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경연 ‘데스매치’ 벼랑 끝 대결이 나은 과한 언어폭력 현장
10대 참가자에게까지 ‘신체 비하’ 대결을 강요하는 ‘악마의 대본’
방송 통신심의위 ‘청소년 보호 가이드 라인’은 왜 작동하지 않는가?
지난 1월 15일 ‘미스트롯 4’의 1대1 데스매치 현장. 두 명의 ‘트롯 신동’이 무대 중앙에 섰다.
14살 윤윤서와 16살 홍성윤. 두 아이는 마스터 예심에서부터 천재적인 감성과 가창력으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주인공들이었다. 그러나 대결 시작 전, 적막을 깨고 흘러나온 윤윤서의 ‘출사표’는 시청자들의 귀를 의심케 했다.
“성윤 이모, 나는 이번 달에 2cm 더 컸는데 언니는 왜 그대로야?”라며 작은 키의 홍성윤을 겨냥했다. 앳된 얼굴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날 선 공격이었다. 신체 조건을 직접 비하하는 발언에 객석에서는 어색한 웃음이 터져 나왔고, 화면에는 자극적인 자막이 덧씌워졌다. 상대인 홍성윤이 “성장판이 닫혔어, 하지만 실력은 양보 못 해”라며 의연하게 대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을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사진=TV조선 '미스트롯4'
문제는 대결이 끝난 뒤였다. 승리를 거둔 윤윤서가 홍성윤을 붙잡고 미안함에 우는 모습이 포착된 것이다. 무대 위에서의 독기 어린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이를 지켜본 시청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저 말은 아이의 진심이 아니라, 제작진이 쥐여준 ‘독설 대본’일 가능성이 99%다.”
사진=TV조선 '미스트롯4'
같은 날 방송된 신현지와 8년 차 베테랑 김혜진의 대결에서도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신현지 는 김혜진이 10kg을 감량하고 본선에 나왔다는 점을 상기시켜 상대에게 “언니, 오늘 제가 다이어트 끝내게 해드릴게요.”라는 멘트를 날렸다. ‘탈락시켜서 마음 편히 먹게 해주겠다.’라는 뜻이 담긴 이 조롱은, 상대방의 노래 실력이 아닌 ‘체형’과 ‘자기관리’를 공격의 수단으로 삼은 명백한 ‘바디 셰이밍(Body Shaming)’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또 다른 대결에서는 “떨어뜨려 줄 테니 이제 살 빼지 말고 마음 편히 살아라”라는 식의 멘트가 마치 ‘재치 있는 도발’인 양 포장되어 전파를 탔다.
‘바디 셰이밍’, ‘노안 공격’… 변질된 출사표
트로트 경연의 ‘출사표’는 본래 참가자의 각오를 다지는 장치였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힙합의 ‘디스전’을 어설프게 흉내 낸 언어폭력이 ‘예능적 재미’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있다. 본지가 분석한 최근 트롯 경연의 비하 사례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① 신체 조건 및 외모 비하: 윤윤서의 사례처럼 성장을 공격하거나, “떨어뜨려 줄 테니 살 빼지 말고 마음껏 먹어라”라는 식의 체형 공격이 대표적이다. 이는 외모 지상주의를 부추길 뿐만 아니라, 특히 미성년 참가자들에게 외모에 대한 심각한 콤플렉스를 심어줄 수 있는 위험한 발언들이다.
사진=TV조선 '미스트롯4'
② 경력 및 존재감 부정: 9년 차 현역 정혜린과 20세 신예 길여원의 대결에서 나온 발언은 선후배 간의 최소한의 예의마저 무너뜨렸다. “주민번호 뒷자리가 2로 시작하냐, 우리 엄마만 그런 줄 알았다.”라는 길여원의 발언은 오랜 무명 시간을 견뎌온 선배의 삶 전체를 ‘나이’라는 잣대로 비하한 것이다.
사진=TV조선 '미스트롯4'
③ 출신 지역 및 배경 차별: 연변에서 온 10살 전하윤에게 던져진 “오늘 비행기 티켓 끊어라, 연변 갈 준비해라.”라는 발언은 인종 및 지역 차별적 요소까지 포함하고 있다.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가혹한 ‘배제의 언어’였다.
사진=TV조선 '미스트롯4'
이러한 논란은 비단 어제의 일만이 아니다. 트롯 경연이 본격화된 이후, 제작진은 자극적인 화제성을 위해 끊임없이 ‘독설 출사표’를 유도해 왔다.
국민 가수 송가인 역시 과거 인터뷰에서 “무명 시절 ‘매력이 없다.’, ‘못생겼다.’라는 비하 멘트를 수없이 들었고 그것이 큰 상처였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하지만 방송은 이러한 상처를 치유하기보다, 도리어 경연 중 참가자들끼리 “너는 얼굴 때문에 노래가 안 들린다.”라는 식의 독설을 출사표로 내뱉게 함으로써 상처를 ‘전시’하고 화제로 삼았다.
“우리가 보고 싶은 건 싸움이 아니다”
본지는 이번 논란과 관련해 온라인 커뮤니티와 시청자 게시판의 반응을 들여다보았다.
