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시절, 6·25전쟁, 코로나 19등 절망에 빠져있던 국민을 위로
트로트는 언제나 힘들고 어려울 때면 가장 먼저 찾는 치유제였다
일제강점기 망국의 설움을 담아내고, 전쟁의 폐허 속에서 좌절에 빠져있는 민초들에 희망을 노래하며 위로했으며, 산업화 시절 타향살이의 고단함을 실어 나르던 버스 안에서도, 고도성장 시절 환희에 찬 축제 무대에서도 트로트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다.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트로트는 그저 그런 싸구려 유행가가 아니라 한국인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품어낸 역사의 기록이었다.
멋들어지게 꺾고 간드러지게 휘는 특유의 가락에 흐르는 눈물을 묻었고, 흥겨운 장단에 웃음을 함께하며 트로트는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국민의 ‘소울(Soul) 음악’으로 자리매김한 우리들의 삶의 기록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위로하다
일제강점기는 아직도 닦이지 않는 우리 역사의 눈물이며 잊을 수 없는 수치였다. 흔적만 남아있는 화려했던 고려의 궁궐터를 보면서 나라 잃은 슬픔을 표현한 ‘황성옛터(1928년)’는 일제강점기 민족의 비애를 은유적으로 표현, 일본의 탄압을 받았지만, 트로트가 단순한 사랑 노래를 넘어서 민족의 아픔을 담은 첫 사례로 꼽기도 한다.
이애리수 ‘황성옛터’(1928년)
1935년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시절에 목포 출신의 19세 소녀 가수 이난영(李蘭影)이 부른 ‘목포의 눈물’이 울려 퍼졌다. 가사에 들어있는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라는 구절은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빗대 식민시대의 아픔을 행간에 담은 덕분에 작사 작곡가가 일본 경찰에 잡혀가 혹독한 문초를 당했다.
쌀, 목화 등이 목포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탈당하고, 강제징용 등으로 눈물의 이별을 해야 했던 시절 이난영의 애절한 목소리를 통해 전해진 ‘목포의 눈물’은 자신들의 이야기였다.
축음기 보급률도 낮았던 당시 ‘목포의 눈물’은 식민지 백성들의 마음을 대변하면서 5만 장이라는 경이적 음반판매를 기록, 민족의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불멸의 명곡으로 자리 잡았다.
고복수 ‘타향살이’ 유성기 음반 사진 출처 <파이낸셜뉴스>
이밖에도 고복수의 ‘타향살이(1934)’는 일제 수탈을 피해, 만주로 일본으로 유랑해야 했던 사람들의 타지에서 겪는 고된 삶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대한 심정을 절절히 담아냈고,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1838)’은 식민지 청춘남녀의 비극적 사랑과 눈물을 노래,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광복 직후 해방의 기쁨도 잠시, 극심한 이념 대립과 외세 개입이 뒤얽힌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가요계도 전쟁의 참상을 비껴갈 수 없었다. 작사 작곡가, 가수들도 피란민이 되어 겪은 이별, 그리움, 상실감 등 자신들의 경험을 노래에 담아내며 혼돈의 시기를 함께 했다.
일제강점기부터 인기를 누렸던 남인수의 ‘가거라 삼팔선’(1948)은 6·25전쟁 이전에 발표되었지만, 남북 분단의 비극을 노래하며 이미 시대의 아픔을 예견했고, 1954년 발표된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 이별 슬픈 부산정거장~”이라는 노랫말처럼 피란살이를 마치고 정든 사람들과 헤어져 서울행 완행열차에 오르는 기쁘지만 복잡한 심경을 절절하게 담았다.
남인수 ‘이별의 부산정거장’ 앨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쁨보다는 피란지의 정든 사람, 판잣집 등 추억을 뒤로하고 떠나는 아쉬움과 슬픔이 짙게 배어 있어 전 국민적 공감을 얻었다.
독특한 바이브레이션 창법을 구사했던 현인도 전쟁이 낳은 또 다른 스타였다.
1.4 후퇴 당시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여동생을 애타게 찾는 오빠의 심정을 그린 ‘굳세어라 금순아’(1953)는 고향을 떠나는 장면부터 피란지인 부산의 국제시장에서 이산가족을 만나는 실향민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실감 나게 담으면서도 “굳세어 다오~”라는 희망의 메시지까지 잊지 않았다.
또 6.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전쟁터에 나간 병사가 고향의 어머니를 그리는 애틋한 마음을 그린 ‘전선야곡’(1952)도 많은 장병과 부모들의 눈물샘을 자극했다.
