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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샐러드] ‘워커힐’에 새겨진 서울의 현대사, 강변북로와 삼일고가도로 그리고 한 장군의 교통사고

배성식 기자 ssbae100@naver.com

등록 2026-09-18 14:27

미군의 휴가가 서울의 언덕을 바꾸다

‘워커’라는 이름으로 남은 한강의 언덕

도로가 확충되고 서울은 달라지기 시작

총탄이 아닌 자동차 사고로 끝난 장군의 길

 서울 도봉구의 '월튼 해리스 워커길' / 사진=배성식 제공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 자락에는 지금도 ‘워커힐’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호텔 이름으로 익숙하지만, 워커힐(Walker Hill)은 말 그대로 ‘워커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그 주인공은 6·25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월턴 H.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워커 장군과 워커힐의 관계다. 

장군은 서울의 이 언덕에서 전사한 것이 아니다. 워커힐 호텔이 들어선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3년 뒤(1963년)였고, 그가 목숨을 잃은 곳은 지금의 워커힐이 있는 광진구가 아니라 서울 북쪽의 도봉구 도봉동 일대였다. 

더욱 뜻밖인 사실은 그가 전쟁터에서 적군의 총탄을 맞고 숨진 것이 아니라, 교통사고였다.


 '워커' 장군(좌)과 그의 외아들 '샘 워커'미군을 일본으로 보내지 말자

 

1960년대 초 한국은 아직 6·25전쟁의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시기였다. 산업 기반도 취약했고 외화를 벌어 들일 방법도 많지 않았다. 당시 정부가 관광과 호텔 산업에 관심을 가진 이유 가운데 하나도 바로 외화였다.

 

특히 주한미군의 휴가와 여가 수요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국내에는 미군 장병들이 휴가를 즐길 만한 대규모 위락시설이 마땅하지 않았다. 휴가를 맞은 미군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돈을 쓰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만큼, 이를 국내로 돌리자는 발상이 나왔다.

 

 워커힐은 휴가를 맞은 미군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돈을 쓰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만큼, 이를 국내로 돌리자는 발상에서 시작되었다. / 사진=KTV 화면 캡쳐

워커힐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출발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등이 사업을 추진했고, 박정희 정부의 국가 주도 개발 정책과 맞물려 서울 동쪽 아차산 자락에 대규모 호텔과 위락시설을 조성했다. 

1963년 문을 연 워커힐은 호텔뿐 아니라 공연장과 각종 위락시설을 갖춘 대형 휴양단지였다.


개관 당시에는 세계적인 재즈 음악가 루이 암스트롱까지 초청됐다. 

당시 워커힐은 단순한 숙박 시설이라기 보다 외국인 관광객과 주한미군을 겨냥한 서울의 대표적인 국제적 위락공간이었다.


 루이 암스트롱. 1963년 4월 6일. 워커힐 호텔 공연 때 사진 / 사진=KTV 화면 캡쳐

‘워커의 언덕’이라는 이름

 

호텔 이름은 6·25전쟁의 영웅 월턴 워커 장군에서 가져왔다. 

워커 장군은 1950년 7월 한국에 도착해 미8군을 지휘했다. 전쟁 초기 미군과 국군이 계속 밀려나던 상황에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흔히 ‘워커 라인’이라고 불리는 낙동강 방어선에도 그의 이름이 남아 있다. 그를 기리는 뜻에서 호텔 이름에 Walker와 Hill을 결합해 ‘워커힐’, 즉 ‘워커의 언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63년 개관 당시의 워커힐 호텔 / 사진=워커힐 호텔 당시 호텔의 여러 시설에는 더글라스 맥아더, 리지웨이, 밴 플리트 등 6·25전쟁과 관련된 유엔군 지휘관들의 이름도 사용됐다. 워커힐이라는 이름에는 전쟁의 기억과 함께 당시 호텔의 주요 고객이었던 미군을 향한 상징성도 담겨 있었던 셈이다.


 

워커힐을 만든 서울의 길

 

워커힐이 들어서던 시기의 서울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자동차와 인구가 빠르게 늘었고, 도로 확충은 도시개발의 중요한 과제가 됐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인물이 김현옥 서울시장이다. 군 출신인 김현옥 시장은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명답게 서울 곳곳에서 도로와 고가도로 건설을 밀어붙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금은 사라진 삼일고가도로다. 

1967년 착공해 1969년 개통한 삼일고가도로는 자동차가 도심의 교차로를 피해 빠르게 이동할 수 있도록 건설됐다. 당시 서울의 근대화와 미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교통시설로, 개통 당시 인근 삼일빌딩의 이름을 따 명명됐다. 이후 2003년 6월 30일 폐쇄된 뒤 철거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69년에 개통하고 2003년에 폐쇄된 서울의 근대화와 미래를 상징하는 삼일고가도로 / 사진=서울시정개발연구원

한강 변도 달라졌다. 1960년대 후반 서울시는 홍수 방지와 도시개발을 함께 추진하면서 한강 주변의 제방 도로와 교통망을 확충하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강변북로로 이어지는 한강 변 도로 역시 이러한 한강 개발과 도시 확장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졌다.

 

워커힐과 삼일고가도로, 강변북로를 하나의 사업으로 묶을 수는 없지만, 이들은 모두 전쟁의 폐허에서 자동차와 호텔, 새로운 도로가 들어서는 도시로 변해가던 1960년대 서울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리고 1950년 12월 23일 장군의 마지막 길

 

이제 이야기의 시계를 다시 1950년으로 돌려보자.

워커 장군은 전쟁 초기부터 미8군을 지휘하며 한국전쟁의 한복판에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역전되고 서울을 수복한 뒤에는 북쪽으로 진격했지만, 1950년 겨울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황은 다시 급변했다.

12월 23일, 워커 장군은 아들 샘 워커 대위와 관련된 일을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샘 워커 대위 역시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아들의 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가던 중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의정부 남쪽, 당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일대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워커 장군이 타고 있던 차량이 한국군 차량과 충돌했고, 지프차가 전복되면서 장군은 목숨을 잃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적군과 싸우던 장군이 마지막 순간에는 총탄이 아니라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당시 사고 지점은 현재의 서울 도봉구 도봉동 일대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도봉산을 배경으로 아파트와 도로, 철도가 이어지는 익숙한 서울의 주거지역이지만, 1950년 겨울에는 전쟁의 긴장이 감돌던 서울 북쪽의 길목이었다.


 서울 도봉동 일대에 있는 월튼 해리스 워커 장군의 전사지 / 사진=배성식 제공

이처럼 서울의 길을 달리다 보면 우리는 수많은 지명을 무심코 지나친다. 강변북로를 달리고, 광장동 워커힐을 지나고, 도봉역(1호선) 부근을 지날 때도 그렇다. 하지만 그 이름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나면 서울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배성식 / 여행 작가


평소 여행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 한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모아 2022년에 아빠들을 위한 주말 놀거리, 먹거리 프로젝트 <아빠와 함께하는 두근두근 보물찾기>를 발간하였다.

2024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 최대의 언론사 그룹인 여행요미우리출판사를 통해 한국의 관광명소와 외국인들이 꼭 경험해 볼 만한 곳들을 소개한 ‘한국의 핫 플레이스 51’을 일본어 <韓国のホットプレイス51>로 공동 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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