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로트문화원·트롯뉴스 공동기획 ‘등려군 아시아를 노래하다’
[제2화] 음정하나 때문에 녹음분 전량폐기 하다
등려군(鄧麗君·덩리쥔·Teresa Teng)의 목소리에는 늘 ‘천상의 목소리’라는 찬사가 따라붙는다. 그 아름다움을 타고난 재능으로만 받아들이기 쉽지만,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의 증언은 그 목소리를 완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 수 있다.
등려군의 생애를 12년 동안 취재하며 200여 명을 인터뷰한 대만의 전기 작가 장제(姜捷)가 주목한 것도 재능보다 태도였다. 등려군 자신도 ‘독학으로 익힌 천재’라는 말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좋은 스승에게 기술과 기교를 제대로 배우고 싶어 했고, 평생 그 배움을 이어갔다.
이번 회에서는 등려군의 완벽주의가 배움과 연습, 무대에서 어떻게 드러났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살펴본다. ‘천상의 목소리’를 완성하기 위해 그는 무엇을 배우고, 어디까지 자신을 다듬었을까.
등려군(鄧麗君·Teresa Teng)의 목소리에는 늘 ‘천상의 목소리’라는 찬사가 따라붙는다. 그 아름다움을 타고난 재능으로만 받아들이기 쉽지만,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의 증언은 그 목소리를 완성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증언한다/사진=온라인 커뮤니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량 폐기
1984년, 등려군은 프로듀서 덩시취안(鄧錫泉)과 함께 광둥어 앨범 ‘풍상반아행(風霜伴我行)’을 준비하고 있었다. 덩시취안의 증언에서 등려군이 자신의 노래에 얼마나 엄격했는지가 드러난다.
등려군은 미국의 스튜디오를 오가며 어렵게 녹음을 마친 곡도 홍콩으로 돌아와 다시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때 작은 음정 오류나 어색한 대목이 들리면, 이미 완성한 녹음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불렀다. 공들여 끝낸 작업이라는 이유로 적당히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재녹음에는 대가가 따랐다. 스튜디오 대관료와 세션 연주자·엔지니어의 인건비는 물론, 항공료와 체류비까지 다시 들어갔다. 제작 일정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등려군은 그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이 만족할 수 있는 노래를 고집했다. 덩시취안에 따르면 이런 일은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다.
더한 사례도 전해진다. 녹음 중 음표 하나, 음정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정을 멈추고 런던으로 건너가 연습한 뒤 돌아와 다시 녹음했다는 것이다. 짧은 한 대목을 다듬기 위해 먼 길을 오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덩시취안은 그를 “대단한 지구력을 가진 슬로 스타터”라고 표현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끝내 자신이 원하는 수준에 도달하는 가수. 등려군의 완벽주의는 녹음을 마쳤다는 사실보다, 그 결과에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게 생각 하는 가수였다.
‘풍상반아행’ 제목에 담긴 판단
‘풍상반아행(風霜伴我行)’의 제작 과정은 등려군이 노래를 완성하는 데 무엇을 고려했는지 보여준다.
당초 제목은 ‘공존은 불가능해’였다. 프로듀서 덩시취안과 제작진이 곡의 내용에 맞춰 붙인 이름이었다. 뜻은 분명했지만, 관계의 단절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 등려군의 부드러운 이미지와 어울리는지는 다시 생각할 문제였다.
제작진은 제목을 ‘풍상반아행’으로 바꿨다. 비바람과 서리가 나의 길에 함께한다는 뜻으로, 삶의 시련을 문학적으로 담아낸 표현이다. 감정의 깊이를 살리면서도 등려군 특유의 서정성과 자연스럽게 맞닿는 이름이었다.
이 과정에서 눈여겨볼 것은 제목을 고르는 기준이다. 제작진은 가사의 내용을 잘 전달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노래가 등려군의 목소리와 이미지에 어떻게 어울릴지를 먼저 살폈다. 곡과 가수, 제목이 하나의 인상으로 이어지도록 조율한 것이다.
