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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전드 인터뷰] 설운도 40여 년 음악 인생… “노래는 결국 시대를 담는 그릇입니다”

박강민 기자 oasis365@gmail.com

등록 2026-07-16 14:25

대표곡 ‘잃어버린 30년’ 유네스코, 기네스 등재

도망치듯 떠난 일본서 다양한 음악적 경험 습득

“작곡은 산모의 고통… 치열한 노력이 수반 돼야”

“내가 만든 곡이 아니라 가수에게 맞는 곡이 중요”

주현미부터 임영웅까지 주는 곡마다 크게 히트

“설운도 곡을 받으면 최소한 본전” 가수들 줄 서

“힘 닿을 때까지 후배들을 위해 멘토 역할 할 것”

□ 시대를 노래한 가수 설운도 심층 인터뷰 (1부)

 

1983년 여름, 대한민국의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눈물의 상봉이 이어졌다. 

KBS 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6·25전쟁으로 생이별한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했고, 국민은 화면 속 사연과 함께 울고 웃었다. 그리고 그 감동의 순간마다 한 곡의 노래가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잃어버린 30년’이다. 이 노래는 단순한 히트곡이 아니었다. 전쟁이 남긴 상처와 이산가족의 그리움, 한민족의 아픔을 음악으로 기록한 한국 현대사의 상징적 작품이었다. 

국민의 눈물을 대신 흘려준 노래였고, 시대의 기억을 품은 문화유산이었다. 그 노래의 주인공이 설운도다.

데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무대에서는 변함없이 노래하고, 후배들에게 곡을 선물하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마스터로서 다음 세대를 키워내고 있다. 

 

트로트의 세계화를 내건 ‘사단법인 대한민국 트로트문화원’ 출범을 기념해 트롯뉴스가 만난 설운도는 인터뷰 내내 자신의 성공 담보다 한국 대중가요의 미래를 더 많이 이야기했다.

이번 특집 인터뷰는 2부에 걸쳐 연재된다.  1부에서는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로 살아온 설운도의 음악 인생과 인간적 면모를, 2부에서는 원로 음악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 대중음악의 현재와 미래, K-트로트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담는다.

  설운도는 데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무대에서는 변함없이 노래하고, 후배들에게 곡을 선물하며, 오디션 프로그램에서는 마스터로서 다음 세대를 키워내고 있다. /사진=본인 제공


운명처럼 찾아온 ‘잃어버린 30년’

 

많은 이들은 설운도를 데뷔와 동시에 정상에 오른 가수로 기억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무명 생활을 오래 했습니다.”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난 설운도(본명 이영춘)는 열여섯이던 1974년 MBC 노래자랑에 부산 대표로 출전 입상하며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1982년 KBS 신인 발굴 프로그램 ‘신인탄생’에서 5주 연속 우승하며 대중의 눈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스타의 길이 열리지는 않았다. 

행사도 방송도 좀처럼 이어지지 않았고, 이름보다 생계가 먼저였다. 다만 그 시간은 헛되지 않았다. 삶의 밑바닥에서 마주한 결핍과 외로움은 훗날 서민의 애환을 누구보다 절절하게 노래할 수 있었던 설운도 음악의 뿌리가 됐다.

 

운명은 1983년 여름 찾아왔다. 

138일간 이어지며 단일 방송 세계 최장 연속 생방송 기록을 세운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1만여 명의 상봉 드라마를 이끌던 무렵, 방송을 지켜보던 설운도의 매니저가 한 곡을 떠올렸다. 설운도가 평소 “멜로디가 너무 좋다. 언젠가 꼭 다시 불러보자”라며 간직해 두었던 남국인 작곡의 ‘아버님께’였다.

“이 노래에 이산가족의 이야기를 담아보면 어떻겠습니까.”

매니저의 한마디가 한국 가요사의 전환점이 됐다. 그날 밤 작사가 박건호의 손에서 새 가사가 완성됐고, 이튿날 오아시스 레코드 녹음실에서 곧바로 녹음이 시작됐다. 그러나 노래는 쉽게 완성되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 이산가족들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을 계속 보고 있었잖아요. 막상 노래를 부르려니 감정이 북받쳐 올라 도저히 녹음을 이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디지털 편집이 불가능하던 투트랙(Two-Track) 시절, 작은 실수 하나에도 처음부터 다시 불러야 했다. 화면 속 절규와 애절한 선율이 겹치며 목이 메기를 수십 차례, 한 곡을 완성하는 데만 예닐곱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극적으로 탄생한 노래가 ‘잃어버린 30년’이다.


