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로트문화원·트롯뉴스 공동기획 ‘등려군 아시아를 노래하다’
[제1화] 외성인의 딸, 열네 살에 무대를 택하다
1953년 1월 29일, 대만 윈린현(雲林縣) 바오중향(褒忠鄉) 톈양촌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등려균(鄧麗筠). ‘균(筠)’은 대나무를 뜻하는 글자다. 이름에는 대나무처럼 아름답고 바르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고 전해진다.
그 아이가 훗날 아시아 전역에 알려진 가수 등려군(鄧麗君)이다. 본명의 마지막 글자 ‘균(筠)’이 ‘군(君)’으로 바뀌어 예명이 됐다. 한 글자가 바뀐 이름은 국경을 넘어 오래도록 불리는 이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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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속 바다를 건너온 부모
등려군의 가족사는 20세기 중국의 격변과 맞닿아 있다.
아버지 덩수(鄧樞)는 허베이성(河北省) 다밍현(大名縣) 출신의 군인이었다. 국공내전 끝에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물러나던 시기, 그 역시 바다를 건넜다. 어머니 자오쑤구이(趙素桂)의 고향은 산둥성(山東省) 둥핑현(東平縣)이었다. 두 사람에게 대만은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지만, 두고온 고향은 해협 건너편에 남아 있었다.
당시 대만에서는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이들과 그 가족을 ‘외성인(外省人)’이라 불렀다. 이전부터 대만에 살던 ‘본성인(本省人)’과 구분하는 말이었다. 군인 가족 상당수는 ‘권촌(眷村)’이라 불린 군인 가족 주거지에서 살았다. 서로 다른 지역의 말과 음식, 생활 방식이 한 공간에 모였다.
등려군은 그런 이주민 가정의 딸이었다. 형제가 모두 다섯인 집안의 외동딸로, 위에 오빠 셋과 아래에 남동생 하나가 있었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 속에서 부모는 아이들을 키웠다. 등려군이 어린 나이에 무대에 서기 시작한 데에는 타고난 노래 실력과 함께 가족의 경제적 사정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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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을 권촌서 자란 아이
등려군의 유년을 이해하는 데 ‘권촌’은 중요한 공간이다.
1949년을 전후해 대만으로 건너온 군인과 가족들에게 주거지는 가장 큰 문제였다. 군인 가족을 위한 마을에는 중국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모였다. 같은 골목에 살아도 고향이 다르고 쓰는 말도 달랐다.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약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낯선 땅에서 이웃이 됐다.
등려군도 그 세계에서 어울려 자랐다. 그러나 훗날 그가 여러 언어로 노래할 수 있었던 능력을 권촌 생활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어린 시절의 생활 환경은 다양한 말소리를 접하는 계기였을 것이지만, 여러 언어로 노래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후 각 지역에서 쌓은 경험과 연습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
가족은 등려군이 태어난 윈린을 떠나 타이둥을 거쳤고, 1959년 타이베이현 루저우(蘆洲)의 권촌으로 이사했다. 등려군은 루저우초등학교에 다녔다. 이곳에서 학교 공연에 참여하고 노래를 배우며 무대와 가까워졌다. 훗날 가수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인연도 루저우에서 만났다.
노래를 좋아한 부모 역시 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아버지는 경극을, 어머니는 황매조(黃梅調)를 즐겼다고 전해진다.(*황매조는 중국의 전통 공연예술인 황매희(黃梅戲)에서 쓰이는 노래 가락을 뜻하며 ‘조(調)’는 곡조라는 뜻이다) 등려군은 학교 행사에 참여하고, 들은 노래를 곧잘 따라 부르며 재능을 드러냈다. 가족의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어도 노래는 그의 일상 가까이에 있었다.
‘군인들의 연인’으로 불리다
등려군의 어린 시절 무대는 루저우의 군인 마을인 권촌과 이어져 있다.
그곳에 있던 공군 ‘93강락대(九三康樂隊)’의 호금 연주자 리청칭(李成清)은 등려군의 노래 스승이었다. 등려군문교기금회의 연보는 그가 1961년, 여덟 살이던 등려군에게 황매조와 발성법을 가르쳤다고 기록한다. 루저우 지역 자료에도 같은 해 리청칭에게 노래 지도를 받았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따라서 첫 노래 지도를 받은 나이를 ‘여섯 살’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등려군은 학교 무대에 서는 한편, 93강락대를 따라 군 위문공연에도 참여했다.
