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성 보컬의 거장, 레전드 조항조 인터뷰 ①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1997년 말, 외환위기의 한파 속에서 수많은 가장이 하루아침에 일터를 잃었다. 실직의 아픔을 가족 앞에 꺼내놓지 못한 채 아침이면 전날처럼 집을 나섰다. 그러나 출근할 직장은 없었다. 공원과 산자락을 배회하다 저녁이 되어서야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 때문에, 남자라는 이유로 가슴을 파고드는 고통을 깊이 눌러 삼켰다.
바로 그 무렵 라디오를 타고 한 노래가 흘렀다. 조항조의 ‘남자라는 이유로’였다. 노래는 감정 과잉 없이 가슴 깊은 곳에서 한 번 삭인 슬픔을 절제된 목소리로 건넸다. 그래서 오히려 더 아프고 깊었다. 노래는 차가운 거리로 내몰린 가장들의 굽은 어깨를 다정하게 다독였다. 퇴근길 차 안에서, 밤바람이 스치는 포장마차 구석에서, 온 가족이 잠든 늦은 밤에 수많은 가장이 그 노래에 기대어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 조항조는 무대 위에서 늘 흐트러짐이 없다. 정갈한 헤어스타일과 단정한 옷차림, 차분한 표정은 오랫동안 그를 50대 중후반의 신사로 기억하게 했다. 한동안 프로필에 1959년생으로 표기됐던 데다, 세월을 비껴간 듯한 동안 외모도 실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했다.
그러나 그 얼굴 뒤에는 한국 대중음악사의 굴곡진 시간이 겹쳐 있다.
최근 방송에서 그가 직접 밝힌 출생 연도는 1953년이다. 70대에 접어든 지금도 청년 같은 맑음과 반세기 음악 인생이 쌓아 올린 깊이를 함께 품고 있다. 잘못 알려진 프로필 나이를 굳이 앞세워 해명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그는 담담히 말했다.
“노래 하나면 되는 것이지, 50년대생이면 어떻고 50년대 후반이면 어떻습니까.”
속일 이유도, 자신을 포장할 이유도 없었다. 나이가 아니라 목소리로 자신을 증명해 온 뮤지션다운 대답이었다.
본명은 홍원표다. 앞에서 읽어도 뒤에서 읽어도 같은 예명 ‘조항조’는 세월과 환경이 달라져도 음악을 향한 중심만은 잃지 않겠다는 그의 삶을 닮았다. 가수가 되기 위해 노래한 것이 아니라, 노래가 너무 좋아 부르다 보니 어느덧 가수의 길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의 음악 출발은 트로트가 아니라 밴드다.
록 밴드의 리드보컬과 건반 연주자로 출발해 언더그라운드의 숱한 밤을 태웠고, 타국에서 비로소 우리 노래의 힘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라는 이유로’의 주인공이 되어 대한민국 가장들의 마음을 울렸다.
트롯뉴스가 조항조의 50년 음악 인생을 두 차례에 걸쳐 기록한다. 1부에서는 합창단 소년이 록 밴드 ‘서기 1999년’의 보컬이 되고, 20년 가까운 무명과 미국 생활을 거쳐 시대를 위로하는 목소리로 거듭나기까지의 여정을 따라간다.
가수 조항조는 트로트와 발라드의 경계를 허문 가요계의 독보적 감성 마에스트로로 평가받으며 세대를 아우르는 단단한 감성과 절제된 음색으로 많은 히트곡을 내면서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사진=우리엔터테인먼트 제공
합창단 소년, 록 밴드의 보컬이 되다
조항조의 음악적 뿌리는 초등학교 합창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래들과 목소리를 맞춰 노래하는 것이 좋았던 소년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폴 앵카, 엘비스 프레슬리, 레이 찰스, 냇 킹 콜의 노래에 빠져 살았다. 가요나 트로트를 체계적으로 배우거나 즐겨 들은 적은 없었다. 그가 먼저 빠져든 음악은 팝과 록이었다.
학창 시절을 지나 자연스럽게 밴드에 몸을 담근 그는 1970년대 말 본격적으로 록 음악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1979년 음반을 낸 밴드의 이름은 ‘서기 1999년’. 당시에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근거로 1999년 7월 지구가 종말을 맞는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그 불길한 숫자에 청춘의 결기를 담았다.
“종말이 오더라도 우리 팀은 깨지지 않고 끝까지 간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었어요.”
