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로트문화원·트롯뉴스 공동기획 ‘등려군 아시아를 노래하다’
[제4화] 일본정복 1막 ‘공항’과 무명의 3년
1973년, 스무 살의 등려군(鄧麗君·덩리쥔·Teresa Teng)은 이미 대만·홍콩·동남아 화교권에서 최정상 가수였다. 음반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콘서트는 성황리에 열렸으며, 방송과 언론은 연일 그의 행보를 주목했다.
그러나 한참 주가를 높이던 그해 그는 생소한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낯선 시장에서 다시 신인이 됐다. 일본에서의 소속사는 와타나베 프로덕션, 음반사는 폴리도르였다. 그는 일본어를 처음부터 배우면서 일본식 노래스타일과 무대 관행을 다시 익혀야 했다.

1973년, 스무 살의 등려군(鄧麗君·덩리쥔·Teresa Teng)은 이미 대만·홍콩·동남아 화교권에서 최정상 가수였다.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그녀는 왜 일본시장을 선택했나?
1970년대 일본은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음반 시장이었다. 그러나 등려군이 일본을 선택한 이유는 시장 규모가 크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 가요계는 작곡·편곡·녹음·방송 제작·매니지먼트 전반에서 아시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에서 인정받는 것은 곧 아시아 전역에서의 경쟁력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여기에 등려군에게 유리한 조건도 있었다. 대만은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일본 대중문화가 사회곳곳에 깊숙이 남아 있었다. 등려군 세대는 일본 가요를 자연스럽게 듣고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들은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에게서 가수의 꿈을 키웠다고 밝혔다. 비음 섞인 허밍과 절제된 창법에서 배운 것이 많았다는 것이다. 훗날 일본 방송은 그녀를 ‘대만의 미소라 히바리’로 소개하기도 했다.
한국이 같은 시기 일본 대중문화를 ‘왜색’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차단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등려군은 식민의 기억을 배척의 이유로 삼지 않고, 자신이 접근할 수 있는 문화적 자산으로 전환했다. 결국 그 선택이 그를 아시아 최고의 가수로 만들었다.
‘일본의 아버지’ 후나키 미노루 안목
등려군의 일본 진출은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일본 폴리도르 레코드 제작관리부장이던 후나키 미노루는 1973년 홍콩에서 스무 살의 등려군이 무대에 서는 것을 직접 보고 “미소라 히바리를 연상시키는 가수”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 가수는 반드시 일본에서 불러야 한다”고 판단했고, 홍콩 체류 중 몇 차례 연락해 등려군과 어머니를 만나 “꼭 일본에서 도전해 달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등려군의 아버지는 딸의 일본 데뷔에 강하게 반대했다. 후나키는 이를 알고 대만까지 직접 찾아가 “일본에서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거듭 약속하며 완강하던 아버지 설득에 나섰다. 여러 차례 대만과 홍콩을 오가며 가족을 만난 끝에 계약이 이뤄져 등려군은 1973년 일본 폴리도르와 계약했다.
이 때문에 후나키는 등려군에게 ‘일본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그리고 이 약속은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1974년 첫 싱글 ‘오늘밤일까 내일일까(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가 오리콘 75위에 머물고 판매가 부진하자, 등려군은 “내 노래 방식이 잘못된 건가?”라며 크게 고민했다. 후나키 역시 아버지에게 성공을 약속한 터라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고 전한다.
이 일화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한 아티스트 한명의 스카웃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등려군의 일본 진출은 가수 개인의 도전이자, 한 명의 일본 제작자가 ‘이 가수의 가능성’을 믿고 가족까지 설득해 만든 프로젝트였다. 훗날 ‘공항’의 성공, 그리고 1983년 후나키가 세운 토러스 레코드와의 재계약까지 이어진 관계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일본 폴리도르 레코드 제작관리부장이던 후나키 미노루는 1973년 홍콩에서 등려군의 공연을 보고 꼭 일본에 진출시켜야겠다고 결심하고 등려군의 부모님(사진)을 설득해 결국 일본진출에 성공한다 /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와타나베 프로덕션의 앞선 시스템
등려군의 일본 활동을 관리한 곳은 와타나베 프로덕션이었다.