고도성장에 가려진 그늘을 어루만지다
지긋지긋했던 6·25전쟁이 끝나고 본격적인 산업화 도시화 시기가 도래한 1960~1970년대는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냈지만, 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개인의 슬픔과 그리움을 파고들며 트로트는 저변을 넓히고 국민적인 애창곡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박재홍의 ‘울고 넘는 박달재’가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으며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것은 바로 산업화가 본격화된 1960년대였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로 향해야 했던 이들의 주제곡이자 애창곡이었다.
6·25전쟁 이후 미군부대 공연 모습
1970년대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 중동 건설 현장의 근로자, 그리고 일본을 오가던 재일교포와 보따리상까지 해외 진출이 활발했던 시기였다. 조용필의 불후 명곡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바로 이 같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다.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재일동포들의 애환을 담은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고국을 그리워하는 재일동포들과 돈을 벌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는 많은 이들의 심정을 담아냈다.
조용필 ‘돌아와요 부산항에’ 앨범
군부독재의 억압과 아픔을 대변하다
서슬 퍼런 군부독재와 민주화운동, 그리고 경제성장으로 격동의 시기를 맞이한 1980~1990년대는 대중음악 판도도 크게 변화했다. 억눌린 정서와 해방감을 담아내면서 트로트는 시대적 환경에 적응해 생명력을 이어나갔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기점으로 서슬 퍼런 군사정부 시절엔 대중가요에 대한 검열도 극심해, 사회 비판적인 노래는 설 자리를 잃었다. 트로트는 정치적 구호 대신 개인의 슬픔과 한(恨)을 노래하며 대중의 억눌린 감정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며 공감했다.
1970~80년대 대형 공연 포스터
대학가요제를 통해 혜성처럼 등장한 심수봉 ‘그때 그 사람’(1978)은 10·26사태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방송 출연 금지 등의 혹독한 시련을 겪었지만, 그 애절하고 슬픈 목소리는 당시의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시대의 억압과 아픔을 대변, 대중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약사 출신 가수로 주목받은 주현미는 고도성장의 상징인 강남의 영동교를 배경으로 한 ‘비 내리는 영동교’를 통해 화려한 도시 불빛 아래, 비를 맞으며 다리를 홀로 걷는 모습을 가사에 담고, 산업화 속 소외와 고독감에 빠진 ‘도시인의 비애’를 서정적인 멜로디로 표현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가 가요 차트를 휩쓸던 시기 3년 전 발표했던 김수희의 ‘애모’가 역주행을 하면서 방송사 가요프로그램에서 1위를 차지하는 예상외 이변이 발생했다.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로 시작되는 노래는 중장년층에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신세대들이 판을 치는 시절에 신세대 댄스 음악에 피로감을 느낀 중장년층의 폭발적인 지지를 끌어낸 것이다.
김수희 7집 ‘애모’ 수록 앨범
이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던 기성세대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낸 것으로 트로트의 힘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 문화적 사건이었다.
민주화운동으로 억압의 시대가 끝나면서 트로트도 해방감 속에 다채로운 방식으로 변화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처럼 선문답 같은 철학적인 가사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김국환의 ‘타타타’, 농산물개방이라는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으로 위기에 처한 농촌을 위로하는 배일호의 ‘신토불이’, 기존 트로트 특유의 애절하고 ‘한’의 정서에서 벗어난 유머 있고 경쾌한 김흥국의 ‘호랑나비’, 설운도의 ‘쌈바의 여인’ 등의 신개념 트로트로 시대에 맞게 변신하면서 국민의 곁을 지켰다.
IMF 시절 위기의 가장들을 위로하다
1997년 말 영원할 것 같았던 호황 시절 속에 갑자기 닥친 IMF 외환위기(1997)로 멀쩡하던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대량 해고가 불어닥치면서 수많은 가장이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절망과 무력감이 사회 전체를 뒤덮던 암흑 같던 시절 서민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잘 될 거야”하는 희망을 노래한 것은 바로 트로트였다.
당대의 현실을 가사에 담아낸 노래들이 연이어 발표되며 실직자와 그 가족들의 애끓은 마음을 대변했다.
“쿵작쿵작 쿵짜작 쿵짝~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1998년에 발표된 송대관의 ‘네박자’는 흥겨운 리듬과는 달리 가사 속에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잃고 망연자실하던 사람들에게 “인생이란 그런 것이니... 그래도 꿋꿋하게 버텨보자”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다.
송대관, 태진아가 함께 부르는 ‘네박자’ 사진 출처<KBS>
송대관의 단짝이었던 태진아의 ‘외로워 마세요’는 부도난 직장인, 실직한 가장, 문 닫은 자영업자 등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주면서 콘서트 등을 통해 적극적인 활동으로 위로했다.
