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6·25전쟁 1보’ 방송 아나운서 위진록 “60여 년 이방인 삶을 지탱해 준 힘은 노래와 음악이었다.”

박강민 기자

등록 2025-10-30 14:41

전쟁의 격랑 속 조국을 떠나 일본에서…. 미국에서…. 격동의 현대사를 관통

파란만장한 인생에서 힘든 시절 버티게 해주었던 유행가 등 생생히 기억

97세에도 창작 열정…. 60세 여교수와의 200여 통 손편지 교감 책으로 출간

6.25전쟁  1보를  방송한 아나운서 위진록씨 


1950년 6월 25일 새벽 5시 KBS 아나운서 숙직실에 박 대위라는 장교가 찾아와 명령하듯 종이 한 장을 툭 던졌다. 북한군이 쳐들어 왔으니 급히 방송하라는 것이었다. 급히 원고를 다듬어 방송을 시작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서 전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합니다.” 

 

위진록의 6·25 1보 실제 목소리


우리 역사의 비극인 6·25전쟁 사실을 알리는 1보였다. 얼떨결에 이날 역사적인 방송을 맡은 아나운서는 위진록(97), 그의 인생은 현대사를 관철하는 살아있는 역사이다.

1928년 황해도 재령 일제강점기의 그늘 아래 태어나 17세에 해방을, 뒤이어 공산주의의 격랑을 체험했다. 이후 60여 년을 일본과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살며 20세기 격동기를 멀리서 가까이에서 조국을 바라보며 살아온 사람, 위진록 씨의 97년 세월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묵직한 현대사다.

 

‘파란만장’이라는 단어로도 담을 수 없을 이 기나긴 여정, 그의 곁에는 언제나 ‘노래’와 ‘음악’이 함께 있었다. 때로는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고 때로는 개인의 회한을 어루만지며 때로는 낯선 땅에서의 외로움을 달래준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의 삶을 구성하는 기억의 조각들은 놀랍게도 대부분 선명한 ‘선율’의 형태를 띠고 있다. 

위진록이라는 ‘사람도서관’의 97년 인생을 ‘노래’와 ‘음악’이라는 색인을 통해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소년의 귀에 박힌 시대의 노래들

 

그의 유년기 기억은 누님의 아픈 사연이 묻어있는 개성의 요정 ‘서본정’의 쓸쓸한 풍경과 맞닿아 있다. 화류계로 팔려 간 누님을 따라 그곳에서 학교에 다니던 어린 소년의 귀에 가장 먼저 박힌 것은 일제강점기 화류계 여성들의 애절한 하소연이 담긴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였다.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기생이 된 홍도가 부잣집 아들을 만나 결혼하게 되지만, 결국 남편에게서 버림을 받고 남편의 약혼녀까지 살해한 뒤 순사가 된 오빠에게 잡혀가게 된다는 줄거리인데 1936년 초연하면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 당대를 대표하는 흥행작이 되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이 신파극에 나오는 노래인데 어려운 집안 환경으로 술집에 팔려간 위진록의 누님의 처지와 오버랩되면서 더 기억에 남았는지 모른다.

 

“거리에 핀 꽃이라 푸대접 마오 

마음은 푸른 하늘 흰 구름 같소 

휙 부는 비바람에 고달프다 

사랑에 속았다고 돈에 울었소~”

 

그는 또한 ‘홍도야 우지마라’도 선명히 기억한다.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인기에 힘입어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이때 이서구가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라는 노랫말을 써서 영화의 ‘부 주제곡’으로 발표하면서 대중가요로 큰 인기를 끌었던 곡이다. 이 작품으로 폐결핵 투병 중이던 무명작가 임선규가 일약 스타 작가로 떠올랐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위진록은 8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이 노래들을 잊지 못하고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유행가가 아니라 누님을 비롯한 그 시절 여성들의 암담하고 파란만장했던 인생이 어린 그의 마음속에 씻을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의 놀라운 ‘음악적 기억’은 10여 세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태어나던 해 발표된 ‘낙동강 700리’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그는 가사 전부를 기억하진 못해도 “달빛 아래 칠백 리 낙동강 저 너머로...”로 시작되는 그 애조 띤 음조를 잊지 못한다.

 

위진록은 기억을 다 하지는 못했지만, 그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노래는 제국주의 압제로 고통을 겪고 있던 1933년 발표된 ‘낙동강’(왕평 작사, 김용환 작곡, 김용환 노래)이란 왈츠풍의 노래로 장엄하면서 애달픈 느낌의 곡이다. 

