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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스타’ 보다 무대가 좋았던 하태웅… ‘사랑아’로 울리고 ‘익산 나이트’로 돌아오다

박강민 기자 oasis365@gmail.com

등록 2026-06-01 10:52

관객 없는 섬에서도 진흙투성이 논 바닥에서도

무대만 있으면 어디든 달려가는 진짜 트로트 꾼

20년 내공의 숨은 실력파… 영탁도 형으로 깎듯

맨발의 기봉이 OST, 뮤직뱅크 출연 등 인기 가도

기획사 부도·천안함 사건 등 악재에 번번이 좌절

고향 소재 레트로풍 신곡으로 본격 재기 날갯짓

□ 신곡 ‘익산 나이트’ 발표한 가수 하태웅

 

실력파 현장형 가수의 대명사 하태웅은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오디션 스타는 아니지만 트로트 업계에서 그의 이름은 ‘탄탄한 내공’과 ‘비교 불가의 가창력’ 동의어로 통한다./사진=본인제공

오늘날 트로트 시장은 바야흐로 ‘경연 공화국’이다. TV만 틀면 쏟아져 나오는 오디션 스타들이 화면을 장악하고, 화려한 조명 아래서 수만 명의 팬덤을 거느리고 세 과시를 한다. 

하지만 방송 카메라가 꺼진 뒤, 현장의 생생한 라이브 무대에서도 그 가창력과 감동이 그대로 유지될까? 기계적인 보정이나 방송 시스템의 ‘튜닝’ 없이는 온전한 무대를 꾸미지 못하는 가짜 실력파들이 판치는 요즘, 묵묵히 현장을 지키며 다져온 진짜 ‘라이브 장인’의 존재는 더욱 귀할 수밖에 없다.

여기, 화려한 방송 스타의 길 대신 전국 팔도 현장 무대를 밟으며 잔뼈가 굵은 가수가 있다. 실력파 현장형 가수의 대명사, 하태웅(본명 김종웅)이다.

 

그는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오디션 스타는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트로트 업계에서 그의 이름은 ‘탄탄한 내공’과 ‘비교 불가의 가창력’ 동의어로 통한다. 

최근 주가를 올리고 있는 장민호, 영탁 등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무명 시절을 보낼 당시, 하태웅은 이미 전국 축제장과 방송을 종횡무진으로 활동하며, 하루 5개 이상의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던 ‘현장의 1인자’였다.

1년에 차 주행거리만 15만 킬로미터(km). 지구 세 바퀴 반을 도는 거리를 달리는 동안 차 바퀴는 닳았어도 그의 목소리는 더욱 단단해졌다. 

 

트롯뉴스(wwww.trotnews.co.kr)가 신곡 ‘익산 나이트’를 발표하고 새로운 도약대에 선 가수 하태웅을 만나, 그가 걸어온 파란만장한 음악 인생과 뜨거운 현장 서사를 들어보았다.

 

 

부안의 5대 부잣집 도련님

 

가수 하태웅의 고향은 전북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다. 

채석강의 아름다운 해안선으로 유명한 그곳에서 그의 집안은 지역 운수업(관광회사, 시내버스 회사 등)을 하는 유지였고 하태웅의 부모님도 지역에서 유명한 대형 점포를 운영하던 유복한 집안의 3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안 일대에서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5대 부잣집’의 아들이었으니, 흔히 말하는 ‘금수저’ 출신인 셈이다.