위로를 넘어서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로 다시 일어서는 용기와 힘을 주는 노래도 등장했다.
IMF 직후 인기를 얻은 박상철의 ‘자옥아’는 고난 속에서 다시 일어서려고 발버둥 치는 서민들의 정서가 담겨있다. 사랑하는 ‘자옥이’를 떠올리며 “어려운 시절을 버티게 해주는 것은 바로 가족”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주며 다시 일어설 용기를 주었다.
가장 어두운 시절, 가장 낮은 곳에서 국민과 함께 울고 웃으며 위기를 극복하는 데 트로트가 다시 한번 큰 힘이 되어주었다.
기쁨과 축제를 함께 즐기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이 세계 무대의 중심으로 우뚝 선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올림픽이라는 거대한 국제 행사 속에서 트로트 역시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며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당시 일본에서 ‘엔카의 여왕’으로 큰 인기를 끌던 김연자의 ‘아침의 나라에서(In the Land of the Morning)’는 서울올림픽을 상징하는 또 다른 노래다.
표절 시비에 휘말리며 아쉽게 공식 지정이 철회되는 비운을 겪었지만 뛰어난 완성도와 한국적인 정서를 힘있게 담아낸 덕분에 10만 관객이 운집한 서울올림픽 폐막식의 식전 행사에서 김연자가 직접 열창하며 전 세계에 울려 퍼졌다.
김연자 ‘아침의 나라에서’ 1988년 서울올림픽 사진 출처<KBS>
2000년대에 들어서며 트로트는 ‘한(恨)’과 ‘눈물’의 정서를 넘어,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경쾌하고 신나는 ‘축제의 음악’으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지역 축제, 전국 단위의 행사, 명절 연휴 TV 프로그램에서 트로트는 빠질 수 없는 대한민국 대표 ‘국민오락’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상실의 시대가 끝나고 트로트가 본격적인 국민의 오락으로 떠오르면서 위로를 넘어 즐거움을 함께하는 친구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전국을 돌며 인기를 끌었던 KBS ‘전국노래자랑’ 지자체마다 진행하는 ‘벚꽃축제’, ‘복숭아 축제’ 등 방방곡곡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축제에서 트로트는 빼놓을 수 없는 ‘주메뉴’이자 배경음악이 되었다.
전국노래자랑 사진 출처<KBS>
장윤정의 ‘어머나’는 귀에 쏙쏙 박히는 가사와 상큼한 멜로디, 발랄한 율동이 더해져 그야말로 ‘국민 애창곡’ 신드롬을 일으켰으며, 박현빈의 ‘곤드레만드레’, ‘샤방샤방’, 홍진영의 ‘사랑의 배터리’ 등 젊은 감각의 ‘세미 트로트’가 연이어 히트하며 장르의 저변을 폭발적으로 넓히게 된 시기이다.
‘코로나 19’ 실의에 빠진 국민을 위로하다
2019년 말 코로나 19라는 거대한 태풍이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외출 금지라는 초유의 사태로 세상으로부터 강제격리 되었던 시절 트로트는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다시금 손을 내밀었다.
2019년 초 시작한 ‘미스트롯’은 ‘미스터트롯’과 함께 트로트는 방송가의 판도를 뒤흔드는 거대한 신드롬의 중심에 섰다.
TV조선의 ‘미스 트롯’과 ‘미스터 트롯’ 시리즈는 그야말로 ‘트로트 광풍’을 일으키며 당시 코로나 19로 생사를 넘나드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던 국민의 탈출구가 되었다.
사진 출처 <MBN>
송가인, 임영웅, 영탁, 이찬원 등 새로운 ‘트롯 스타’들을 대거 탄생시켰고 이들의 노래는 다시 전국 축제와 행사의 새로운 애창곡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손자, 손녀가 함께 임영웅을 응원하고, 온 가족이 모여 트로트 경연을 시청하는 모습은 2000년대 이후 트로트가 ‘전 세대 통합의 아이콘’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한 세기가 넘은 지금, 트로트는 세대 간의 깊은 단절을 이어주는 가장 따뜻한 문화적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할머니가 부르던 ‘목포의 눈물’을 손녀가 경연곡으로 부르고, 아이돌 노래만 듣던 아들이 엄마,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임영웅 콘서트를 즐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구세대와 신세대가 트로트라는 공통의 언어로 소통하게 된 것이다.
트로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자, 상처를 보듬는 치유제였으며, 화합의 노래로 트로트는 언제나 한국인의 심장을 뛰게 하는 ‘소울 뮤직’으로 우리 곁에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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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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