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스타디움에는 실존 가수의 목소리가 울렸고, 다른 스타디움에는 다섯 명의 버추얼 아이돌이 등장했다. 실제 무대 위 존재 방식은 달랐지만 객석을 가득 채운 함성과 응원봉, 스타를 향한 팬들의 감정만큼은 다르지 않았다.
최근 임영웅이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스타디움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데 이어, 버추얼 아이돌 그룹 플레이브(PLAVE)가 인천문학경기장 주경기장에 입성했다. 두 공연은 한국 공연시장이 얼마나 거대한 팬덤을 형성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미래의 스타가 반드시 실제가수가 무대에 올라야 하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
플레이브는 지난 12일과 13일 이틀간 인천문학경기장 주경기장에서 ‘2026 플레이브 월드 투어 킵 잇 매닉(KEEP IT MANIC)’을 열고 데뷔 첫 월드 투어의 막을 올렸다.
홍대 버스킹에서 출발한 버추얼 그룹이 스타디움 규모의 공연장에 서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리길지 않았다. 이번 공연은 단순한 인기 확인을 넘어 버추얼 아이돌이 온라인 콘텐츠와 실내 공연장을 벗어나 대형 야외 공연시장에서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가늠하는 시험대였다.
최근 임영웅이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스타디움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데 이어, 버추얼 아이돌 그룹 플레이브(PLAVE)가 인천문학경기장 주경기장에 입성했다. 두 공연은 한국 공연시장이 얼마나 거대한 팬덤을 형성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미래의 스타가 반드시 실제가수가 무대에 올라야 하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졌다./사진=블래스트
화면이 무대, 스타디움이 세계관
먼저 시선을 압도한 것은 무대의 크기였다.
가로 120m, 세로 20m가 넘는 초대형 LED가 설치됐다. 인천문학경기장에서 열린 아티스트 콘서트 가운데 최대 규모로 알려진 이 화면은 단순히 영상을 보여주는 배경 장치가 아니었다
경기장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로 바뀌었다. 영상과 조명, 캐릭터의 움직임과 실제 무대 연출이 한 덩어리처럼 이어지면서 관객은 콘서트와 대형 미디어아트 쇼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을 하게 됐다.
플레이브는 화면 속 캐릭터를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실제 무대에서는 불가능하거나 구현하기 어려운 공간과 배경을 자유롭게 불러오고, 캐릭터의 움직임에 맞춰 스타디움 전체의 분위기를 바꿨다. 가상이라는 조건을 감추기보다 버추얼이기 때문에 가능한 장면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공연은 오프닝 영상에 이은 노아의 활쏘기 퍼포먼스로 시작됐다. ‘여섯 번째 여름’, ‘숨바꼭질’, ‘WAY 4 LUV’가 잇달아 펼쳐지며 초반부터 빠르게 열기를 끌어올렸다.
멤버들은 첫 무대를 마친 뒤 “홍대에서 버스킹할 때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며 팬덤 플리(PLLI)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캐릭터로 전해진 인사였지만 팬들에겐 그 안에 담긴 감사와 감격은 현실의 감정과 다르지 않았다. 이 장면은 이날 공연이 기술 시연회가 아니라 아티스트와 팬이 함께 성장해온 시간을 확인하는 자리라는 점을 보여줬다.
실제 퍼포머들 한 무대에 등장
‘흥흥흥’에서는 스타디움 규모의 떼창이 터졌고, ‘Chroma Drift’에서는 재즈 편곡과 콘트라베이스를 활용해 분위기를 전환했다. ‘Watch Me Woo!’와 ‘Rizz’에서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전통 디자인에서 착안한 무대에 호랑이와 부채 퍼포먼스를 더해 동양적 미감을 현대적인 버추얼 공연 문법으로 풀어냈다.
예준·노아·밤비·은호·하민의 솔로 무대는 멤버별 캐릭터와 음악적 개성을 드러냈다. 영화적인 감성부터 관능적인 댄스, 거미줄과 뱀파이어를 활용한 판타지 연출까지 현실의 무대에서는 복잡한 장치 전환이 필요한 장면들이 버추얼 공간 안에서 빠르게 이어졌다.
공연 후반부에는 ‘버추얼 아이돌’ 록 버전과 ‘Dash’가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특히 ‘Born Savage’에서는 버추얼 멤버와 실제 퍼포머가 한 무대에 등장해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렸다.
이는 플레이브가 지향하는 공연 문법을 압축해 보여준 장면이었다. 가상과 현실 가운데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두 영역을 결합해 기존 콘서트에서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낸 것이다.
플레이브는 ‘AI 가수’가 아니다
버추얼 가수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플레이브는 인공지능이 스스로 노래하고 활동하는 ‘AI 가수’가 아니다.
실제 멤버들이 직접 노래하고 춤추며 팬들과 대화한다. 이들의 표정과 동작은 모션 캡처 등 기술을 통해 캐릭터로 구현된다.