윈린현 바오중향의 소개 자료에는 그가 당시 유행가와 황매조 노래를 두세 번 듣고 따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어린 가수에게 군부대는 멀리 떨어진 특별한 공연장이 아니었다. 자신이 살던 마을 가까이에서 노래를 익히고 관객을 만나는 자리였다.
훗날 등려군은 군 위문공연과 깊은 인연을 이어가며 ‘군중정인(軍中情人)’, 곧 ‘군인들의 연인’으로 불렸다. 그 호칭의 출발점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린 등려군이 93강락대와 함께 섰던 무대가 있다.
자전거 뒷자리에 아이를 태워 연습실로 데려갔다거나 공연 보수로 사탕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인상적이다.
확인되는 사실만으로도 출발점은 선명하다. 루저우의 군인 마을에서 노래를 배운 소녀가, 학교와 위문공연 무대를 거쳐 아시아가 기억하는 가수로 자라났다.
열 살의 우승, 열네 살의 결단
1963년 8월, 열 살의 등려군은 라디오 노래 대회에 참가했다.
중화방송전대(中華廣播電臺)가 연 영화 ‘양산백과 축영대’ 삽입곡 경연이었다. 그는 ‘방영대(訪英台)’를 불러 개인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참가자 가운데 나이가 가장 어렸다.
그 날의 첫 우승은 어린 등려군에게 노래가 취미 이상의 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학교 공연과 군 위문공연에서 노래하던 아이가 방송을 통해 더 많은 청중에게 목소리를 들려준 순간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금마창편공사(金馬獎唱片公司)가 주최한 노래 대회에서 ‘채홍릉(採紅菱)’으로 우승했다.
등려군은 1965년 타이베이의 진링여중(金陵女中)에 진학했다. 노래도 계속 배웠다. 이듬해에는 정성방송공사(正聲廣播公司)의 가창 훈련반을 마쳤다. 어린 시절의 재능에 레슨과 공연 경험이 더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생활과 노래 활동을 함께 이어가기는 쉽지 않았다.
1967년, 열네 살의 등려군은 진링여중을 휴학하고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훗날의 성공을 알고 돌아보면 자연스러운 선택처럼 보이지만, 당시에는 학업을 멈추고 불확실한 무대를 택하는 결정이었다. 당시 어려웠던 가정 형편도 한몫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63년 중화방송전대(中華廣播電臺)가 연 영화 ‘양산백과 축영대’ 삽입곡 경연이었다. 그는 ‘방영대(訪英台)’를 불러 개인 부문 1위를 차지했다. /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정통곡 ‘황매희’곡조로 우승
열 살의 등려군이 우승한 곡 ‘방영대’는 당시 대만에서 큰 인기를 끈 영화 ‘양산백과 축영대(梁山伯與祝英台)’의 노래였다. 영화에 쓰인 황매조(黃梅調)는 중국 전통극 황매희의 곡조를 바탕으로 한 노래를 가리킨다. 등려군의 첫 수상 기록에는 그 시절 대중이 즐겨 듣던 음악과 어린 가수의 재능이 함께 담겨 있다.
등려군에게 황매조는 대회에서 부른 한 곡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노래 스승이었던 공군 93강락대의 호금 연주자 리청칭(李成清)은 어린 등려군에게 황매조를 가르치고 발성을 지도했다. 등려군문교기금회는 그가 1961년부터 리청칭에게 배웠으며, 가수 활동 초기에도 황매조와 전통 소곡, 대만 민요에 능했다고 기록한다.
황매조 노래에서는 선율을 따라가는 일만큼 가사를 들려주는 일이 중요하다.
인물의 마음과 이야기의 흐름이 노랫말에 실리기 때문이다. 어린 등려군은 이런 노래를 배우고 사람들 앞에서 반복해 불렀다. 훗날 그의 노래가 지닌 또렷한 발음과 섬세한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 초기 경험이다. 다만 평생의 창법이 황매조 하나에서 완성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후 음반 녹음과 방송, 여러 지역의 무대에서 쌓은 경험도 그의 목소리를 빚었다.