 설운도의 대표곡 '잃어버린 30년'은  발표 직후 최단 기간 전국 히트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고, 2015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 기록물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사진은 잃어버린 30년이 수록된 특집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기념특집 앨범 


임진각에 노래비까지 만들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역사다. 

음반은 30만 장 이상 팔렸고, 무명에 가까웠던 신인은 단숨에 국민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발표 직후 최단 기간 전국 히트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올랐고, 2015년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때는 ‘잃어버린 30년’ 음반도 그 역사적 기록의 일부로 함께 보존됐다. 

파주 임진각의 노래비는 지금도 분단의 아픔과 화해의 염원을 전한다.

“노래비가 세워질 당시만 해도 그곳은 철책선만 있던 군사시설이었습니다. 유사시 다리를 폭파하기 위해 만든 진지였는데, 지금은 임진각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가 됐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의 대표작을 두고 뜻밖의 평가를 내렸다.

“노래가 좋아서만 성공한 것은 아닙니다. 시대적 배경과 민족의 아픔이 하나로 융합되면서 역사의 기록물이 된 것이지, 개인의 역량만으로 이뤄낸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고백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그의 음악 철학이 응축돼 있다. 시대를 품은 노래만이 세월을 넘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 노래는 그를 남과 북을 잇는 무대로도 이끌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이복동생이자 색소폰 연주자인 로저 클린턴의 방북 공연에 동행해 평양을 찾았고, 정주영체육관 개관 기념 공연에도 참가했다. 당시 아내도 분장사로 신분을 바꿔 동행했다.

“평양에 도착한 아내가 가장 먼저 한 말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을 하늘에 감사한다.’ 그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파주 임진각에는 '잃어버린 30년'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사진=본인 제공


시대를 설계한 싱어송라이터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설운도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현철, 송대관, 태진아와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으로 불리지만, 그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히트곡 가수라는 사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트로트 가수가 외부 작곡가의 곡을 받아 부르는 것과 달리, 그는 자신의 음악을 직접 쓰고 불렀다. 

자작곡만 수백 곡. ‘나침반’, ‘원점’, ‘다함께 차차차’, ‘누이’, ‘쌈바의 여인’, ‘사랑의 트위스트’, ‘보랏빛 엽서’, ‘여자 여자 여자’…. 세대마다 하나쯤은 반드시 떠올리는 대표곡이 있을 정도다.

 

계보 속에서 보면 그 존재감은 더욱 선명하다. 

남인수·현인의 1세대, 남진·나훈아의 2세대를 거쳐, 설운도는 태진아와 함께 3세대를 대표하는 중심축으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장윤정의 4세대, 임영웅·송가인 중심의 오디션 세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세대를 연결하는 가교이자 살아 있는 역사로 남아 있다.

주목할 것은 이 창작의 저력이 인생의 가장 큰 시련에서 길어 올려졌다는 점이다. 

1984년, 매니저가 구속되고 소속사가 문을 닫으면서 그는 하루아침에 홀로서기에 내몰렸다. 앞날이 막막했던 그는 지인의 권유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현해탄을 건넜다.


 설운도는 현철, 송대관, 태진아와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으로 불리는 한국 대중음악의 살아있는 전설이다(좌로부터 현철, 송대관, 태진아, 설운도). / 사진=KBS'가요무대'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나 ‘전화위복’

 

낯선 일본에서의 삶은 단순했다. 

밤에는 무대에 서고, 낮에는 음악을 공부했다. 버블경제의 호황기였던 당시, 엔카와 정서가 맞닿은 그의 노래는 현지에서도 인기를 얻었다. 앙코르가 이어지면 손님들이 젓가락에 10만 엔 짜리 지폐를 꽂아 건넬 만큼 무대의 열기는 뜨거웠다. 하지만 그는 그 돈만을 모으지 않았다.

“밤에는 돈을 벌고, 낮에는 음악 공부에 미쳐 살았습니다. 번 돈은 거의 다 음악을 배우고 일본 문화를 경험하는 데 썼습니다.”

 

그에게 일본은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음악을 배우는 학교였다. 