작사와 작곡, 안무와 무대 퍼포먼스에도 멤버들이 참여한다.
다시 말해 플레이브의 캐릭터는 사람을 대체하는 존재가 아니라 실제 아티스트가 자신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모습이다. 팬들도 단지 화려한 그래픽만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다. 캐릭터 뒤에 존재하는 사람의 목소리와 성격, 관계와 성장의 서사를 함께 지켜본다.
기술이 아무리 정교해도 노래와 스토리가 없다면 팬덤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플레이브의 스타디움 입성이 주목받는 이유도 기술의 승리라기보다, 기술을 매개로 형성된 아티스트와 팬덤의 관계가 실제 대형 공연장을 움직일 정도로 성장했다는 데 있다.
임영웅과 플레이브, 다른 문법
고양 스타디움에 선 임영웅은 실존 가수와 팬덤이 만들어내는 대형 공연의 정점을 보여줬다.
임영웅의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 목소리와 무대 위 존재감, 무명 시절부터 국민적인 스타가 되기까지 축적된 한 사람의 서사다. 팬덤 영웅시대는 그 시간을 함께해온 공동체로서 스타디움을 가득 채웠다.
플레이브의 방식은 다르다.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현실의 외형을 그대로 드러낸 가수가 아니라 캐릭터다. 그러나 노래하고 움직이며 팬들과 소통하는 주체는 실제 사람이다. 여기에 실시간 그래픽과 거대한 디지털 무대, 캐릭터의 세계관이 결합한다.
두 공연의 외형은 다르지만 관객이 구매하는 경험은 크게 다르지 않다. 좋아하는 스타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했다는 감정, 팬덤의 일원이라는 소속감, 수만 명이 함께 부르는 노래와 현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집단적 감동이다.
결국 버추얼 공연은 현실 공연의 반대가 아니다. 현실 공연의 범위를 넓히는 또 하나의 형식에 가깝다.
임영웅이 사람과 목소리, 인생 서사가 만드는 스타디움의 힘을 보여줬다면 플레이브는 사람의 창작과 캐릭터, 기술과 세계관이 결합한 새로운 스타디움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고양 스타디움에 선 임영웅은 실존 가수와 팬덤이 만들어내는 대형 공연의 정점을 보여줬다.임영웅의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 목소리와 무대 위 존재감, 무명 시절부터 국민적인 스타가 되기까지 축적된 한 사람의 서사다. 팬덤 영웅시대는 그 시간을 함께해온 공동체로서 스타디움을 가득 채웠다./사진=물고기뮤직 제공
ABBA, 전성기 시간 무대에 되돌려
버추얼 공연시장의 또 다른 사례는 스웨덴의 전설적인 그룹 ABBA가 보여주고 있다.
2022년 영국 런던에서 시작된 ‘ABBA Voyage’는 ABBA 멤버들의 젊은 시절 모습을 디지털 아바타로 재현한 공연이다. 실제 멤버들이 매일 무대에 오르는 대신, 이들의 움직임과 표정을 기반으로 제작된 디지털 캐릭터가 약 3,000석 규모의 전용 공연장에서 10인조 라이브 밴드와 공연한다.
플레이브가 현재 활동하는 아티스트의 또 다른 정체성이라면, ABBA의 디지털 아바타는 과거 전성기의 시간을 오늘의 무대 위에 불러오는 방식이다.
성과도 적지 않다. 2025년 공개된 영향 분석에 따르면 ‘ABBA Voyage’는 개막 이후 약 350만 명의 관객을 불러모았고, 관광과 숙박·외식 등을 포함해 영국 경제에 약 20억6,000만 파운드 규모의 경제활동을 창출한 것으로 추산됐다.
이는 한 가수의 공연 가능 연령을 연장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음악과 아티스트의 이미지, 팬들의 기억을 장기간 운영할 수 있는 공연 지식재산권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같은 방식은 가수가 고령이거나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더라도 공연은 계속될 수 있도록 했다.
한 번 제작한 콘텐츠를 전용 공연장에서 반복해 선보이거나, 기술과 시설을 다른 도시로 옮겨 새로운 관객을 만날 수도 있다. 공연산업이 아티스트의 일정과 체력에 의존하던 구조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열린 셈이다.
트로트 전설도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이러한 변화는 국내 트로트와 대중가요 시장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이미 세상을 떠난 전설적인 가수가 전성기의 모습으로 다시 무대에 올라 자신의 대표곡을 부르고, 실제 후배 가수와 한 무대에서 듀엣을 하는 공연도 기술적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남인수·백년설·현인·배호·이미자·나훈아 등 한국 대중가요의 한 시대를 이끈 가수들의 음악과 무대, 생애를 디지털 기술과 결합한다면 단순한 추모공연을 넘어 한국 대중음악 100년을 체험하는 새로운 문화 콘텐츠가 만들어질 수 있다.
