로트를 만났을 때 벌어진 일. 그리고 그 경험에서 길어 올린 가수론.
상편이 ‘사랑의 미로’가 태어나기까지의 시간이었다면, 하편은 최진희가 지금의 가요계를 향해 던지는 이야기다. 4년 만에 내놓은 신곡 ‘누구신가요’ 역시 그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최진희가 지난 1일 디지털 싱글 ‘누구신가요’를 각종 음원 사이트를 통해 발매했다. 2022년 ‘사랑에 빠졌어’ 이후 4년 만에 내놓는 신곡이다. 이 곡은 재즈 알터드 보사노바 리듬을 축으로 삼았다. 사진은 최진희 누구신가요 앨범아트
“하루에 최대 13군데 무대서 공연”
1980년대 정수라, 이선희, 김범룡, 주현미, 나미 등과 같은 시기를 달렸지만, 그는 누구도 라이벌로 의식한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이유는 시간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하루에 열세 군데까지 무대를 다녔어요. 오로지 일만 하는 기계였죠. 누구랑 이야기할 틈도 없었어요.”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가수마다 자기 색깔이 다 있어요. 주현미의 노래를 제가 부른다고 맞는 것도 아니고, 이선희의 노래를 제가 불러도 어울리지 않아요. 저는 제 노래를 해야 하는 거죠.”
경쟁 대신 자기 색깔을 택한 이 판단이, 결과적으로 그를 가장 오래 살아남게 했다.
“꺾기는 안 하는게 아니라 못하는 것”
대중은 그를 트로트 가수로 분류해왔지만 정작 본인의 자기규정은 다르다.
밴드에서 출발해 무명 시절 팝송만 불렀던 그에게 트로트의 관습적 문법은 애초에 몸에 붙지 않았다.
‘꺾기’를 거부한 것도 아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돼서 못 하는 거예요. 제가 부르면 트로트도 발라드가 된다니까요.”
말끝에 웃음이 섞였지만, 결과적으로 이 ‘안 되는 꺾기’가 ‘천상재회’ 같은 곡에서 트로트와 발라드가 겹치는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어냈다.
오늘날 그가 한국 크로스오버 보컬의 원조로 불리는 이유다.
트로트 창법에 대한 견해도 분명했다.
“트로트는 많이 꺾어야 트로트라는 기준이 있는 건 아니에요. 절제된 음의 느낌이 오히려 훨씬 더 애절하게 들릴 수 있거든요. 처음부터 끝까지 꺾어대기만 한다면 나중에는 뭘 보여줄 겁니까?”
그는 노래를 밥상에 비유했다.
“밥과 국만 계속 먹으면 맛이 없어요. 콩나물도 먹고 호박도 먹고 된장도 먹어야죠. 노래도 짠맛, 싱거운 맛, 신맛이 다 있어야 해요. 짜릿함도 있고 속삭임도 있고 달콤함도 있어야 듣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죠.”
“박자 음정 지키며 나의 매력 넣어야!”
이야기의 무게중심은 자연스럽게 후배 세대로 옮겨갔다. 그는 먼저 오늘날 가수들이 짊어진 부담을 인정했다.
“예전이 듣는 가수였다면 지금은 보는 가수예요. 퍼포먼스도 잘해야 하고, 얼굴도 예뻐야 하고, 노래도 잘해야 하고. 우리 때보다 훨씬 힘들 거예요. 노래도 옛날 가수들보다 잘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아쉬움이 이어졌다.
“눈을 감고 라디오로 들었을 때 ‘아, 저건 최진희야, 저건 주현미야’ 하고 알 수 있어야 해요. 그런데 요즘은 목소리만 들어서는 누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다들 비슷하게 잘 부릅니다.”
그는 대중가요와 클래식의 차이를 들어 설명했다. 정확한 음정과 박자, 발성은 체계적 훈련을 받은 클래식 성악가가 더 잘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이다.
“대중가요 가수는 정식 훈련을 안 받아도 돼요. 내 맘대로 해도 돼요. 대신 내가 더 매력 있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래야 오랫동안 상대방의 머릿속에 남죠. 그게 가요와 클래식이 다른 지점이에요.”
물론 ‘내 맘대로’가 기본기를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코드 진행을 직접 짚어가며 설명했다.
“‘그토록’까지가 C면 ‘다짐을 하건만’은 F예요. 코드 안에서 멜로디가 놀아야 해요. 박자와 음정을 정확히 지키면서, 그 안에 나의 매력을 넣어주는 겁니다.”