당시 일본 음악계는 엔카는 물론 레게, 재즈, 랩, 라틴, 아프리카 음악까지 세계 각국의 장르를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보다 수십 년 앞서 있다고 느낀 그 시장을 4년 간 현장에서 해부하듯 연구했다.

그 시간은 훗날 설운도 음악의 결정적 자산이 됐다.

 

1980년대 정통 트로트의 감성을 지키면서도 1990년대 ‘다함께 차차차’, ‘쌈바의 여인’, ‘사랑의 트위스트’를 통해 라틴 리듬과 댄스 요소를 과감히 접목한 것,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던 이 시도가 트로트의 외연을 넓히며 ‘댄스 트로트’ 시대를 연 것도 일본에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람들은 내가 곡을 쉽게 쓰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 곡을 만들기까지 수많은 공부와 경험이 쌓여야 합니다. 결국 노래는 그 모든 시간의 결정체입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음악이 바뀔 때마다 그는 변화의 중심에서 새로운 해답을 내놓았다. 

그래서 업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런 말이 회자된다. 

“설운도 곡을 받으면 최소한 본전은 건진다.” 농담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그의 창작 역량에 대한 음악계의 깊은 신뢰가 담겨 있다.

 

 

“미리 써 놓은 곡은 한 곡도 없다”

 

설운도의 진가는 자신의 히트곡보다 작곡가로서의 성적표에서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주현미를 비롯해 송가인, 정동원, 손태진, 마이진 등 그의 손을 거쳐 간 후배 가수는 셀 수 없을 정도다. 현재는 ‘현역가왕’ 우승 특전 곡으로 홍지윤에게 선물할 신곡도 작업 중이다.

“요즘 오디션 프로그램 상위권 가수들이 첫 앨범 타이틀 곡으로 설운도 선생님의 곡을 받으려고 줄을 서 있다”라는 매니저의 말은 그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더 흥미로운 것은 작업 방식이다. 

 

유명 작곡가 대부분이 데모 수백 곡을 쌓아두고 가수에게 골라주는 것과 달리, 그는 전혀 다른 원칙을 고집한다.

“저는 미리 써놓은 곡이 한 곡도 없습니다. 곡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과 성격, 스타일을 보고 그 사람에게 맞게 써야 합니다. 써놓은 곡 중에서 ‘이거 맞겠다.’ 하고 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음악은 기성복이 아니라 맞춤양복이다. 곡을 의뢰 받으면 먼저 가수의 성향과 취향, 살아온 이야기를 충분히 듣는다. 곡을 주는 가장 중요한 기준을 묻자,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인연을 봅니다. 제가 먼저 곡을 주겠다고 부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모두 저를 찾아왔습니다.”

 

 

정동원 ‘사랑을 시작할 나이’ 일화

 

이 철학은 가수 정동원과의 일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선생님 곡을 받는 것이 소원”이라며 찾아온 정동원에게 어떤 노래를 좋아하느냐 물었더니 “알아서 만들어 달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자 그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사랑을 해봤니? 여자 친구는 있니?” 아직 없다는 대답에 그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적당한 나이도 됐으니, 노래로 먼저 사랑을 해보자.” 그렇게 탄생한 곡이 정동원의 대표곡 ‘사랑을 시작할 나이’다.

 

그의 맞춤은 가수에게 맞춰 쓰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익숙함을 깨는 것 또한 자신의 역할이라 믿는다. 

수십 년 자신만의 창법을 지켜온 주현미에게는 특유의 깊은 비브라토를 줄이고 담담하게 말을 건네듯 부르는 곡을 제안했고, 송가인에게는 정통 트로트 대신 맘보 리듬을 접목한 색다른 곡을 건넸다. 두 사람 모두 처음에는 낯설어했지만, 그는 그 낯섦이야말로 변화의 시작이라고 믿었다.

“가수들은 새로운 걸 쉽게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100곡을 줘도 결국 자기가 부르기 편한 곡을 고르죠.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뻔한 패턴을 벗어나 시대에 맞게 계속 변화해야 합니다.”

수십 년 히트곡을 만들어 온 설운도는 결국 노래를 만드는 사람을 넘어, 가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프로듀서에 가까웠다.

 

 

임영웅에게 준 ‘별빛 같은~’ 1억 뷰 눈앞

 

작곡가 설운도를 이야기하며 임영웅을 빼놓을 수는 없다. 