오늘날 트로트 제작에도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가사의 핵심 구절이나 화제성을 고려해 제목을 정하는 일은 자연스럽지만 이 노래가 가수에게 어떤 인상을 남기며, 앞으로 쌓아갈 아티스트의 음악 세계와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도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풍상반아행(風霜伴我行)’의 제작 과정은 등려군이 노래를 완성하는 데 무엇을 고려했는지 보여준다.당초 제목은 ‘공존은 불가능해’였다. 프로듀서 덩시취안과 제작진이 곡의 내용에 맞춰 붙인 이름이었다./사진=풍상반아행(風霜伴我行) 앨범 자켓
낯선 언어를 자신의 노래로 완성
등려군은 표준중국어를 모국어로 쓰고 어려서부터 대만어도 익혔지만, 광둥어는 새롭게 배워야 할 언어였다. 발음과 성조는 물론 어휘와 문법에도 차이가 있어, 소리를 듣고 따라 하는 것만으로는 자연스러운 노래를 하기에는 어려웠다. 특히 광둥어 대중가요가 활기를 띠던 1980년대 홍콩에서 현지 청중에게 노래를 들려주려면 매끄러운 발음까지 익혀야 했다.
그는 자신만의 발음 표기법을 만들어 이 과제에 접근했다. 한 글자의 소리를 통째로 외우기보다 입술 모양과 혀의 위치, 성조의 움직임을 나눠 기록하고, 이를 순서대로 연결하며 연습했다. 낯선 소리를 자신이 이해하고 반복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꾼 셈이다.
교정과 반복을 거치며 노력한 결과 광둥어는 점차 그의 노래 안에 자리 잡았다. 1980년 발표한 ‘망기타(忘記他)’는 등려군의 광둥어 가창을 대표하는 곡으로 남았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에서도 특유의 음색과 섬세한 감정 표현을 이어갈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철저한 준비가 있었다.
일본어를 익힐 때도 발음에 대한 엄격함은 이어졌다. 일본 진출 초기 그는 일상에서도 일본어를 쓰며 언어를 몸에 익혔다. 대화를 나누는 능력에 노래 속에서 말의 리듬과 정서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일이 중요했다.
일본 평론가 후쿠즈미 데쓰야가 그의 창법을 ‘덩리쥔 엔카’라고 부른 표현은 그 녀의 노력을 상징한다. 일본어 발음을 익히는 데서 출발해, 자신의 음색과 해석으로 그녀만의 엔카를 들려주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등려군에게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새로운 시장에 들어갈 준비이자, 그곳의 청중에게 노래의 감정을 온전히 전하는 과정이었다.
발음에 담긴 청중에 대한 배려
등려군이 왜 그토록 발음에 공을 들였는지 직접 설명한 기록은 많지 않다. 다만 그가 낯선 언어를 익히고 노래를 다듬어온 과정에서 그 의미를 확인해 볼 수 있다.
가수의 발음은 가사를 전달하는 기본이다. 말이 정확하게 들려야 노랫말의 뜻도 감정도 청중에게 온전히 닿는다. 다른 언어로 노래할 때는 여기에 한 가지 역할이 더해진다. 현지 청중과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다.
홍콩 청중에게 등려군은 대만에서 온 가수였다. 그러나 익숙한 광둥어의 발음과 리듬으로 노래를 들려줄 때, 청중은 그녀의 출신지보다 노래 속 이야기에 더 깊이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 자신의 언어로 섬세하게 표현된 감정은 낯선 가수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통로가 된것이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어의 소리와 억양을 세밀하게 익히는 일은 노래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바탕이었다. 일본레코드대상 신인상과 유선대상 3연패를 발음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언어를 충실히 익히려는 태도는 그가 현지 청중의 신뢰를 쌓는 데 힘이 됐을 것은 명확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등려군의 발음 연습은 청중을 향한 배려이기도 했다. 자신이 얼마나 애썼는지를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듣는 사람이 어색함 없이 노래에 몰입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 가수들의 해외 활동에서도 현지어로 노래하려는 시도는 반갑게 받아들여진다. 서툰 발음조차 팬들에게는 정성의 표시가 될 수 있다. 등려군의 사례는 그다음 단계를 생각하게 한다. 노력에 대한 호응을 넘어, 그 언어로 감정을 충분히 전달하려면 무엇을 더 익혀야 하는가. 그가 거듭 다듬은 발음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담겨 있다.