어린 소년 위진록의 귀에도 그 가락은 당시 시대상에 감돌던 슬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김용환의 '낙동강' 신보

 

“달빛 아래 칠백 리 낙동강 저 너머로

은혜로운 봄바람 한가로이 불어들 때

구포의 물레방아들은 언제까지 우시나요

창포밭에 저 비석 제비 똥 가득한데 

밭고랑에 청기왓장 간장을 끊는구나

구포의 물레방아들은 언제까지 우시나요

봄철마다 들리는 아름다운 노래여

만백성을 기르는 영원한 어머니다

그대의 젖꼭지에 세월은 흐릅니다.”

 

 

낯선 길을 떠나는 기차에서 울린 ‘사의 찬미’

 

기억의 다음 페이지는 덜컹거리는 봉천행 완행열차 안이다. 

철공소에 취직한 형님을 따라 선천으로 이사 가던 길, 화류계에 있던 누님이 선물로 남기고 간 유성기를 본 기차 안의 학생들이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태엽을 감아 바늘을 올리자 기차 안을 가득 메운 것은 시대의 허무를 노래하는 소프라노 윤심덕의 목소리였다.


소프라노 윤심덕의 '사의 찬미'

 

“황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메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강의 잔물결’에 가사를 붙인 ‘사의 찬미’. 그들은 달리는 완행열차 안에서 이 노래를 수없이 반복해서 들으며 갔다. 

훗날 현해탄에 몸을 던진 윤심덕의 비극과 당시 일본 사회에 팽배했던 허무주의, 그리고 이 구슬픈 노래를 즐겨 부르던 화류계 누님들의 신세가 겹쳐지며 ‘사의 찬미’는 소년 위진록에게 시대의 우울을 상징하는 곡으로 깊이 각인되었다.

 

 

평양사범학교 입학 클래식에 눈뜨다

 

그의 삶에 음악이 ‘슬픔’으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하며 그의 음악적 세계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생각지도 않았던 평양사범학교 입학시험에 덜컥 합격하자 어머니는 닭 한 마리를 잡아 만둣국을 끓여주며 기뻐했다.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일본 선생의 권유로 ‘브라스밴드’에 가입해 ‘피스톤식 트롬본’을 담당했다. 밴드는 매년 평양공회당에서 정기공연을 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의 음악적 편력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밴드에서 ‘다뉴브강의 잔물결’, 오펜바흐의 ‘천국과 지옥’ 서곡, 주페의 ‘시인과 농부’ 서곡, 베르디의 가극 ‘아이다’ 중 ‘개선행진곡’ 등 클래식 레퍼토리를 연주했다.

밴드에서 유행가의 슬픈 가락 대신, 서양 고전 음악의 웅장한 화성을 연주하며 그의 감수성은 새로운 차원으로 확장되었다.

 

 

역부 시절, 고단함을 달랜 ‘봄새가 우네’

 

그러나 평양사범학교에서의 영광은 짧았다. 기숙사에서 동급생과 담배를 피우다 사감 선생에게 들켜 퇴학 처분을 받은 것이다. 

“항상 나를 얽어매고 있던 굴레 같은 것에서 풀려난 느낌”으로 애써 위안을 삼았던 해방감도 잠시, 그는 힘들게 벌어 학비를 댔던 누님과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을 안고 남신의주로 형을 찾아가 경의선 간이역의 ‘역부’로 취직한다.

 

평양에서 트롬본을 불던 학생은 순식간에 시골 철도역의 노동자가 되었다. 바로 이 고단했던 ‘소년 역부’ 시절 그의 입에서 떠나지 않던 노래가 있었다. 그때 수도 없이 불렀던 그 노래를 97세인 지금도 생생히 추억한다.

 

“갓 풀린 대동강 물도 맑은데 

어디서 오는가 흰 돛대 하나 

노 젓는 젊은이 가슴속에도 

랄라 랄라 랄랄라 랄라 

랄라 랄라 랄랄라 랄라 

봄새가 우네~”

 

클래식의 화려함과는 정반대인 소박하고 다정다감했던 이 노래 ‘봄새가 우네’는 가장 힘들었던 시절을 견디게 해준 그만의 노동요이자 위안가였다.

 

 

방송국으로 이어진 밴드의 인연

 

역부에서 시작해 경성역 청소부, 서무과 직원, 인사동 요정 ‘행화촌’ 종업원 등 밑바닥 삶을 전전하던 그는 기적처럼 19세에 서울중앙방송(KBS)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한다.

그가 방송국에서 두각을 나타낸 분야는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 평양사범 시절 브라스밴드 경험 덕분에 클래식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그에게 방송국은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겼다. 

‘한’의 유행가에서 시작해 클래식 연주자를 거쳐 고된 노동요를 부르다 마침내 대중에게 클래식을 소개하는 아나운서가 되기까지 ‘음악’은 그의 삶의 격을 바꾸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위진록의 젊은 아나운서 시절 


이방인의 땅에서 만난 음악들

 

6.25 전쟁의 1보를 알린 아나운서였던 그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본으로, 다시 오키나와를 거쳐 미국으로 향한다. 낯선 땅에서의 이민 생활은 치열했다. 