두 사람의 인연은 ‘미스터트롯’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7년 말 KBS ‘아침마당 - 도전 꿈의 무대’. 군고구마를 팔며 생계를 잇던 한 무명 청년이 5연승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무대를 지켜보던 설운도가 말했다.

“저 친구 몇 살인가. 꼭 내 20대를 보는 것 같네. 노래도 좋고 이름도 좋고, 앞으로 크게 될 사람 같아.”

그 청년이 지금의 트로트 스타 임영웅이었다. 35년 전 같은 방송사 ‘신인탄생’에서 5주 연속 우승을 거두고도 긴 무명을 견뎌야 했던 설운도였기에, 그는 청년의 설움과 간절함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다. 

그리고 예감은 불과 2년 만에 현실이 됐다. TV조선 ‘미스터트롯’에서 임영웅이 부른 ‘보랏빛 엽서’는 발표 20년이 넘어 음원차트를 역주행하며 새 생명을 얻었다.

고마움을 느낀 설운도는 TV조선 ‘뽕숭아학당’의 ‘설운도 가요제’에서 우승자에게 신곡을 선물하기로 약속했고, 그렇게 임영웅에게 건네진 노래가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이 곡은 임영웅의 대표곡으로 자리 잡았고, 뮤직비디오는 8천만 회를 넘어 1억 뷰를 바라보고 있다.


 설운도가 임영웅에게 선물한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는 뮤직비디오가 8000만 뷰를 넘어 1억 뷰를 바라보는 메가히트 노래가 되었다. / 사진=TV조선 '신청곡을 불러드립니다-사랑의 콜센타'


“임영웅은 내 곡이 가장 잘 어울려”

 

“그 노래 저작권료로 집사람이 벤츠를 사주더라고요.” 좌중을 웃게 한 농담 뒤에 그는 곧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게 하늘에서 떨어진 건 아닙니다. 남들 잘 때 밤새워 곡을 썼습니다. 피 나는 노력 끝에 여기까지 온 것이지,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인연은 한 곡으로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선물한 ‘사랑해요 그대를’은 임영웅 콘서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팬 헌정곡으로 자리 잡으며 뮤직비디오 조회 수 1천만 회를 넘겼다. 

두 사람의 음악적 궁합에 대해 그는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 친구는 제 곡이 가장 잘 어울립니다. 제 스타일하고 가장 잘 맞는 가수예요.”

수십 년 동안 수많은 가수의 목소리를 연구해 온 작곡가가 내린, 가장 확신에 찬 평가였다.

 

 

“나훈아 꺾고, 남진 밀고, 난 당긴다”

 

창법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자신의 대표적 어록을 다시 들려줬다.

“나훈아는 꺾고, 남진은 밀고, 나는 당긴다.”

트로트 팬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세 사람의 창법을 가장 간결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표현이다. 트로트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꺾기’에 대해서도 그의 철학은 분명했다.

“꺾기는 타고나는 겁니다. 배워서 되는 게 아닙니다.”


오랜 세월 정상을 지킨 비결로는 오히려 비브라토를 절제하는 창법을 꼽았다. 그는 프랭크 시나트라를 예로 들었다.

“시나트라가 70~80대까지도 멋진 공연을 할 수 있었던 건 비브라토를 남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브라토가 없으면 노래가 늘 신선하고 젊게 들립니다. 나이가 들면 호흡이 짧아지고 배에 힘이 빠지는데, 그걸 감추려고 비브라토를 많이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그 비브라토만 들어도 목 상태와 나이를 압니다.”

화려한 비브라토는 처음엔 실력처럼 들리지만, 오래 들을수록 단조로워진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비브라토를 넣어야 할 때와 빼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이 오래갑니다.”

유행을 좇기보다 기본과 절제를 중시해 온 그의 음악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이다.

 

 

손꼽히는 수석 수집가 “박물관이 꿈”

 

화려한 무대 위의 모습과 달리 무대 밖의 그는 의외의 취미를 가진 사람이다. 연예계에서 손꼽히는 수석(壽石) 수집가다. 계기를 묻자, 특유의 유쾌한 웃음이 돌아왔다.

“술도 안 하고 담배도 안 피우는데, 수석이라도 안 하면 뭐 하며 살겠습니까?”