“동네에서는 부족함 없이 자란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안에 흐르는 가장 큰 자산은 아버지의 재력이 아니라 어머니의 목소리였습니다. 어머니가 동네 노래자랑에 나가기만 하면 항상 상을 쓸어오셨거든요. 삼 형제 중에서 제가 그 어머니의 음악적 피를 가장 많이 물려받았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음악 실기시험을 보면, 선생님이 다른 애들은 1절만 시키는데 저한테는 꼭 2절까지 완창하게 하셨어요. 그때부터 싹수가 좀 보였던 모양입니다. (웃음)”

 

 

‘록’에 빠져버린 요트 유망주 

 

부족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고등학교 시절 뜻밖의 길을 걷는다. 부안고등학교 재학 시절, 새로 창단한 요트부에 지원해 스포츠맨으로서의 재능을 꽃피운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대통령 배 전국요트대회에서 당당히 동메달을 따내며 유망주로 주목받았고, 그 경력을 바탕으로 원광대학교 체육학과에 특기생으로 진학했다.

그러나 운명은 한순간에 바뀌었다. 

 

대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날, 요트 유망주의 가슴을 때린 것은 바다가 아니라 무대 위 밴드의 거친 음향이었다. 대학의 유명 그룹사운드 공연을 본 하태웅은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음악 세계에 완전히 매료됐다.

그 길로 원광대 그룹사운드의 양대 산맥이자 전설로 통하던 ‘야인’을 찾아가 오디션을 보고 보컬로 합격했다.

체육학과 전공 수업은 뒷전이었고, 온종일 록(Rock) 음악과 샤우팅에 빠져 살았다. 그가 이끈 그룹사운드 ‘야인’은 1994년과 1995년 전라북도 록 페스티벌에서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지역 음악계를 뒤흔들었다. 이때 다져진 강력한 성량과 무대 장악력은 훗날 그가 현장형 가수로 성장하는 가장 단단한 밑거름이 되었다.

 

 

인생 전환점 된 ‘해군 홍보단’

 

1996년 말, 하태웅은 해군에 입대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일반 군악대와는 달리 보컬, 개그맨, MC, 마술사, 사물놀이 등 각 분야의 최고 엘리트만 오디션을 거쳐 들어갈 수 있는 ‘해군 홍보단’ 연예 병으로 차출된 것이다. 김건모, 정엽, 박보검, 이은결 등 대스타들이 거쳐 간 바로 그곳이다.

 

“해군 홍보단에 가보니 저는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였습니다. 서울대 음대 출신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천재들이 가득했죠. 제 후임으로 정엽 같은 친구들이 들어왔으니까요.” 하태웅의 당시 군 동기 중엔 귀로 듣고 곧바로 악보를 그려내는 절대음감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지금 KBS 합창단장을 하고 있다고 했다.

하태웅은 그 대단한 녀석들 옆에서 지기 싫어 건반을 배우고 작곡을 독학했다. 직접 만든 군가 ‘통일의 길’을 세계 군악 공모전에 출품했는데, 전국 400여 팀 가운데 3등을 차지했다.

“그때 깨달았어요. 머리로 하는 ‘음학(音學)’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음악(音樂)’이 있다는 걸. 저는 음악적 학식은 그들보다 얕았지만, 감성에서 나오는 게 있었던 겁니다. 배우는 것보다 감성에서 나오는 것들이 중요하다는 걸 그때 처음 느꼈어요.”


하태웅이 해군홍보단 시절 9개국 위문공연 중 kbs합창단장 김선일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 사진=하태웅 제공

해군 홍보단 시절 그는 28개월 동안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낙후된 섬이란 섬은 모조리 돌아다니며 군 위문 공연과 도서 지역 봉사 공연을 펼쳤다. 관객이 단 10명, 20명뿐인 외딴섬의 열악한 무대에서도 진심으로 노래하는 법을 이때 배웠다.

로커 특유의 자존심과 프라이드를 내려놓고, 어르신들을 위해 트로트를 부르며 “음악이 주는 위로와 정서는 결국 하나로 통한다.”라는 깊은 깨달음을 얻은 것도 이 시기였다.

제대 후 음악적 내공을 한층 더 쌓기 위해 익산의 판소리 명창 임화영 선생에게 1년간 판소리를 사사 받기도 했다. 록의 샤우팅, 트로트의 꺾기, 발라드의 애절함을 모두 품은 판소리를 배우며 그는 명실상부한 ‘보컬의 올 라운더’로 거듭났다.