윈린현 바오중향의 소개 자료에는 등려군이 유행가부터 황매조까지, 노래를 두세 번 듣고 따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듣고 익히는 속도가 빨랐던 아이는 곧 방송과 음반에서 자신의 노래를 들려주게 된다.
1967년, 자신의 이름 음반 내다
휴학한 그해 등려군은 우주창편(宇宙唱片)에 합류했다. 1967년 9월, 첫 음반 ‘등려군지가 제1집·봉양화고(鄧麗君之歌第一集·鳳陽花鼓)’를 냈다. 열네 살이었다. 대만 국립역사박물관이 소장한 당시 음반에도 ‘민국 56년 9월 출판’이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발매일을 ‘9월 1일’로 못 박기보다는 ‘1967년 9월’로 판단하는 편이 정확하다.
첫 음반은 그가 출발한 자리와도 닮아 있었다. 민요와 전통 소곡의 색채가 짙었다. 등려군은 같은 해 11월과 12월에도 후속 음반을 냈다. 무대에서 노래를 잘 부르는 아이로 알려졌던 시기를 지나,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음반을 발표하는 가수가 된 것이다.
방송도 그를 더 넓은 청중에게 소개했다.
등려군문교기금회 연보에 따르면 그는 1967년 인기 가창 프로그램 ‘군성회(群星會)’에 초청돼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노래했다.
1969년에는 또 한 번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작곡가 줘훙위안(左宏元)의 추천으로 중국텔레비전(中視)이 제작한 드라마 ‘정정(晶晶)’의 주제가를 불렀다. 등려군문교기금회는 이 작품을 대만 최초의 텔레비전 연속극으로 소개한다. 같은 해 12월에는 중시의 프로그램 ‘매일일성(每日一星)’ 진행도 맡았다. 열여섯 살 가수는 음반에 이어 텔레비전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넓혀가고 있었다.
열 살의 대회 우승에서 열네 살의 첫 음반까지, 등려군에게는 불과 네 해가 걸렸다. 그사이 학교 공연과 군 위문무대에서 익힌 노래는 라디오 경연을 거쳐 음반과 텔레비전으로 옮겨갔다. 아시아 곳곳에 울려 퍼질 목소리가 대만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시기였다.
. 1967년 9월, 첫 음반 ‘등려군지가 제1집·봉양화고(鄧麗君之歌第一集·鳳陽花鼓)’
대만 최초 드라마 주제가 ‘정정’
1969년 등려군이 부른 드라마 ‘정정(晶晶)’ 주제가는 대만 텔레비전 사상 첫 드라마 주제가로 기록된다.
지금 기준으로는 드라마에는 당연히 주제가(OST)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1969년 대만에서 이것은 새로운 시도였다. 드라마와 가요가 결합해 서로의 인기를 증폭시키는 구조, 지금 우리가 OST라고 부르는 산업 모델의 초기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 주제가가 등려군에게 준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노출의 규모가 달라졌다. 나이트클럽 무대의 관객이 하루 수백 명이라면, 텔레비전 드라마의 시청자는 수십~수백만 명이었다. 매회 방송 시작과 끝에 그의 목소리가 나갔다.
둘째, 이미지가 생겼다. 드라마의 서사와 인물이 노래에 얹히면서, 등려군의 목소리는 특정한 정서와 결합됐다. 이것이 브랜드의 출발이다.
이후 등려군의 경력에서 영화와 드라마 주제가는 반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96년 그의 사후에 만들어진 영화 ‘첨밀밀’이 그의 노래를 제목이자 구조로 삼은 것도 이 계보의 연장이다.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당시 대만 가요계의 곡 배정 방식이다. 1970년 무렵까지도 ‘한 가수를 위해 맞춤옷처럼 곡을 만든다’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영화나 드라마에 쓸 곡이 완성되면 가수 몇 명을 선정해 각자 불러보게 하고, 그중 가장 어울리는 버전을 골라 사용했다. 같은 곡을 두세 사람이 각자의 창법으로 해석해 경쟁하는 구조였다.
등려군은 이 경쟁에서 계속 승리했다. 곡을 고르는 능력이 아니라, 주어진 곡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이다.