이 회사는 1955년 설립된 뒤 1960~70년대 일본 연예계를 이끌며, 가수 발굴에서 곡 제작·방송 출연·콘서트·광고까지 전 과정을 관리하는 종합 매니지먼트 모델을 정착시켰다.
오늘날 수 많은 K팝스타들을 배출하고 있는 한국 기획사 모델의 원형이라 할 만하다.
등려군이 이 시스템에 들어간 것은 일본 시장의 관행을 가장 빠르게 배울 통로를 얻은 셈이었다. 실제로 데뷔 초 그는 와타나베 프로 소속 신인가수로 소개됐고, 1974년 5월에는 유명 엔카가수 모리 신이치(森進一·Mori Shinichi) 콘서트 게스트 출연도 준비하는 등 현지 활동에 적극 투입됐다.
하지만 등려군의 일본활동은 예상대로 제약도 많았다. 일본식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에서 가수는 회사가 설계한 콘셉트를 그대로 따라야 했다. 곡의 방향, 의상, 발언, 이미지까지 관리 대상이었다. 대만과 홍콩에서 스스로 판단하며 활동해 왔던 등려군에게는 낯선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생소했던 상황이었지만 이 시스템을 거부하지 않고 흡수했다.
일본에서 배운 제작 방식과 프로모션 기법은 이후 중화권 활동에 그대로 적용됐다. 1980년대 홍콩 콘서트가 아시아 최고 수준의 완성도를 보인 배경에는 일본에서의 경험과 학습이 있었다.
일본에서의 첫 싱글, 오리콘 75위
1974년 3월 1일, 등려군은 일본 데뷔 싱글 ‘오늘밤일까 내일일까(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를 발매했다. 산가미 로쿠 작사, 츠츠미 쿄헤이 작곡의 아이돌 가요풍 곡이었다.
결과는 냉정했다.
오리콘 최고 75위에 머물렀다. 대만과 홍콩에서 최정상 스타였던 그에게는 굴욕적인 숫자였다.
당시 일본 시장에서 ‘대만에서 온 화교 가수’라는 포지션은 큰 무기가 되지 못했다. 곡도 그의 강점인 절제된 감성과 여운을 살리지 못했다. 무엇보다 일본 청중은 화교권의 스타인 등려군의 존재를 잘 몰랐다.
그러나 등려군과 일본 제작진은 첫음반의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고 전략을 바꿨다.
엔카풍의 ‘공항’ 70만여 장 판매 기록
1974년 7월 1일, 두 번째 싱글 ‘공항(空港)’이 나왔다.
야마가미 로쿠 작사, 이노마타 고쇼 작곡의 이 곡은 떠나는 연인을 공항에서 배웅하는 여자의 심경을 담았다.
첫 싱글이 아이돌 가요 노선이었다면, ‘공항’은 무드 가요·엔카 계열로 방향을 바꿨다.
등려군의 목소리가 가진 절제된 감정, 낮고 부드러운 여운, 이별의 정서를 살릴 수 있는 곡이었다. 의상도 미니에서 미디로 바뀌며 ‘성숙한 여성 가수’라는 이미지를 강화했다.
결과는 첫 음반때와는 전혀 달랐다.
유선방송을 중심으로 반응이 쌓였고, 누적 판매량은 약 70만~80만 장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해 12월 31일, 제16회 일본레코드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외국인 가수가 일본레코드대상 신인상을 받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데뷔 첫해의 실패를 4개월 만에 반전의 결과로 뒤집은 셈이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목소리도, 가수도 아니었다. 곡의 선택과 포지셔닝이었다. 일본 제작진은 그를 ‘이국적인 외국 가수’로 이미지로 홍보하는 대신, 일본 가요의 문법 안에서 승부시켰다.