 

인연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할아버지 댁 찬장에는 그릇 대신 이름 모를 돌들이 빼곡했다. 처음에는 “노망이 나신 줄 알았다.”라던 그 돌들이 볼수록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고,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찬장 속 수석은 모두 그의 손에 넘어와 삶의 일부가 됐다. 그는 언젠가 작은 수석 박물관을 만들어 둘째 아들에게 맡기고 싶다는 바람도 내비쳤다.

또 다른 안식처는 양평의 전원주택이다. 그에게 그곳은 휴식 공간이자 가장 중요한 창작 공간이다. 직접 정원수에 물을 주고 가지를 다듬고 잔디를 깎으며, 사다리에 올라 전등을 갈 정도로 집안일도 손수 한다.

“전원에 있으면 어릴 적 감나무가 있던 할머니 집이 떠오릅니다. 그 기억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고, 그때 곡의 영감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설운도는 가요계에서 내노라 하는 수석(壽石)수집가로  향후 작은 수석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 꿈이다. / 사진=본인 제공

아들 가수 활동 선택을 존중하지만...

 

그에게 작곡은 “아이를 낳는 산모의 고통”에 비견될 만큼 치열한 작업이다. 노래 한 곡 안에 기승전결이 있어야 하고, 시대의 흐름과 대중의 감성까지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차 안에도 항상 작곡 장비를 갖춰둔다. 목적지 없이 길을 달리다 멜로디가 떠오르면 차를 세우고 악상을 기록한다.

“자연 속에서 몸을 움직이며 스스로 치유하는 겁니다. 땀 흘리고 샤워한 뒤 동네 맛집에서 밥 한 끼 먹고 나면 또 새로운 음악을 만들 동력을 얻습니다.”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표정은 한층 부드러워졌다. 아내 이수진 씨는 ‘여자 여자 여자’를 비롯한 초창기 대표곡의 작사가로 오랜 세월 음악적 동반자가 되어왔다.

지난해 아들에게 선물한 신곡 ‘오피스텔’ 이야기도 이어졌다.

“예전에는 아파트가 성공의 상징이었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혼자 살기 편한 오피스텔을 더 선호하잖아요. 그런 시대상을 노래에 담아보고 싶었습니다.”

 

가수로 활동 중인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현실적인 아버지의 속내도 털어놨다.

“자식이 부모 말을 듣나요. 부모를 보고 자라면서 스스로 선택한 길이죠. 사실은 남의 집 아이가 평범하게 회사 다닌다는 얘기를 들을 때가 제일 부럽습니다.”

수십 년 동안 화려한 무대의 중심에 섰던 국민가수지만 무대 밖의 설운도는 자연 속에서 돌을 바라보고, 가족을 걱정하며, 새로운 노래를 고민하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그의 노래가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온 이유도 어쩌면 그 평범함 속 진심에 있는지 모른다.

 

 

“배울 점 많은 선배로 기억됐으면”

 

인터뷰 말미, 언제까지 노래할 생각이냐고 묻자, 그는 뜻밖에도 정색했다.

“그 질문은 노래를 그만하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기자님은 언제까지 살고 싶습니까?”

잠시 후 특유의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지금은 80대, 90대가 돼도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활동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다만 오래 하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합니다. 저는 곡을 쓰는 일도, 노래하는 일도 어느 하나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내년이면 일흔이지만 아직 팔팔합니다.”

가장 빛나는 순간 스스로 무대를 내려오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물음에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그만둔다고 하면 가요계에서 말릴 겁니다. 노래만 잘하고 곡만 잘 쓰는 선배는 많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후배들을 아우르고 길을 알려줄 수 있는 멘토도 필요합니다. 저는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선배로 기억되고 싶으냐는 마지막 질문에 그의 답은 담백했다.

“‘저 선배는 음악적으로 정말 배울 점이 많은 분이었다. 나도 저런 가수가 되고 싶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설운도가 자신의 성공을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히트곡을 묻자, 시대를 이야기했고, 저작권료를 묻자, 노력을 이야기했다. 은퇴를 묻자, 자신의 미래보다 후배들의 미래를 먼저 이야기했다.

그래서 설운도는 지금도 현역이다. 

단지 무대에서 노래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지금도 새로운 곡을 고민하고, 후배들의 가능성을 발견하며, 한국 대중음악의 다음 100년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음악은 과거의 영광을 증명하는 훈장이 아니라, 지금도 써 내려가고 있는 현재이며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였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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