그 시절 음악계에는 팝을 불러야 제대로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 대우받는 분위기가 있었다. 가요나 트로트를 부르면 동료 음악인들조차 낮게 보는 때였다. 조항조에게도 솔로 가수의 성공보다 건반을 치고 동료들과 함께 음악을 만드는 일이 더 중요했다.
밴드는 음반 세 장가량을 낸 뒤 흔들리기 시작했다. 소속기획사는 팀을 정리하면서 조항조만 따로 계약해 솔로 가수로 키우려 했다. 누군가에게는 좀처럼 오지 않을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솔로로 남는 대신 결국 회사를 나왔다. 다시 마음 맞는 사람을 모아 밴드를 꾸렸다.
“가수가 되겠다는 꿈으로 시작한 게 아니었어요. 저는 밴드 음악을 하고 싶었습니다. 함께 음악 하는 것 자체가 그렇게 좋았어요.”
돌이켜보면 성공으로 가는 지름길을 스스로 내려놓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선택은 오늘의 조항조를 만든 출발점이기도 했다.
어린시절 합창부를 할 정도로 노래를 좋아했던 조항조는 1970년대 말 본격적으로 록 음악의 세계에 뛰어들면서 1979년 ‘서기 1999년’(사진)이라는 밴드를 결성, 리드싱어로 활동 했다./사진=우리엔터테인먼트 제공
20년 무명의 밤 맨몸으로 배운 노래
밴드를 지키기 위해 솔로 데뷔 기회를 내려놓은 뒤 길고 어두운 무명 생활이 이어졌다. 청춘의 가장 빛나는 시절을 나이트클럽과 언더그라운드 무대에서 보냈다.
당시 나이트클럽은 밴드들의 치열한 생존 무대였다. 한 업소에 두 팀이 함께 출연해 경쟁하기도 했다. 관객의 반응은 즉각적이었고 노래와 연주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금세 외면받았다. 음정 보정도, 다시 부를 기회도 없었다. 매일 밤 자신의 목소리와 연주만으로 관객을 붙들어야 했다.
인터넷도 유튜브도 없던 시절이다. 발성과 감정 표현을 알려주는 영상도, 부족한 음정을 매끈하게 다듬어 주는 기술도 없었다. 선배들의 노래를 귀로 듣고 따라 부르며 무대에서 직접 깨쳐야 했다. 조항조는 “맨땅에 헤딩하듯 혼자 터득하고 버텨야 했다”고 돌아봤다.
그에게 밤무대는 생계를 위한 일터인 동시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음악 학교였다. 지금의 후배들에게 조언할 수 있는 것도 그 시절 몸으로 배운 경험이 쌓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는 정보가 아무것도 없었어요. 혼자서 터득하고 이겨 나가야 했죠. 지금은 발성이나 감정 표현을 배울 수 있는 정보가 많지만 우리는 오로지 무대에서 배웠습니다.”
“노래하는 오늘이 좋아서 살았을 뿐”
그 긴 시간을 어떻게 견뎠느냐고 묻자 답은 의외로 담담했다.
“견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음악이 좋고 노래가 좋았으니까요. 명예를 얻거나 스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도 미래가 보이지 않아 힘들지만 오늘을 살아가잖아요. 저도 그저 노래하는 오늘이 좋아서 살았을 뿐입니다.”
그에게는 고통을 이겨냈다는 영웅담도, 훗날의 성공을 확신했다는 이야기도 없었다.
좋아하는 음악을 하루 더 하고 싶어 오늘의 무대를 지켰고, 그렇게 이어진 하루가 어느새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됐다. 그 무수한 밤이 훗날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조항조의 목소리를 만들었다.
오랜 무명의 어둠을 지나온 그는 어려움에 놓인 사람의 시간을 가볍게 판단하지 않는다. 무대 밖에서도 말보다 행동으로 마음을 전한다.
후배 김호중이 수감된 뒤 두 차례 직접 면회를 다녀온 일도 그랬다. 누구에게 알리기 위한 행보가 아니라, 힘든 시간을 보내는 후배의 곁을 조용히 지킨 것이었다.
‘무명전설’의 마스터로 후배들의 무대를 바라볼 때에도 그의 조언이 기술보다 버티는 힘과 진정성에 닿는 이유다.