등려군의 1974년 7월 1일, 두 번째 싱글로 발표한 ‘공항(空港)’은 유선방송을 중심으로 인기를 끌면서 누적 판매량은 약 70만~80만 장에 이르렀고 그해 12월 31일, 제16회 일본레코드대상에서 신인상을 받았다/사진=등려군 '공항 '앨범자켓
두 개의 이름으로 두 개의 시장 공략
일본 활동을 시작하면서 등려군은 사실상 두 개의 이름으로 살았다.
중화권에서는 ‘덩리쥔(鄧麗君)’, 일본에서는 ‘테레사 텐(テレサ・テン)’이었다. 테레사(Teresa)는 가톨릭 세례명에서 온 영어 이름이고, 텐(Teng)은 성의 로마자 표기다.
이름이 둘이라는 것은 정체성이 둘이라는 뜻이 아니라, 시장이 둘이라는 뜻이다.
중화권에서 그의 레퍼토리는 사랑 노래, 민요풍 가요, 고전 예술가곡이었고 이미지는 ‘아시아의 가희’였다.
반면 일본에서의 레퍼토리는 이별과 미련, 기다림을 다룬 성인 가요였다.
‘공항’을 비롯해 이후 ‘쓰구나이(つぐない)’ ‘아이진(愛人)’까지, 그의 일본 히트곡은 대체로 이별의 정서를 중심에 두었다. 이미지 역시 ‘사연 있는 성숙한 여성’이었다.
같은 사람이지만 상품의 설계가 달랐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없었기에 한 가수가 두 시장에서 서로 다른 얼굴로 존재하는 일이 가능했다. 일본 팬 중에는 그가 중화권 최고 스타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도 많았고, 중화권 팬 중에는 그가 일본 유선대상 3연패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안 경우도 있었다.
지금은 SNS등을 통해 일거수 일투족 모든 활동이 즉시 공유되어 그런 분리 운영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시장의 원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지역마다 요구하는 것이 다르고, 같은 가수라도 어느 면을 앞세울지는 달라져야 한다.
일본서 일본어를 노래 부른다는 것
일본 현지에서 일본어로 노래를 한다는 것은 일상 회화를 하는것과는 다르다.
일본어는 모라(mora) 단위의 박자 구조를 가지며, 장음·촉음·발음의 길이가 의미를 가른다.
억양도 지역과 어휘에 따라 달라진다. 회화에서는 조금 어색해도 넘어가지만, 노래에서는 한 음절의 길이가 틀어져도 청중이 알아챈다.
등려군은 이 문제를 발음 단위로 쪼개 접근했다.
광둥어 노래를 배울 때 썼던 방식과 같았다. 한 글자의 발음을 통째로 외우지 않고, 단계로 분해해 기록한 뒤 다시 조립했다. 한 소절의 발음이 완성될 때까지 밤을 새워 반복했다는 증언도 여러 곳에서 전해진다.
그 결과는 숫자보다 평가로 드러났다.
일본 평론가 후쿠즈미 데쓰야는 그를 “좋은 가수일 뿐만 아니라 좋은 여자”라고 평하며, 그의 노래를 아예 ‘덩리쥔 엔카’라고 불렀다. 외국인이 부르는 엔카가 아니라, 하나의 창법 계보로 인정한 것이다.
등려군은 1974년 12월 31일 시상식 무대에서 ‘공항’을 불렀다. 당시 일본 가요계에서 외국인 가수는 대개 ‘이국적인 손님’ 포지션에 머물렀다. 정규 경쟁 부문의 수상은 다른 차원의 인정을 한다는 뜻이었다. 사진은 일본활동 당시 모습 /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공항’으로 증명한 덩리쥔의 매력
‘공항’이 어떻게 일본에서 통했는지는 곡 자체에서 찾을 수 있다.
가사의 상황은 단순하다. 떠나는 사람을 공항에서 배웅하는 여자의 심경이다. 붙잡지 못하고, 울지도 못하고, 그저 보낸다.