등려군은 일본어의 소리와 억양을 세밀하게 익히는 일은 노래의 정서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바탕이었다. 일본레코드대상 신인상과 유선대상 3연패를 발음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언어를 충실히 익히려는 태도는 그가 현지 청중의 신뢰를 쌓는 데 힘이 됐을 것은 명확하다./ 사진='열창 도쿄야경'앨범 자켓
애비로드에서도 이어진 배움
등려군은 비틀스를 좋아했다.
비틀스가 녹음했던 런던의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노래를 녹음하고 싶다는 바람도 오래동안 품고 있었다.
일본 측 담당자 니시다 유지가 스튜디오를 섭외하면서 그녀의 바람은 현실이 됐다. 당시 스태프는 비틀스가 사용했던 녹음실이 곧 개보수에 들어간다며, 등려군이 공사 전 그곳에서 녹음하는 마지막 가수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동경하던 공간에서 노래하게 된 순간에 뜻밖의 인연까지 더해진 것이다.
그러나 런던에서의 시간을 특별한 녹음 경험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그곳에 머물며 발음과 발성, 음역을 다듬고 오페라와 재즈를 공부했다. 이미 큰 성공을 거둔 뒤에도 새로운 음악을 배우는 끊임없는 학습의 생활을 이어갔다.
당시 그의 집을 찾은 사람의 묘사는 그 일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좁은 부엌에는 냄비와 프라이팬, 그릇과 조미료가 갖춰져 있었고, 서재에는 책과 공책, 사전, 문구류가 쌓여 있었다. 응접실 창가에는 주황색과 노란색 꽃이 놓여 있었으며, 그 옆에는 오렌지와 레몬이 있었다.
그는 아침을 직접 차려 먹고 수업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돌아오면 저녁을 짓고 예습과 복습을 했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 시간도 일과의 일부였다. 무대 위 화려한 모습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낯설 법한 풍경이다. 서른 안팎의 등려군은 부엌 딸린 집에서 생활을 꾸리며 자신의 음악을 다시 공부하고 있었다.
미국에 머물 때도 배움은 계속됐다. 광둥어 앨범을 녹음하던 시기에 그는 2년제 대학에 다니는 학생이기도 했다. 운동화와 청바지, 캔버스 가방 차림으로 강의실에 앉았다. 무대에서 유명한 가수였지만 그녀는 아직 배울 것이 많은 학생이었다.
목소리에 관한 두 가지 평가
등려군의 목소리를 설명하는 당대의 평가는 크게 두 갈래였다.
하나는 ‘하늘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라는 시적인 찬사였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음색, 자연스러운 강약과 리듬, 달콤하면서도 오래 들어도 질리지 않는 목소리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다른 하나는 그 아름다운 목소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분석이었다. 또렷한 발음,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노랫말의 정서를 전달하는 능력, 같은 곡에서도 새로운 뉘앙스를 끌어내는 섬세한 해석이 주목받았다.
전기 작가 장제는 등려군을 태양과 밝기를 다투지 않는 달에 비유했다. 자신의 매력을 강하게 드러내기보다 어둠 속에서 빛이 필요한 곳을 비추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그의 성품을 설명한 이 비유는 노래를 이해하는 데도 실마리가 된다.
등려군의 노래가 청중들의 귀를 붙드는 것은 강약의 미세한 변화와 호흡의 배치, 말끝에 남기는 여운이다. 어느 단어에 힘을 싣고 어디에서 숨을 고르는지, 한 소절을 얼마나 길게 머금었다가 놓는지에 따라 감정의 결이 달라졌다. 편안하게 들리는 노래 안에 세밀한 조절이 숨어 있었다.