이 원칙을 그는 지금도 현장에서 시험하고 있다. 마침 인터뷰 며칠 전 발매한 신곡이 그 사례였다.
최진희는 오래 노래하는 가수가 되려면 자기만의 색깔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경연효과등으로 사람이 먼쩌 뜨기도 하지만 결국 히트곡도 개성도 없는 가수가 오래가기는 쉽지 않다고 충고한다/ 사진=제이제이엔터테인먼트
4년 만의 보사노바 신곡 ‘누구신가요’
최진희는 지난 1일 오후 6시 디지털 싱글 ‘누구신가요’를 각종 음원 사이트를 통해 발매했다. 2022년 ‘사랑에 빠졌어’ 이후 4년 만에 내놓는 신곡이다.
주목할 대목은 장르다. 이 곡은 재즈 알터드 보사노바 리듬을 축으로 삼았다. 트로트나 정통 발라드가 아니라, 라틴 리듬 위에 성인가요의 정서를 얹은 선택이다.
데뷔 이래 팝과 발라드, 트로트의 경계를 넘나 들어온 가수가 다시 한번 장르의 문턱을 넘은 셈이다.
노랫말은 이별의 상처를 안은 한 여인의 밤을 그린다.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 공허함을 달래보지만 쉽게 채워지지 않는 마음, 그 빈자리를 위로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정서가 직설적인 문장으로 놓였다.
‘사랑의 미로’와 ‘꼬마 인형’으로 이어져 온 기다림의 계보가 40여 년 만에 보사노바 리듬 위에 다시 얹힌 것이다.
최진희는 이 곡을 예로 들어 자신이 말하는 ‘표현’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쓰디쓴 술잔에 입 맞추고’ 같은 한 마디도 어디서 끊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져요. 한숨을 섞어서 묘미를 주기도 하고요. 멜로디를 따라가면서 거기에 나의 매력을 넣어야 하는 거죠.”
작곡은 최영규가 맡았다. 최진희는 신곡 활동과 함께 방송 스케줄도 이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히트곡 없이 사람 먼저 뜨는 건 문제”
AI가 사람보다 정확하게 노래하는 시대에 대한 견해도 같은 결이었다.
“AI는 노래를 너무 잘해요. 그런데 들으면 금방 알잖아요. 어떤 노래든 다 할 수 있지만, 개성이 없으면 매력이 없는 거죠.”
결국, 인간 가수에게 필요한 것은 AI보다 더 정확한 음정이나 더 완벽한 박자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잘하면서도 개성이 있어야지. 어떤 사람은 비음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복식호흡으로 부르고, 다 다르잖아요. 자기 개성을 찾아서 해야죠.”
경연 프로그램이 쏟아낸 신인들에 대해서도 그는 냉정했다.
“예전에는 히트곡 하나 만들기가 바늘구멍 뚫기보다 어렵다고 했어요. 지금은 히트곡이 없어도 사람이 먼저 뜹니다. 하지만 히트곡도 개성도 없는 가수가 오래가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해요. 방송이 끝나면 함께 끝나는 경우가 있죠. 그중에서 남는 사람은 결국 자기만의 색깔이 있는 가수일 겁니다.”
과거의 가수에게는 밤무대라는 훈련장이 있었다. 하루 열세 곳을 도는 강행군이 곧 실전 수업이었다. 지금은 방송이 끝나면 설 무대가 마땅치 않다. 이 구조적 공백이야말로 오늘의 트로트 산업이 마주한 가장 현실적인 과제다.
후배들의 커버에 대해서는 인색하지 않았다. 그는 ‘천상재회’를 부른 김호중과 임영웅의 해석을 좋게 봤다고 했고, 후배들이 자신의 곡을 새로 편곡하는 데 대해서도 반겼다.
“너무 좋죠. 저는 새로운 걸 들을 수 있잖아요. 편곡도 아이디어가 있어야 나오는 거예요. 그만큼 그 노래에 애착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그림 도자기 유튜브 등 하루가 짧다
최진희는 요즘 딸과함께 하는 유튜브방송제작에 푹 빠져있다. 음악은 물론 다양한 일상을 유튜브를 통해 팬들과 호흡하고 있다/사진=유튜브 '최진희TV'
최진희의 하루는 노래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매일 한 시간 반씩 매트를 깔고 운동하고, 도자기를 굽고, 빵을 만들고, 그림을 그린다.