남녀노소를 누구에나 사랑받아
1970년 대만의 한 신문은 이런 제목을 뽑았다. “1970년은 덩리쥔의 해다.”
또 다른 석간신문의 평가는 더 구체적이었다. “덩리쥔의 노래는 노인들이 들으면 웃음꽃이 피고, 중년이 들으면 고민을 잊게 되며, 젊은이가 들으면 달콤한 기분이 되고, 어린아이가 들으면 춤을 추게 만든다.”
열일곱 살에 불과한 어린 가수에 대한 평가로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의 평가였다. 그러나 이 문장은 등려군이라는 가수의 본질을 정확히 짚고있었다. 그의 강점은 특정 세대나 특정 취향만을 겨냥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통했다.
훗날 중국 팬클럽 장쑤성 분회장 자진이(賈金怡)는 그 이유를 이렇게 정리했다. “자기 노래의 장점과 스타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전쟁의 공포가 지나간 뒤 물질적 풍요와 희망이 시작된 시대를 깊이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노래를 필요로 하는지 알았던 거지요. 노래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 깊은 곳을 어루만졌던 것입니다.”
열일곱에서 스무 살까지, 등려군은 연애할 틈도 없이 바빴다고 전기는 기록한다. 가수의 삶 외에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았다. 날개를 펼칠 준비만 했다.
평생 배우기 멈추지 않은 이유
등려군을 설명할 때 가장 자주 반복되는 오해가 ‘독학으로 익힌 천재’라는 표현이다.
정작 본인은 이 말을 싫어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정식으로 노래를 배운 적이 없다는 이유로 독학이나 타고난 재능을 칭찬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심으로 좋은 선생에게서 노래의 기술과 기교를 배우고 싶어 했다.
그리고 실제로 평생 그렇게 했다.
1968년 방송 가창 프로그램 ‘군성회’에 출연하며 만난 선즈(愼芝)와 관화스(關華石) 부부는 그의 첫 본격적인 스승이었다.
두 사람은 대만 최초의 텔레비전 가창 프로그램을 제작한 방송인이자 가요계의 중심 인물이었다. 열다섯의 등려군은 이 프로그램에 ‘초콜릿 시스터스’라는 듀오로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선즈는 작사가이기도 했다. 훗날 등려군의 대표곡 가운데 하나인 ‘아지재호니(我只在乎你)’의 중국어 가사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 작곡가 줘훙위안도 이 시기 등려군을 밀어준 인물이다.
두 스승이 등려군을 평한 표현이 남아 있다. “겸손하고 가르칠 마음이 드는 훌륭한 학생.”
이 태도는 평생 유지됐다.
요구받는 노래의 스타일이 다양해지고 경험한 적 없는 장르를 소화해야 할 때마다, 등려군은 새로운 선생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이미 아시아 최고의 인기가수 자리에 있던 30대에도 런던의 오페라하우스에서 발성 훈련을 받았다.
전기는 이 과정을 ‘선순환’이라고 표현했다. 성공을 향한 길에는 순식간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도, 손쉬운 지름길도 없다는 것이다.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온다는 흔한 문장이, 등려군의 경우에는 실제 이력으로 증명된다.
군인의 딸이라는 정체성
등려군의 삶을 이야기할 때 ‘군인의 딸’이라는 출발점을 빼놓기 어렵다.
아버지 덩수는 중국 본토에서 대만으로 건너온 군인이었다. 등려군은 군인 가족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자랐고, 어린 시절 공군 93강락대와 함께 위문공연 무대에 섰다.
군부대는 유명해진 뒤 새로 찾아간 곳이 아니었다. 그가 노래를 배우고 관객을 만난 첫 무대 가운데 하나였다.
그 인연은 성인이 된 뒤에도 이어졌다. 등려군은 진먼다오(金門島)를 비롯한 전방 지역에서 군인들을 위해 노래했다. 샤오진먼의 위문공연을 마친 뒤에는 병사 일곱 명이 주둔한 작은 섬까지 건너가, 각자의 초소를 찾아 노래했다는 당시 군 관계자의 회고도 남아 있다. ‘군중정인(軍中情人)’, 곧 ‘군인들의 연인’이라는 별명은 이런 무대에서 쌓였다.