오키나와 시절, 베트남 위문 공연을 하러 가는 길옥윤, 패티김 등 연예인들의 경유지 역할을 하며 그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그는 “파티 때 패티김이 남도소리 한바탕을 부르곤 했다.” 

그때 파티에서의 패티김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를 아직도 보관하면서 문득문득 치열하게 살아냈던 당시를 회상한다. 이방인의 땅에서 들은 패티김의 구성진 ‘남도소리’는 그의 뿌리를 확인 시켜주는 또 하나의 위안의 ‘노래’였다.

 

미국 LA에서 햄버거 가게 ‘WEE'S KITCHEN’을 운영하며 ‘차이니즈’ ‘문둥이’라는 멸시를 견뎌내던 시절 그를 버티게 한 것 역시 음악이었다. 

‘클래식 내 마음의 발전소’라는 책을 낼 정도로 클래식에 대한 그의 사랑은 깊어졌다.

글을 쓸 때도 쉴 때도 그의 곁에는 항상 J.S.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브람스의 첼로 소나타, 슈베르트의 현악사중주가 흐른다. 

 

그의 자서전 격인 ‘고향이 어디십니까?’의 편집자의 말처럼, 그의 삶 속에 녹아든 차이콥스키, 프로코피예프, 브람스의 음악은 “해방 후 극심한 좌우 갈등과 6.25 전쟁, 이방인으로서의 생활”이라는 한국 현대사를 맨몸으로 견뎌낸 생존자의 인생 찬가 그 자체다.


위진록의 자서전 '고향이 어디십니까?'


참회 그리고 잊혀지지 않는 그 노래

 

하지만 그의 90 평생을 단 한시도 떠나지 않은 노래는 따로 있다. 바로 평양사범학교에 입학했을 당시 남인수가 부른 ‘어머님 안심하소서’다.

 

“고향 눈 부슬부슬 나리던 아침 

어머님 작별하던 정거장에서 

눈물로 맹세하온 사나이 결심 

한시라도 잊으리까 잊으오리까 

어머님 안심하소서~”

 

비록 일제강점기 국책가요였지만 홀어머니 곁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어린 소년의 마음에 이 노래는 절절하게 와닿았다. 

그리고 97세가 된 지금까지 이 노래를 기억하는 이유가 또 있다. 그것은 “어렵게 들어간 학교를 담배를 피우다 퇴학당했던 15세 위진록에게 그런 불효가 어디 있을까?” 하는 참회가 가슴 깊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의 삶에서 노래는 단순한 여흥이 아니었다. 

누님의 한이었고(‘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시대의 슬픔이었으며(‘낙동강 700리’, ‘사의 찬미’), 배움의 기쁨이었고(‘클래식 행진곡’), 노동의 위로였으며(‘봄새가 우네’), 이방인의 정체성이자(‘남도소리’), 어머니를 향한 평생의 회한(‘어머님 안심하소서’)이기도 했다. 

위진록 씨의 97년 삶이 증명하듯 노래와 음악은 언제나 그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며 시대를 관통하며 존재해 왔다.

 

 

60세 여교수와의 손편지 교감 책으로

 

최근 그의 삶은 새로운 울림을 얻었다. 

대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정순진 교수와 8년간(2018~2025) 주고받은 200여 통의 손편지를 엮은 책 ‘POSTMARK & TIME(세월의 흔적)’을 출간한 것이다.

위진록의 자서전 ‘고향이 어디십니까’를 읽고 감동한 정 교수가 보낸 감사 편지로 시작된 인연은 90세와 60세라는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었다. 


최근 출판된 여교수와의 200여통 손편지  내용을 엮은  '세월의 흔적'


이들은 음악 이야기부터 집안일, 사회 이야기, 종교 등 다양한 주제로 소통했다. 

특히 코로나 펜데믹으로 폐쇄되었던 시간, 두 사람의 손편지는 서로에게 가장 큰 위로였다.

정 교수는 위진록을 “90여 년의 삶을 살며 현대사를 관통한 ‘사람 책’, ‘사람도서관’”이라 불렀고 위진록은 정 교수의 글을 ‘햇빛 같은 글’이라 표현했다. 

 

LA와 대전 ‘노을 채’의 소소한 일상과 계절의 변화가 눈에 보이듯 편지 속에 담겼다.

97세가 되어서도 그는 언제나 조국을 걱정하며 틈만 나면 창작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위진록은 97세가 된 지금도 매일 아침 저녁 LA자택 부근을 4000보씩 산책한다.  사진은 부인과 지인들


-  LA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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