 

 

20대 후반의 실패와 좌절

 

그러나 탄탄한 실력을 갖춘 그에게 대중음악계의 현실은 차갑고 잔인했다. 

인기가수로서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희망에 가득 찼던 그에게 오히려 좌절과 기만으로 점철된 20대 후반의 암흑기가 시작된 것이다.

 

2000년, 데모 테이프를 들고 기획사마다 수차례 문을 두드린 끝에 3M 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맺었다. 장밋빛 미래를 그렸지만, 회사는 1년 만에 부도를 냈다.

좌절할 틈도 없이 다시 일어섰다. 

해군 홍보단 동기이자 레전드 가수 윤항기의 아들 윤준호(현 작곡가)와 의기투합해 랩과 보컬을 결합한 남성 듀오 ‘J&J’를 결성한 것이다. 당시 HOT·젝스키스와 맞붙던 걸그룹 클레오와 베이비복스가 소속된 기획사 일라이 엔터테인먼트에 계약금까지 받고 들어갔다. 

3년이 넘도록 데모곡을 쓰고 데뷔를 준비했다. 그러나 클레오 2집이 무너지면서 회사도 함께 공중분해 됐다. 2004년의 일이었다. 20대 청춘을 통째로 바친 4년이 한순간에 허공으로 날아갔다. 

 

깊은 실의에 빠진 하태웅은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 보다.’라는 절망감 속에 가수의 꿈을 접고 식당과 건설 골재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과 사기였다. 전 재산을 잃고 바닥까지 추락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트로트로 다시 일어서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결국 그가 그토록 도망치려 했던 ‘음악’이었다. 

당시 유명 개그 그룹 ‘컬트 트리플’의 대표가 방황하던 그에게 콧소리와 중저음의 매력이 훌륭하니 트로트 가수로 전향해 보라는 진심 어린 권유를 건넸다.

할 줄 아는 게 음악밖에 없었던 하태웅은 운명처럼 마이크를 다시 잡았다. 

그리고 2006년,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통해 대박을 터뜨렸다. 

 

그가 부른 그가 부른 세미 트로트 곡 ‘가위바위보’가 국민적인 감동을 안겼던 휴먼 영화 ‘맨발의 기봉이’의 정식 OST로 발탁된 것이다. ‘가위바위보’는 경쾌한 폴카 리듬으로, 영화 속 탁재훈의 파티 신 등 주요 장면에 삽입되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요즘엔 많은 트로트 가수들이 드라마 OST를 많이 부르지만, 당시엔 트로트 곡이 영화 정식 OST로 채택되어 성공한 것은 가요계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대사건이었다. 


 하태웅이 부른 세미 트로트 곡 ‘가위바위보’가 국민적인 감동을 안겼던 휴먼 영화 ‘맨발의 기봉이’의 정식 OST로 발탁되었다. ‘가위바위보’는 경쾌한 폴카 리듬으로, 영화 속 탁재훈의 파티 신 등 주요 장면에 삽입되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사진은 영화 '맨발의 기봉이' 포스터 / 사진=쇼박스 제공

OST의 여파는 대단했다. 

당시 대표 인기 오락프로그램인 ‘도전 1000곡’, ‘가족 오락관’ 등에 연이어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또 SBS ‘스타킹’ 등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 배경음악(BG)으로 깔리며 대중의 귀를 사로잡았다.

이후 2009년 KBS ‘전국노래자랑’ 의왕시 편에서 신곡 ‘뚜벅이’를 부르며 솔로 가수 하태웅의 이름을 전국에 각인시킨 그는, 2010년 인생 최대의 명곡을 만나게 된다. 