아버지의 고향이 허베이성에 있었다는 사실 역시 그의 가족사를 이해하는 배경이다. 등려군 자신은 대만에서 태어났지만, 부모에게는 바다 건너 두고 온 고향이 있었다. 훗날 그의 노래가 중국 본토에서도 널리 들렸다는 사실은 그런 가족사와 겹쳐 읽힌다.
다만 청중이 그의 노래를 받아들인 이유를 가족사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노래가 먼저 사람들에게 닿았고, 해협을 사이에 둔 역사는 그 장면에 또 다른 의미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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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의 대만 음반 산업
등려군이 데뷔한 1967년 대만의 음반 산업이 어떤 상태였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대만은 계엄 체제 아래 있었다. 방송과 출판, 음반에 대한 검열이 존재했고, 중국 본토 관련 내용은 물론 ‘퇴폐적’이라 판단되는 가사도 제한됐다. 일본 대중문화 역시 공식적으로는 통제 대상이었다.
시장 규모도 작았다. 인구 1,300만 안팎에 1인당 소득은 낮았다. 음반은 사치품에 가까웠고, 대중이 음악을 접하는 주요 경로는 라디오와 나이트클럽, 그리고 영화였다.
우주창편 같은 음반사는 소규모였다. 대형 자본이 신인을 발굴해 장기 육성하는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다. 가수는 스스로 무대를 찾아다니며 이름을 알려야 했고, 대회 입상과 방송 출연이 사실상 유일한 등용문이었다.
이 환경에서 열네 살 소녀가 전업 가수를 선언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하다. 안전망이 없었다. 실패하면 학력도 경력도 없는 상태로 남는 것이다.
그럼에도 등려군은 그 길을 택했고, 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았다. 대신 조건을 걸었다. 하려면 제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열악한 조건이 오히려 등려군을 강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육성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해야 했다. 어떤 곡을 부를지, 어떤 무대에 설지, 무엇을 더 배워야 할지를 본인이 결정했다. 훗날 일본과 홍콩과 미국에서 그가 보여준 탁우러한 판단력의 출처가 여기다.
지금 한국의 트로트 신인들은 정반대 조건에 놓여 있다. 방송사가 발굴하고, 기획사가 관리하고, 스케줄이 짜여 나온다. 편하지만 위험하다. 시스템이 대신해주는 환경에서는 판단력이 자라지 않는다.
스타는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등려군의 데뷔 과정을 정리하면 하나의 결론이 남는다.
스타는 태어나지 않는다. 만들어진다.
타고난 목소리는 출발점일 뿐이었다. 여섯 살부터 시작된 실전 무대, 매일 밤 업소에서의 반복, 두 차례 전국 규모 대회 입상, 스승과의 만남, 학업 포기라는 결단, 그리고 가족의 지지. 이 조건들이 순서대로 쌓여 열여섯 살 가수 등려군이 만들어졌다.
한국 트로트계에는 여전히 ‘발굴’이라는 말이 흔히 사용된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원석을 찾아내면 스타가 된다는 서사다.
그러나 등려군의 경우 발굴은 시작에 불과했다. 열한 살에 발굴된 뒤 열여섯이 될 때까지 5년 동안, 그는 거의 매일 무대에 섰다.
[트로트가 배우는 것]
오디션 우승은 데뷔가 아니라 훈련의 시작이다. 등려군은 열한 살에 전국 대회에서 우승한 뒤에도 5년을 밤무대에서 버텼다. 한 업소에서 70일 연속 공연을 하며 관객 반응을 읽는 법을 몸으로 익혔다. 지금 한국 트로트가 배출하는 신인들에게 부족한 것은 재능이 아니라 이 5년의 경험이다. 방송 무대만 익숙한 가수는 방송 밖에서 약하다.
[다음 회 예고] ⇨제2회 ‘한 소절을 위해 런던으로’, 음정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녹음분 전량을 폐기하고 다시 비행기를 탔던 완벽주의의 실체를 해부한다. 광둥어 발음을 단계별로 쪼갠 자기만의 표기법, 비틀스가 쓰던 애비로드 스튜디오의 마지막 가수가 된 사연, 하루 6시간의 무용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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