“가족들과 거실에 모여 보는데 애들이 키가 작니 크니 하는 소리를 들으니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이게 트로트의 정신인가요? 노래로 승부해야죠.”(id,트롯매니아), “제작진이 애들한테 무슨 짓을 시키는 건지… 윤서가 이기고 우는 거 보니 본인도 괴로웠던 겁니다. 방송사 인권 감수성이 제로네요.”(id,공정사회), “방통위는 뭐 하나요? 매번 사과문만 내고 뒤로는 더 자극적인 대본을 줍니다. 이제는 법적으로 ‘출사표 가이드 라인’이라도 만들어야 합니다.”(id 방송비평)등 ‘불쾌감’과 ‘피로도’를 호소하는 여론이 대부분이었다.
이밖에도 “가족과 보기 민망하다”, “노래를 들으려고 틀었는데 왜 아이들이 서로 상처 주는 말을 배워야 하나요?”, “대본 티가 너무 나서 보기가 역합니다. 제작진의 욕심이 트로트의 본질을 망치고 있어요.”, “어린 참가자들이 탈락 후에도 저 발언들 때문에 악플에 시달릴까 걱정됩니다.”라는 우려가 많았다.
이러한 반응은 트롯 경연이 이제 ‘노래 실력’이라는 본질보다 ‘막말 배틀’이라는 부가적 요소에 매몰되어 있다는 시청자들의 경고다.
청소년 보호 가이드 라인의 실종
현행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어린이 및 청소년 출연자 보호 가이드 라인’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제13조(정서적 보호): 방송은 어린이와 청소년 출연자에게 심리적 고통을 줄 수 있는 자극적인 연출을 해서는 안 되며, 출연자의 인격권을 존중해야 한다. 제15조(신체 비하 금지): 출연자의 외모나 신체적 특징을 조롱하거나 희화화하는 내용을 방송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트롯 오디션 현장에서 이 가이드 라인은 ‘시청률’이라는 절대적 가치 아래 휴짓조각이 된 지 오래다. 방송사는 “참가자들의 패기를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라고 변명하지만, 실상은 화제성을 위해 아이들의 인권을 담보로 시청률 경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한 방송 심리 전문가는 “성인과 달리 청소년은 무대 위 설정과 실제 자아를 완벽히 분리하기 어렵다.”라며 “카메라 앞에서 타인을 비하하도록 강요받은 경험은 아이에게 심각한 도덕적 혼란과 죄책감을 남긴다.”라고 경고했다.
왜 이런 현상이 반복되는가?
이러한 갈등과 독설의 반복은 출연자 개인의 일탈이라기보다 방송가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우선 힙합 서바이벌의 전유물이었던 ‘디스(Diss)’ 문화를 트로트라는 전혀 다른 장르에 무분별하게 이식했다는 사실이다. 트로트는 전 연령층이 함께 즐기며 삶의 애환을 달래고 위로를 나누는, 이른바 ‘정(情)’의 정서가 흐르는 장르이다.
하지만 상대방을 깎아내려야 승리하는 힙합 특유의 공격적 문법을 억지로 끼워 맞추면서, 트로트 고유의 따뜻한 정서와 충돌하는 이물감이 발생하고 있다. 시청자들에게는 긴장감이 아닌 불쾌한 정서적 피로감만 남게 되는 셈이다.
이러한 무리수는 ‘화제성 지상주의’라는 시청률 중심의 논리에서 비롯된다. 방송 환경이 TV 본방 사수에서 유튜브 숏츠나 포털 사이트 클립 위주로 재편되면서, 제작진은 가수들의 깊이 있는 노래 실력보다는 자극적인 발언 한마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진정성 있는 무대보다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논란을 일으키는 장면이 훨씬 효율적인 마케팅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프로그램의 질적 성취보다는 당장의 조회 수와 클릭 유도를 노린 노이즈 마케팅이 우선시되는 구조인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제작진의 인위적인 갈등 조장이다.
인터뷰 과정에서 출연자들에게 “더 세게 말해달라.”라고 주문하거나, 맥락을 거세한 채 특정 발언만 부각해 적대적인 경쟁 구도를 만드는 이른바 ‘악마의 편집’이 독설을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출연자들은 제작진이 설계한 경쟁의 틀 안에서 소모되고, 트로트가 가진 본연의 생명력은 자극적인 연출 뒤로 가려지고 있다. 결국, 이러한 구조적 악순환이 반복되는 한, 트로트 오디션은 국민적 공감을 얻는 축제가 아닌 갈등의 전시장으로 남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자극’ 말고 ‘리스펙트(Respect)’로 돌아가야!
트로트 오디션이 대한민국 대중문화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안에 담긴 인생의 애환과 서로를 보듬는 따뜻한 정서 때문이었다. 무명가수의 눈물을 닦아주고, 어린 신동의 재능에 박수를 보내던 그 초심 말이다.
이제라도 제작진은 ‘자극’이라는 마약에서 깨어나야 한다. 출사표는 상대를 죽이는 칼날이 아니라, 나 자신을 증명하는 방패가 되어야 한다. “내 목소리로 당신의 마음을 위로하겠다.”라는 긍정적인 출사표가 무대를 채울 때, 트로트는 비로소 ‘국민 음악’으로서의 품격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TV조선 '미스트롯4'
어른들의 욕심에 멍든 아이들의 동심을 치료하는 길은 오직 하나다. 다시 노래로 돌아가는 것. 그것만이 트롯 경연이 넘어야 할 가장 높은 문턱이자 마지막 과제다.
박강민
기자
oasis36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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