“저는 집에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미술 분야에서는 마티에르(질감)를 살린 작업으로 강남 라움에서 전시회를 열어 1억 원 상당의 작품을 판매했다. 작업 공간은 하남 강가의 농장이다.
사진과의 인연도 깊다. 인물 사진의 대가 지영빈 감독이 대중가수 가운데 처음으로 화보를 촬영한 주인공이 최진희였다. 하와이 로케이션에서 청바지 차림으로 찍은 그 화보는 이후 송대관, 설운도 등 동료 가수들이 줄지어 지 감독을 찾게 만든 계기가 됐다. 지 감독은 “카메라만 대면 포즈가 너무 잘 나오는, 씬이 좋고 끼가 많은 분”이라고 그를 기억했다.
제주에서 기타를 치며 ‘웨딩케익’을 부르는 모습이 좋아 뮤직비디오로 만든 것도 지 감독이었다.
1986년 국제가요제 금상 기억 남아
수상 경력 가운데 그가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은 1986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서울 국제가요제다. 미국, 일본, 몽골, 뉴질랜드 등 각국 가수들이 참가한 무대에서 그는 금상과 빌보드 관련 상을 함께 받았다. 한국에서는 구창모, 전영록과 함께 출전했는데 수상자는 그뿐이었다.
“두 달 넘게 한강에서 하루 두 시간씩 뛰었어요. 폐활량을 키우려고요.”
이듬해 뉴질랜드 대회에서도 금상을 받았다. 10대 가수상과 백상예술대상 주제가상, 국무총리 표창도 그의 이력에 함께 놓여 있다.
최진희는 매일 매트를 깔고 운동하고, 도자기를 굽고, 빵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등 하루가 짧다/사진=유튜브 '최진희TV'
가장 최근의 도전은 딸과 함께 시작한 유튜브 채널 ‘최진희 TV’다. 기획과 촬영, 편집은 딸이 맡는다. 개설 한 달 만에 구독자가 꾸준히 늘고 있다고 했다.
시작은 노래가 아니라 미안함이었다.
“전성기 때는 노래하러 다니느라 딸을 직접 키우지 못했어요. 어느 날 딸이 ‘엄마랑 나랑 추억이 너무 없다.’라고 하더군요. 그 말이 마음에 남았어요. 그래서 함께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고, 같이 일을 하면 시간을 더 많이 보낼 수 있겠다 싶어 유튜브를 하게 됐죠.”
도자기 공방 식구들과 해물 라면을 끓여 먹는 소소한 장면이 그대로 콘텐츠가 된다. 그는 유튜브를 시작한 뒤 딸과의 관계가 훨씬 좋아졌다고 말했다. 무대 이야기를 할 때보다 이 대목에서 그의 표정이 더 환해졌다.
“AI 시대 노래 잘하는 것 만으론 안돼”
마지막 질문은 세계화였다. K팝이 세계 시장을 열어젖힌 지금, 트로트와 발라드도 해외에서 통할 수 있을까? 그는 신중했다.
“동양권에서는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요. 발라드는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트로트는 아직 판단이 잘 안 서요.”
그의 음악 인생 자체가 이미 경계를 넘는 일의 연속이었다. 팝에서 출발해 스탠다드 발라드를 거쳐 트로트를 아울렀고, 휴전선 너머에서도 자신의 노래를 불렀으며, 이제는 유튜브와 AI라는 새로운 환경을 통과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말은 선배의 훈계로 들리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무대에서 살아남은 한 가수가 변화하는 산업을 향해 내놓은 답에 가깝다.
“잘 부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만의 색깔이 더 중요해요.”
노래를 잘하는 사람은 많아졌다. 정확한 음정과 박자, 완벽한 퍼포먼스와 녹음 기술은 더이상 희소한 능력이 아니다. AI까지 사람보다 정확하게 노래한다.
그럴수록 남는 조건은 오히려 단순해진다. ‘누구의 노래인가’를 알아들을 수 있게 하는 것.
‘사랑의 미로’의 첫 소절이 흘러나오는 순간, 우리는 굳이 제목을 확인하지 않는다. 목소리가 먼저 이름을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 시대를 건너온 가수가 후배들에게 남길 수 있는, 가장 오래됐으면서 동시에 가장 새로운 원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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