1974년 일본에서 ‘공항’이라는 공간은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고도성장기를 지나 해외여행이 확대되던 시기였고, 공항은 이별과 새출발이 동시에 일어나는 장소였다. 동시대 일본인의 정서를 정확히 짚은 소재였다.
음악적으로는 절제가 핵심이었다. 감정이 고조되는 대목에서 목소리를 키우는 대신 오히려 눌렀다. 마이너 조성의 멜로디가 흐르는 동안 가수는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그 거리가 청중에게 감정의 여지를 남겼다.
이것이 등려군의 목소리와 맞아떨어졌다. 그는 음량으로 압도하는 가수가 아니라 미세한 조절로 감정을 만드는 가수였다. 첫 싱글이 실패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곡이 그 특성을 살리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있다.
해외 진출에서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여기 있다.
자국에서 통한 스타일을 그대로 가져가거나, 반대로 현지 유행 스타일을 그대로 복사한다. 둘 다 실패한다. 필요한 것은 ‘이 가수의 강점이 저 시장의 문법 안에서 어떻게 발현되는가’를 새로 계산하는 일이다.
‘우상’ 미소라 히바리와의 짧은 만남
일본 활동 중 등려군은 한 텔레비전 가요 프로그램에서 미소라 히바리를 만났다.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는 히바리의 무대 매너를 집중해서 지켜본 뒤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말 없이 눈빛을 나눴다. 짧지만 분명한 교감이었다.
1989년 미소라 히바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등려군은 큰 슬픔에 잠겨 히바리의 대표곡을 불러 추모했다. 6년 뒤 등려군도 세상을 떠났다.
한 나라 국민가수의 계보를 이웃 나라 가수가 이어받는 장면이다. 이것이 트로트와 엔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기도 하다. 두 장르는 서로를 배척하며 자라지 않았다. 서로를 들으며 자랐다.
‘일본 가요계의 일원’으로 인정받다
1970년대 일본레코드대상은 연말 일본 가요계 최대의 행사였다.
생중계 시청률이 40%를 넘나들었고, 수상 여부가 가수의 향후 몇 년을 결정하기도 했다. 신인상은 그해 데뷔한 가수 가운데 가장 유망한 이를 공인하는 상이었다.
등려군은 1974년 11월 19일 신인상 수상자로 발표됐고, 같은 해 12월 31일 시상식 무대에서 ‘공항’을 불렀다. 당시 일본 가요계에서 외국인 가수는 대개 ‘이국적인 손님’ 포지션에 머물렀다. 정규 경쟁 부문의 수상은 다른 차원의 인정을 한다는 뜻이었다.
이 상은 일본 가요계가 그를 ‘일본 가요계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이 인정이 10년 뒤 유선대상 3연패의 토대가 됐다.
중요한 것은 이 인정이 하루아침에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첫 싱글의 실패 후에도 일본에 머물렀다. 일본어로 생활했고, 일본 방송의 관행을 익혔고, 일본 가요계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었다.
한국 가수의 해외 활동이 ‘진출’이 아니라 ‘방문’에 머무는 이유가 여기 있다. 상을 받으려면 그 시장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데, 일원이 되려면 그곳에 있어야 한다.
등려군은 일본활동 당시 역시 일본서 활동중이던 조용필을 만났다 /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성공 뒤의 3년, 그리고 정점의 활약
1974년 신인상 이후 등려군의 일본 활동은 순항했다. ‘눈물의 조건(涙の条件)’ ‘밤의 승객(夜の乘客)’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일본 가요계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렇다고 그는 일본에만 매여 있지 않았다.
홍콩과 동남아 활동을 병행했고, 1976년에는 홍콩 리무대에서 첫 콘서트를 열었다. 1977년에는 중국어권 최대 히트곡 가운데 하나인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을 발표했다.
두 개의 커리어를 동시에 운영한 셈이다.
일본에서는 일본어로, 중화권에서는 표준중국어와 광둥어로. 두 시장의 팬들은 상당 기간 서로의 존재를 잘 몰랐다.
그리고 1979년, 모든 것이 한 번에 무너진다. 인도네시아 위조 여권 사건이었다. 다음 회에서 다룬다.