 

 

인생 곡 ‘사랑아’를 만나다

 

소속사에서 100곡이 넘는 데모곡을 스크리닝한 끝에 엄선한 최준호 작사·작곡의 정통 트로트 곡, 바로 ‘사랑아’였다.

“‘사랑아’를 발표했을 때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습니다. 트로트 가수가 꿈도 꾸기 힘들다던 지상파 아이돌 중심의 프로그램 KBS ‘뮤직뱅크’에 당당히 출연해 데뷔 무대를 가졌을 정도니까요. 

당시 트로트 장르에서 ‘뮤직뱅크’ 무대에 설 수 있는 건 장윤정이나 박현빈 선배 정도가 유일했습니다. 가요무대 30회, 전국노래자랑 20회 이상 초대 가수로 불려 가며 그야말로 전성기를 질주하려던 찰나였습니다.”


하태웅이 ‘사랑아’를 발표했을 때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서 트로트 가수가 꿈도 꾸기 힘들다던 지상파 아이돌 중심의 프로그램 KBS ‘뮤직뱅크’에 당당히 출연해 데뷔 무대를 가졌다. / 사진=KBS '뮤직뱅크'

그러나 하늘은 야속하게도 그에게 쉽게 정상의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주가를 최고조로 올리며 대규모 전국 홍보를 이어가려던 2010년 3월, 대한민국을 뒤흔든 대형 국가적 비극인 ‘천안함 피격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온 나라가 깊은 슬픔에 잠겼고, 약 6개월간 국가적 애도 기간이 선포되면서 모든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 축제, 지역 행사가 전면 중단됐다. 

폭발적인 기세로 치고 나가야 할 골든타임을 고스란히 놓쳐버린 하태웅은 또다시 눈물을 삼키며 무대 뒤편으로 물러서야 했다.

 

 

무명 장민호·영탁을 챙기던 형

 

방송 활동의 맥이 끊겼음에도 ‘사랑아’라는 곡의 생명력은 끈질겼다. 

워낙 곡이 훌륭하다 보니 전국 팔도의 노래 교실, 커버 가수가 앞다투어 불렀고, 전국의 에어로빅 복지관, 장구 축제장에서 단골 댄스 음악으로 쓰였다. 방송에서는 멀어졌지만, 현장에서는 여전히 최고의 히트곡이었던 셈이다.

하태웅은 방송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불러주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달려가는 ‘현장형 가수’의 길을 택했다. 


오디션을 통해 스타가된 장민호, 영탁 등과 무명 시절 전국의 무대를 함께 돌며 무대를 지켰던 이가 바로 하태웅이다. 당시는 이들보다 하태웅이 인지도가 더 높아 무명이었던 동생들을 살뜰히 챙기고 행사에 데리고 다녔을 정도였다. 사진은 일본 후쿠오카 공연당시 모습 / 사진=하태웅 제공오늘날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장민호, 영탁 등과 무명 시절 전국의 무대를 함께 돌며 무대를 지켰던 이가 바로 하태웅이다. 당시는 오히려 하태웅이 인지도가 더 높아 무명이었던 동생들을 살뜰히 챙기고 행사에 데리고 다녔을 정도였다. 

 

코로나 19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제주도 대형 축제 등에서 하태웅과 서지오가 메인 헤드 라이너로 무대에 섰고, 박서진이나 마이진 같은 후배들이 그 아래 순번으로 무대를 채우던 시절이 있었다.

“한번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시골의 논 한복판 무대에 간 적이 있습니다. 무대 세트도 없고 그냥 맨바닥이었는데, 땅이 진흙탕으로 변해서 노래를 부르는데 구두가 푹푹 빠져서 움직여지지 않더라고요. 동네 작은 잔치였는데 주최 측 사정이 너무 어렵다고 해서, 거마비 딱 10만 원에 시골 짜낸 ‘콩기름’ 한 병 받아 들고 무대 위에서 목이 터져라 라이브를 소화했습니다. 주변에서 왜 그렇게까지 미련하게 노래를 하느냐고 묻더군요.”