가족위해 떠난 미국서도 다시 밴드
음악하는게 좋았지만 음악만 바라보며 살기에는 현실의 무게가 컸다. 스물아홉에 가정을 꾸린 뒤에는 아내와 아이의 삶도 책임져야 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아내와 처가 식구들은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조항조는 좋아하는 음악만 좇느라 가족을 충분히 돌보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음악을 접고 미국으로 향했다.
평범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음악을 떠난 생활은 또 다른 방황이었다. 약 3년을 견딘 끝에 그는 다시 악기를 들었다. 한인들을 위한 클럽에서 미국인 기타리스트, 이탈리아인 키보디스트, 일본인 드러머, 필리핀인 베이스 연주자와 다국적 밴드 ‘U.F.O.’를 결성했다.
“미국에 가서도 결국 밴드를 만들었어요. 멤버들이 모두 다른 나라 사람이어서 U.F.O.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남편을 지켜보던 아내가 먼저 결단을 내렸다.
“당신이 미국에 와서도 이렇게 음악을 할 바에는 다시 한국으로 가라.”
포기하라는 말이 아니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해보라는 믿음의 응원이었다. 조항조는 가족을 미국에 남겨둔 채 홀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당시 어린 아들과 떨어져 살아야 했던 시간은 오래도록 마음의 빚으로 남았다. 그는 훗날 ‘남자라는 이유로’를 부를 때 그 미안함과 가장의 외로움이 자연스럽게 노래에 스며들었다고 했다.
조항조는 좋아하는 음악만 좇느라 가족을 충분히 돌보지 못했다는 미안함에 음악을 잠시 접고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향했지만 결국 미국에서도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한인들을 위한 클럽에서 미국인 기타리스트, 이탈리아인 키보디스트, 일본인 드러머, 필리핀인 베이스 연주자와 다국적 밴드 ‘U.F.O.’(사진)를 결성했다./ 사진=우리엔터테인먼트 제공
타국에서 비로소 들린 우리 노래
미국 생활은 조항조의 음악관을 바꿔놓았다. 마트에 놓인 한국 라면만 보아도 눈물이 났고, 한국 방송이 끝날 때 흘러나오는 애국가에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한국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고향과 가족의 의미가 타국에서 새롭게 다가왔다.
그때까지 그는 팝과 록이 자신이 해야 할 음악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고단한 이민자의 삶을 겪으면서 우리 가요의 가사가 비로소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온 이의 그리움, 가족을 위해 속으로 눈물을 삼키는 가장의 외로움, 말없이 흘러가 버린 세월의 무상함이 모두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우리 가요의 가사가 제 삶의 이야기와 너무 잘 맞았어요. 교포들을 위해 노래하다 보니 ‘이렇게 좋은 가요를 두고 나는 왜 미국 땅에 와서 팝을 부르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마음을 바꿨죠.”
록과 팝으로 단련한 목소리에 한국인의 삶과 정서를 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훗날 사람들이 ‘트로트 발라드’라고 부르게 된 조항조의 음악은 장르 전향을 계산한 결과가 아니었다. 삶을 통과하면서 자연스럽게 찾아낸 자신의 목소리였다.
주인 잃은 ‘남자라는 이유로’ 만나다
한국으로 돌아온 조항조 앞에 한 곡이 나타났다.
훗날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한 ‘남자라는 이유로’였다.
조항조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곡의 멜로디에는 여러 사연이 얽혀 있었다. 나훈아의 ‘무시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남은 곡이 여러 가수에게 건너갔고, 작사가 김순곤이 새로운 노랫말을 붙여 ‘남자라는 이유로’가 됐다. 노래는 박우철에게 먼저 갔지만 당시 사정으로 활동이 막히면서 빛을 보지 못했다.
밴드 생활로 편곡 감각을 익힌 조항조는 지인의 부탁으로 박우철의 녹음본을 들었다. 가사와 멜로디의 힘은 단번에 알아봤지만 전형적인 트로트 편곡은 잘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는 다른 편곡자를 소개하고, 꺾는 기교보다 발라드의 호흡을 살리는 방향을 제안했다.
“가사와 멜로디가 정말 좋았어요. 그런데 당시 편곡은 제 스타일과 맞지 않았습니다. 제가 팝을 해왔기 때문에 발라드처럼 풀어 달라고 했어요. 정통트로트 멜로디였는데 발라드 감성을 살려 믹스해서 트로트와 발라드를 크로스오버한 느낌으로 편곡한 것이죠”
노래가 묻히는 것이 안타까웠던 그는 “나는 트로트 가수는 아니지만 밤무대에서 불러 홍보해 주겠다”며 곡을 받아들었다. 자신의 음반에 싣거나 대표곡으로 만들 욕심은 없었다. 그저 좋은 노래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나이트클럽에서 부를 때마다 손님과 웨이터들이 제목을 물었다.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곡이었지만 관객들은 먼저 그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했다.