한국의 ‘도덕’ 선택, 대만의 ‘실용’선택
이 대목에서 한국 대중음악사와의 비교가 불가피하다.
1945년 이후 한국은 일본 대중문화를 공식적으로 차단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단계적 개방이 시작되기까지 반세기 넘게 일본 가요·영화·방송의 공식 유통이 금지됐다.
이 정책에는 역사적 이유가 있었다. 식민 지배의 기억이 생생했고, 문화적 종속에 대한 경계도 근거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한국 대중음악은 두 가지를 동시에 잃었다. 일본 시장에 대한 접근 경험과, 자기 장르의 계보를 정직하게 서술할 명확한 언어였다.
트로트는 오랫동안 ‘왜색 가요’라는 비판을 받았다.
2음계와 4분의 2박자, 특유의 꺾기가 일본 엔카에서 왔다는 주장이었다. 이 논쟁은 1960년대부터 반복됐고 지금도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문제는 이 논쟁이 트로트의 자기 인식을 위축시켰다는 점이다. 자기 뿌리를 부정하거나 방어해야 하는 장르는 바깥으로 나가기 어렵다. 설명할 언어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식민지배를 받았던 대만은 다른 길을 갔다.
50년 식민 지배의 결과로 일본 대중문화가 깊이 남았고, 대만 사회는 그것을 배척하는 대신 자기 것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등려군 세대는 일본 가요를 들으며 자랐고, 그 자산을 들고 일본 시장에 들어가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한국과 대만의 사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전략의 문제다.
한국은 도덕적 선택을 했고, 대만은 실용적 선택을 했다. 그 결과가 반세기 뒤 각각의 대중음악 지형에 남았다.
지금 트로트와 엔카의 유네스코 공동등재를 논하는 것은, 이 오래된 대립 구도를 다른 틀로 옮기려는 시도다. 누가 원조인가를 다투는 대신, 20세기 초 동아시아가 공유한 근대 대중가요의 두 갈래로 함께 설명하는 것이다.
단순 번역 아니라 현지화 해야 성공
등려군의 일본 진출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교훈은 언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언어가 아니라 ‘현지화’다.
번역은 같은 것을 다른 말로 옮기는 일이다. 현지화는 그 시장의 문법으로 다시 만드는 일이다.
등려군의 일본 활동곡은 대부분 일본 작곡가가 일본 청중을 위해 쓴 오리지널 곡이었다. 중국어 히트곡을 일본어로 번안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순서가 반대인 경우가 많았다.
1986년 일본에서 발표한 ‘도키노나가레니 미오마카세(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를 중국어로 옮긴 것이 ‘아지재호니(我只在乎你)’다.
한국 트로트의 해외 진출에서 흔히 보는 방식은 기존 히트곡에 현지어 가사를 붙이는 것이다. 이는 팬서비스로는 효과적이지만 현지 시장 진입 전략으로는 약하다. 현지 청중은 자기 언어로 자기 정서를 노래한 곡을 원하기 때문이다.
[트로트가 배워야 할 것]
해외 진출은 번역이 아니라 현지화다. 등려군의 일본 히트곡은 일본 작곡가가 일본 청중을 위해 쓴 오리지널이었다.
한국 히트곡에 일본어 가사를 얹은 곡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첫 싱글이 오리콘 75위로 실패한 뒤에도 철수하지 않고 곡의 방향을 바꿨다. 해외 진출의 성패는 첫 결과가 아니라, 첫 실패 뒤 4개월 동안 무엇을 하느냐로 갈린다.
[다음 회 예고]
제5회 ‘추락과 부활-여권 사건, 그리고 유선대상 3연패’. 1979년 위조 여권 사건으로 일본에서 강제 퇴거당한 뒤,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에 다녔다. 그리고 4년 뒤 일본에 돌아와 ‘쓰구나이’ ‘아이진’‘도키노나가레니 미오마카세’로 전일본유선방송대상 3년 연속 그랑프리를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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