그는 왜 그토록 무대를 포기하지 못했을까?

 

 

몇 번을 물어도 “돈보다 노래”

 

돈을 바란 것도, 대단한 명예를 좇은 것도 아니었다. 하태웅은 자신의 노래 인생을 ‘시계 건전지’에 비유했다.

“누군가가 저에게 물었습니다. ‘노래 아닌 다른 사업 잘돼서 한 달에 5,000만 원 벌래, 아니면 평생 좋아하는 노래만 하면서 500만 원 벌래?’ 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후자를 택할 겁니다. 제게 노래는 시계 속 건전지 같은 거예요. 노래를 안 하면 제 인생이라는 시곗바늘은 그대로 멈춰버립니다. 무대 위에 서서 관객들과 눈을 맞추고, 내 목소리로 그들을 울고 웃길 때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가족들에게는 제대로 챙기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저는 평생 무대 위에 서 있는 가수가 되고 싶습니다.”

 

그 뜨거운 진심이 통했을까?

전국노래자랑 무대에서 한 관객이 ‘사랑아’에 맞춰 열정적으로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 에피소드는 가요계에서도 유명하다. 알고 보니 그 관객은 얼마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어 의족을 착용한 상태였다. 

절망의 끝에서 하태웅의 ‘사랑아’를 듣고 다시 살아갈 희망과 즐거움을 얻었다는 관객의 눈물 어린 고백을 들었을 때, 하태웅은 자신이 왜 노래를 해야 하는지 그 존재 이유를 다시 한번 뼈에 새겼다.

 

 

새로운 운명 곡 ‘익산 나이트’

 

무명 시절 함께했던 후배들이 경연을 통해 명성을 얻고, 본인은 정작 잊혀 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평생 다이어트를 생활화하며 몸을 관리했다. 

그리고 언제 어떤 무대에도 설 수 있도록 달리는 차 안에서도 끊임없이 목을 풀며 라이브 내공을 갈고 닦아 온 하태웅이 최근 회심의 신곡을 발표했다. 

지역성과 레트로 복고 감성을 절묘하게 버무린 ‘익산 나이트’(한시윤 작사·남기연 작곡)이다.

일부에서는 “왜 하필 익산이냐, 너무 지역이 국한되는 것 아니냐”라는 우려를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하태웅의 생각은 달랐다. 


하태웅은 최근 지역성과 레트로 복고 감성을 절묘하게 버무린 ‘익산 나이트’(한시윤 작사·남기연 작곡)를 발표, 큰 관심을 받으면서 새로운 도약을 위한 야심찬 발걸음을 시작했다./ 사진=더기쁨엔터테인먼트 제공

전 국민의 애창곡 ‘안동역에서’가 지명의 한계를 훌쩍 넘어선 것처럼, ‘익산’이라는 단어가 품은 특유의 다이나믹하고 입에 착 달라붙는 발음 자체가 이 노래 최고의 무기라는 판단이었다. 

실제로 가요계 동료 양지은을 비롯한 많은 실력파 가수들이 이 곡을 듣고 “나도 이런 스타일의 노래를 부르고 싶다.”라며 부러움 섞인 찬사를 보냈다. 

본격적인 홍보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대중의 강렬한 호기심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늘 어머니께 바치는 사모곡

 

그러나 하태웅에게 ‘익산 나이트’는 단순한 유흥가 배경의 댄스곡이 아니다. 

5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 가슴 한구석에 묻어둔 찬란했던 청춘의 향수이자, 굴곡진 인생을 버텨낸 한 남자의 거친 고백이며, 무엇보다 자신에게 가장 뜨거운 음악적 DNA를 물려주고 먼저 떠난 어머니를 향한 사모곡(思母曲)이다.