특정 시대의 극장과 악단, 거리와 사회상을 재현해 관객이 그 시절의 노래를 입체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상설 공연도 가능하다.
해외 관객에게는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와 트로트의 서사를 설명하는 문화관광 콘텐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목소리와 얼굴을 되살릴 수 있다는 기술적 가능성이 곧바로 재현의 정당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인이 된 가수의 얼굴과 목소리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유족의 동의와 초상권, 퍼블리시티권, 음원과 영상 저작권뿐 아니라 고인이 생전에 지켜온 음악적 정체성과 명예도 존중해야 한다.
전설적인 가수를 단순한 흥행 도구로 소비하거나 생전에 하지 않았을 말과 행동을 디지털 캐릭터에게 시킨다면 팬들의 거부감이 커질 수 있다.
역사적 기록을 충실하게 복원한 공연과 고인을 임의로 변형한 상품은 엄격하게 구분돼야 한다.
2022년 영국 런던에서 시작된 ‘ABBA Voyage’는 ABBA 멤버들의 젊은 시절 모습을 디지털 아바타로 재현한 공연, 실제 멤버들이 매일 무대에 오르는 대신, 이들의 움직임과 표정을 기반으로 제작된 디지털 캐릭터가 약 3,000석 규모의 전용 공연장에서 10인조 라이브 밴드와 공연한다./사진=ABBA Voyage 공식사이트2
버추얼 공연 관건은 기술보다 신뢰
버추얼 공연시장이 성장하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먼저 실시간 공연의 안정성이다. 대형 공연에서는 캐릭터의 입 모양과 목소리, 동작과 영상이 조금만 어긋나도 관객의 몰입이 깨진다. 공연장 규모가 커지고 해외 투어가 확대될수록 통신 지연과 장비 장애, 현지 공연장별 기술 차이에 대응할 수 있는 표준화가 필요하다.
높은 제작비도 넘어야 할 벽이다. 대형 LED와 실시간 그래픽, 모션 캡처 시스템, 전문 인력과 백업 장비를 갖추려면 기존 콘서트보다 큰 초기 투자가 필요할 수 있다. 충성도 높은 팬덤과 장기적인 지식재산권 사업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화려한 기술이 오히려 수익성의 부담이 될 수 있다.
실제 창작자와 퍼포머의 권리도 중요하다. 캐릭터 뒤에서 노래하고 움직이는 사람이 정당한 보상과 권리를 보장받는지, 목소리와 동작 데이터가 계약 종료 후에도 사용되는지에 관한 기준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팬들의 신뢰다. 어디까지가 실제 가창과 실시간 움직임이고, 어디부터가 사전에 제작된 영상이나 기술적 보정인지를 과도하게 감춰서는 안 된다. 버추얼 캐릭터라고 해서 모든 것을 허구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버추얼가수는 ‘가짜’ 아니라 ‘확장’
플레이브의 인천 공연이 보여준 것은 ‘버추얼가수도 스타디움에 설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팬들이 사랑하는 대상과 연결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 아티스트가 표현되는 방식은 더 이상 공연의 절대적 한계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대 위 캐릭터는 가상이지만 그 캐릭터를 만들고 움직이며 노래하는 사람과 이를 바라보는 팬들의 감정은 현실이다.
임영웅이 실존 스타와 팬덤이 만들어내는 스타디움 공연의 정점을 보여줬다면, 플레이브는 사람과 캐릭터, 기술과 팬덤이 결합한 또 하나의 스타디움 문법을 제시했다. ABBA는 한 시대의 기억까지 현재의 공연산업으로 되돌려 놓았다.
앞으로의 공연장은 살아 있는 가수와 버추얼 아이돌, 과거의 전설이 함께 서는 공간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크다. 공연의 주인공이 반드시 실제 가수여야 하는 시대도 서서히 저물고 있다.
다만 기술이 사람을 대신하는 것만으로는 관객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아무리 정교한 아바타라도 노래와 서사, 진정한 소통이 없다면 거대한 화면 속 이미지에 머물 뿐이다.
플레이브가 인천에서 증명한 것도 기술의 크기가 아니었다. 가로 120m의 화면보다 더 컸던 것은 그 화면 속 존재를 현실의 스타로 받아들이고 함께 노래한 팬덤의 마음이었다.
‘킵 잇 매닉’은 인천 공연을 시작으로 9월 26일과 27일 가나가와, 10월 3일 가오슝, 10월 10일 방콕, 10월 17일 싱가포르, 10월 23일과 24일 타이베이, 10월 31일과 11월 1일 마카오, 11월 14일 로스앤젤레스로 이어진다.
인천 스타디움에서 가능성을 확인한 플레이브가 언어와 공연 환경이 다른 해외 무대에서도 같은 몰입감과 팬덤의 열기를 구현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제 시험대는 스타디움 입성 자체가 아니라, 이 새로운 공연 문법이 세계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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