수년이 지나도 원래 가수의 활동이 어려워 정식으로 알려지지 않자 주변 사람들이 조항조에게 직접 녹음해 보라고 권했다. 이미 수없이 불러 노래의 숨결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 자신이 아끼는 곡이었다.
“이 노래는 정말 아깝다, 임자가 따로 있나 보다 싶었어요. 트로트는 내 장르가 아니지만 내 식으로 한번 불러보자고 했습니다. 그렇게 불러 놓고도 이 노래가 뜰 줄은 몰랐죠.”
돌고돌아 결국 조항조에게 온 '남자라는 이유로'는 IMF외환위기시절 직장을 잃고 차가운 거리로 내몰린 가장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노래로 불려지면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사진='남자라는 이유로' 수록 앨범
데모 CD 한 장 시대의 마음 울리다
조항조는 1997년 7월 결국 자신의 목소리로 ‘남자라는 이유로’를 녹음했다.
정통 트로트의 짙은 꺾기와 기교 대신 오랜 밴드 생활에서 익힌 팝 발라드의 호흡으로 노래를 풀었다. 감정을 밖으로 쏟아내기보다 가슴 안으로 눌러 담았다. 20년 가까운 무명의 밤, 타국에서의 외로움, 가족을 남겨두고 홀로 돌아온 가장의 미안함이 담담한 목소리 사이로 배어 나왔다.
그리고 그해 말, 대한민국에 외환위기가 닥쳤다. 기사 첫머리에 등장한 가장들의 겨울과 조항조의 노래가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때 방송국 PD에게 전화가 왔다.
“이 노래를 지금 밀어야 한다는 거예요. 준비가 안 됐다고 했더니 데모라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데모 CD를 들고 방송을 시작한 가수는 아마 제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노랫말은 시대의 상처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조항조는 슬픔을 과장하거나 강요하듯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자신이 오래 삼켜온 외로움을 담담하게 꺼내놓았을 뿐이다. 그래서 더 아프고 깊었다.
‘남자라는 이유로’는 한 가수의 히트곡을 넘어 외환위기를 견디던 가장들의 노래가 됐다. 퇴근길 자동차 안에서, 밤거리 포장마차에서, 라디오 앞에서 많은 사람이 남몰래 눈물을 훔쳤다. 노래는 “당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조용한 위로가 됐다.
20년 가까이 이름 없이 밤무대를 지켜온 가수의 목소리가 가장 어두운 시대를 건너던 사람들의 마음과 마침내 만난 것이다.
갑자기 찾아온 성공 앞에서도 조항조는 들뜨지 않았다. 처음부터 스타가 되기 위해 노래한 사람이 아니었다.
음악이 좋아 하루하루 무대를 지켰고, 좋은 노래가 묻히는 것이 안타까워 대신 불렀을 뿐이었다.
“제가 가수가 되기 위해 이 노래를 붙잡은 것이 아니었어요. 노래가 좋아서 부른 겁니다.”
록 밴드의 거친 소리에서 출발해 20년 무명의 터널을 건너온 조항조. 성공의 지름길보다 동료와 음악을 선택했고, 타국의 외로움 속에서 비로소 우리 노래의 힘을 깨달았다.
그 모든 시간이 ‘남자라는 이유로’ 한 곡에 스며들어 대한민국 중년의 가슴을 울렸다.
‘남자라는 이유로’는 결승점이 아니었다. ‘사나이 눈물’, ‘만약에’, ‘거짓말’, ‘사랑찾아 인생찾아’, 그리고 ‘고맙소’로 이어질 더 깊고 긴 여정의 출발점이었다.
< 인터뷰 ②부 에서 계속 >
⇨ 인터뷰 ②부에서는 조항조가 가사를 ‘배우의 대본’처럼 읽는 이유, 기교보다 진정성을 중시하는 보컬 철학, AI 음악 시대에도 사람의 노래에만 남는 ‘호흡과 체온’, ‘고맙소’에 담긴 아내와 가족 이야기, 후배들에게 전하는 조언과 K트로트 세계화에 대한 생각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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