어머니는 지난해 담도암 5기 판정을 받고 췌장암으로 전이되면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하태웅은 생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KBS ‘인간극장’ 작가와 미팅을 하며, 캠핑카를 개조해 전국을 함께 누비는 버스킹 다큐멘터리를 기획했다. 실제로 캠핑카까지 제작했다. 그러나 병세가 너무 빠르게 악화하면서 그 꿈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어머니가 생전에 흥이 정말 많으시고 신나는 트로트 노래를 참 좋아하셨습니다. 어머니의 1주기에 맞춰 ‘익산 나이트’를 세상에 발표했는데, 녹음실에서 노래를 부르는 내내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조금만 더 살아계셨더라면 아들이 부르는 이 신나는 노래에 맞춰 누구보다 기쁘게 춤을 추셨을 텐데… 하늘에서 이 노래를 들으며 대견해하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후배들에 존경받는 ‘좋은 형’

 

가수 하태웅의 인생을 돌아보면 아쉬운 ‘타이밍의 엇갈림’이 참 많았다. 

해군 홍보단 쟁쟁한 예인들과의 인연, 과거 큰 성공을 거두었던 KBS 프로그램 ‘백투더 뮤직’의 메인 MC 제안을 거리상의 이유로 아쉽게 고사했던 기억, 그리고 코로나 19 직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해 유럽을 달리며 고려인 마을을 찾아가 가요무대 콘셉트로 다큐멘터리를 찍으려던 거대한 글로벌 프로젝트가 전염병의 창궐로 무산된 일까지….

만약 그 기회 중 하나만 제대로 맞아떨어졌다면, 오늘날 하태웅이라는 이름 석 자는 오디션 스타들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동두천의 작은 빵집에서 우연히 만난 옛 무명 시절의 동지 영탁이 수많은 카메라에 둘러싸여 촬영하다가도, 멀리서 “영탁아!” 부르는 하태웅의 목소리에 한걸음에 달려와 품에 안길 만큼, 그는 동료와 후배들에게 ‘진짜 실력자’이자 ‘좋은 형’으로 존경받고 있다. 

최근 대세로 떠오른 마이진 역시 과거 무명 시절 제주도 행사장에서 하태웅 선배의 라이브를 보며 합기도 시범을 하던 학생이었다며, 지금도 대기실 밖에서 그를 보면 90도로 고개를 숙여 진심 어린 예의를 표한다.

 

 

진짜는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가요계의 오랜 격언 중 “사람이 좋아야 노래도 좋아진다.”라는 말이 있다. 

요즘 세상에는 기계로 음을 맞추고 튜닝을 거친 인공적인 가창력과 자극적인 사생활 서사로 무장한 팬덤 비즈니스가 판을 친다. 심지어 머지않은 미래에는 AI가 음정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노래를 부르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러나 기술과 자본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단 하나는, 바로 진짜 인간의 굴곡진 ‘인생 서사’와 현장 무대에서 관객과 나누는 진심 어린 ‘땀방울’이다.

하태웅은 자신의 얼굴이 대단히 유명해지는 스타가 되기보다, 그저 자신의 노래가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대중에게 일말의 여유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팍팍한 일상 속에서 그의 구수한 중저음과 탄탄한 라이브는 차가운 디지털 음원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인간적인 온기를 품고 있다.


무대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가는  하태웅은 자신의 얼굴이 대단히 유명해지는 스타가 되기보다,  자신의 노래가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대중에게 일말의 여유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사진은 2026 부안마실축제 장면 / 사진=유튜브 '신동트롯TV'제공 

‘익산 나이트’라는 강력한 레트로 폭탄을 장착한 현장형 가수 하태웅. 

남들이 가지 않는 현장을 묵묵히 지키며 20년 동안 벼려온 그의 날카로운 검이 마침내 대중의 심장을 관통할 ‘티핑 포인트’는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진짜 실력은 언젠가 반드시 폭발하기 마련이다. 

그의 우직한 트로트 외길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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