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과 김일성에 충성한 ‘조명암’이 1942년 작사
금지곡 지정을 막기 위해 가명이나 가공의 인물로

다음 노래에는 슬픈 공통점이 있다.
박남포 작사, 이난영이 부른 <목포는 항구다>, 이부풍 작사, 황금심이 부른 <알뜰한 당신>, 김용호 작사, 이인권이 부른 <꿈꾸는 백마강>, 김능인 작사, 김정구가 부른 <바다의 교향시>, 김다인 작사, 송민호가 부른 <고향촌>, 고봉기 작사, 고운봉이 부른 <선창>
모두 월북한 조명암이 작사한 곡들로 박남포, 이부풍, 김용호, 이인권, 김능인, 김다인, 이가실, 금운탄, 김다인 등은 조명암의 예명이다. 그중에서 김다인은 음반사에서 만들어 낸 허구의 인물이었다.
조명암(본명 조영출)
조명암(본명 조영출)은 1913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위었다.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금강산에서 ‘운탄(雲灘)’이라는 법명을 얻어 스님으로 있다가 1930년 시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의 추천을 받아 불교계가 운영하던 서울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만해 한용운과 <님의 침묵> / 사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1932년부터 시 작품을 발표하며 문필 활동을 시작하였고, 1934년에 <동방의 태양을 쏘라>라는 작품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서울노래>라는 곡으로 작사가로 데뷔했다.
이후 조명암, 금운탄, 이가실, 김다인 같은 예명으로 <세상은 요지경>, <꿈꾸는 백마강>, <목포는 항구다> 등 수많은 히트곡을 작사했다. <서울노래>는 일제에 항거하는 내용이 암시되어 있다는 이유로 발매 일주일 만에 판매금지곡이 되었다.
1935년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가 1941년에 와세다대학 문학부(불문학 전공)를 졸업했다. 유학 중에도 꾸준하게 유행가 가사를 발표했고, 수많은 인기곡으로 당시 박영호와 함께 작사가로는 쌍벽을 이뤘다.
박시춘, 손목인, 전수린 등 최고 작곡가들이 그가 쓴 가사에 곡을 붙였고 이난영, 남인수, 황금심, 송민도, 고운봉 등 최고의 가수들이 그가 작사한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조명암은 일제의 전시 총동원령 정책에 발맞추어 군국 가요와 친일 가요를 많이 발표한다.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면서도 웃는 얼굴로 고군분투를 바라는 어머니를 표현한 <지원병의 어머니>, 조선인 지원병이 전쟁터에 나가서 천황의 적자로 목숨을 바친다는 <아들의 혈서> 등이다.
특히 조선의 젊은이들이 솔선해서 일본군 입대를 선동하는 친일 가요 <혈서지원>은 1943년 오케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됐다. 조명암 작사에 작곡은 박시춘, 노래는 남인수・박향림・백년설이 불렀다.
이렇게 조명암이 해방 이전에 쓴 유행가 가사는 확인되는 것만 600곡이 넘는다.
<지원병의 어머니>와 <아들의 혈서>
1942년 당시 29세이던 조명암은 오케이레코드사의 이철 사장으로부터 목포 관련 가사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목포의 눈물>이 최고의 노래로 인기를 끌 때라, 목포 출신 가수 이난영을 통해 또 하나의 야심작을 불러 히트하게 할 계획이었다.
그는 유달산으로 내려와 목포를 한번 돌아본 뒤 저녁 부두에서 술 한잔을 기울이며 수첩에다 노랫말을 적었다.
바로 <목포는 항구다>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다.
유달산 잔디밭에 놀던 시절도 / 동백꽃 쓸어안고 울던 그 밤도 / 생각하면 아쉬운 흘러간 옛이야기 /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 삼학도 파도 너머 쌍고동 소리 / 아 그리운 항구, 목포는 항구다 / 여보 사랑해요라는 말 한마디 못한 채 / 나는 남편과 헤어져야만 했다.
작곡가 이봉룡과 <목포는 항구다>
그리고 조명암의 가사에 이난영의 두 살 터울 오빠 ‘이봉룡’이 작곡했다. 이봉룡은 이미 <낙화유수>, <고향설>, <아주까리 등불> 등을 작곡한 실력자였다.
이난영과 오빠 이봉룡 / 사진 출처 = 이동순
일제강점기 말에 발표된 이 노래는 이난영을 정점에 올려놓은 노래였다. 이 곡은 오랜 세월 동안 사랑받으며 그녀의 대표곡으로 자리 잡았지만,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훗날 이난영 인생의 가장 깊은 상처와도 맞닿게 된다.
한국전쟁으로 그녀의 삶은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남편 김해송은 서울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 인민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피란지에서 이 소식을 들은 이난영은 위험을 무릅쓰고 서울로 올라와 매일 서대문형무소 주변을 서성거리며 남편을 찾았다. 그러던 어느 날, 멀리서 끌려가는 남편의 모습을 보았지만, 김해송은 끝내 이난영을 알아보지 못한 채 북으로 끌려갔다.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이처럼 <목포는 항구다>의 가사에는 '항구'라는 공간이 상징하는 이별과 상실, 떠나보내야 했던 수많은 사연들이 녹아있다.
김해송(남편)과 이난영 / 사진 출처 = 이동순
일제에 부역했던 조명암은 해방 이후 돌연 공산주의자로 돌변한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연극동맹 부위원장으로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해 <독립군>, <논개>, <위대한 사랑> 등의 희곡을 발표했다.
그리고 1948년(36세)에는 친일청산 재판을 피해 함께 활동하던 좌익 문인들과 함께 월북하여 북한 예술계에서 중용되었고,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종군작가로 활약하며 조선인민군을 위한 〈조국 보위의 노래〉를 발표하는 등 진중 가요를 작사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북한에서도 그는 영향력 있는 문인으로 활약하며, 1973년 국기훈장 제1급과 김일성상 계관인 칭호를 수여 받았다. 1993년 사망한 뒤에는 북한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1948년 월북할 때까지 작사한 600여 편 중 조명암이라는 예명으로 발표한 작품만 424곡이었다.
조명암과 그의 부인 김관보
음악인들은 월북 작사가의 금지곡 지정을 막기 위해 가사의 일부를 수정하고, 작사가를 다른 사람이나 가공의 인물로 바꾸는 등 편법이 생겨났다. 당시 사랑받았던 유행가 중 조명암의 손길이 닿지 않은 노래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터라 궁여지책으로 노래를 살린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조명암 작사, 이봉룡 작곡, 이난영이 노래한 <목포는 항구다>도 마찬가지다.
<목포는 항구다> 1942년 앨범
1997년 11월 조명암의 외동딸이 이 씨 등 3명을 상대로 <선창>, <꿈꾸는 백마강>, <고향초>, <알뜰한 당신> 등 4곡에 대한 저작권확인 청구 소송에서 “당시 발매된 음반 등 관련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이들 곡은 작고한 조 씨의 아버지가 작사한 것으로 인정된다.”라고 밝혔다.
1988년 월북 예술인들이 해금된 후에는 작사자가 조명암으로 밝혀졌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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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수
기자
soo14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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