이런 표현력은 경험과 해석이 쌓이면서 깊어질 수 있다. 등려군은 마흔둘에 세상을 떠났기에 이후 그의 목소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다듬어온 목소리에는 세월과 함께 더욱 풍부해질 가능성이 담겨 있었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는 현지 노래의 표현 방식도 익혔다. 엔카의 코부시라 불리는 선율의 꺾음과 비브라토, 일본어 특유의 억양과 말의 흐름을 자신의 노래에 접목했다. 어린 시절부터 즐겨 들었던 미소라 히바리의 노래도 이러한 배움의 바탕이 됐다.
그는 언어와 곡의 성격에 따라 표현을 달리했다. 중국어 노래의 서정성과 일본 노래의 정서를 각각 살리면서도 자신의 음색을 유지했다. 여러 시장에서 사랑받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처럼 서로 다른 음악의 문법을 익히고 소화하는 능력이 있었다.
하루 여섯시간, 무대 전체 다듬다
등려군이 공을 들인 것은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관객에게 보여줄 무대 역시 치밀하게 준비했다.
미국 체류 시절에는 레인보 커넥션 스튜디오와 계약하고 무용가 브루스 히스에게 현대무용을 배웠다. 기본 스트레칭부터 곡별 안무를 점검하는 리허설까지, 하루 여섯 시간을 연습에 쏟았다고 한다. 노래와 몸의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반복해서 맞춰가는 시간이었다.
무대 의상은 할리우드 스타들의 옷을 제작하던 디자이너 빌 휘튼에게 맡겼다. 다섯 벌을 만드는 데 30만 홍콩달러가 들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의상뿐 아니라 댄서와 코러스의 옷, 헤어스타일까지 살피며 무대 전체의 조화를 맞췄다.
함께 일한 미국 제작진 칼 슈뢰더는 등려군을 자신이 만난 스타 가운데 일에 매우 진지하고 기준이 엄격하면서도,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기억했다.
그녀의 엄격함은 모든 공연에서 준비의 수준을 높였고, 친절함은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탱했다. 당시 등려군은 아직 서른이 되기 전이었다.
등려군이 공을 들인 것은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관객에게 보여줄 무대 역시 치밀하게 준비했다.미국 체류 시절에는 기본 스트레칭부터 곡별 안무를 점검하는 리허설까지, 하루 여섯 시간을 연습에 쏟았다고 한다/사진=온라인 커뮤니티
배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등려군의 완벽주의를 이해하려면 배움에 대한 태도도 함께 봐야 한다. 그는 이미 큰 성공을 거둔 뒤에도 새로운 스승을 찾아 다녔다. 익숙하지 않은 장르를 만나거나 다른 표현이 필요할 때면 조언을 구하고 자신의 방식이 옳은지를 다시 점검했다.
런던에서는 발음과 발성, 음역을 다듬는 훈련을 받으며 오페라와 재즈로 관심을 넓혔다. 미국에서는 대학에 다니고 무용을 배웠다.
스승이었던 선즈(愼芝)와 관화스(關華石) 부부가 그를 겸손하고 가르치고 싶은 훌륭한 학생으로 기억한 것도 이런 태도와 맞닿아 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에는 엄격했지만, 그 결과에 이르는 방법은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배웠다.
그 배움에 대한 열정은 레퍼토리의 확장으로 이어졌다. 황매조에서 출발한 그의 음악은 중국어 대중가요와 일본 엔카, 광둥어 칸토팝으로 넓어졌다. 당시와 송사에 곡을 붙인 작품은 물론 영어와 이탈리아어 노래까지 소화했다. 언어가 바뀔 때마다 발음을 익혔고, 장르가 달라질 때마다 새로운 표현을 배웠다.
폭넓은 레퍼토리는 가수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준다. 유행과 활동 무대가 달라져도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줄 음악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등려군이 쌓아온 배움은 한 곡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그치지 않았다. 다음 곡, 다음 언어, 다음 무대로 나아갈 기반이 됐다.
완벽주의가 남긴 빛과 그늘
등려군이 자신에게 그토록 엄격했던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단서는 어머니 자오쑤구이의 회고에 있다.
어머니에게 딸의 성공은 기쁨인 동시에 걱정이었다. 등려군은 이름이 알려지고 팬들의 기대가 커질수록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더 걱정했다. 스스로 세운 높은 기준은 큰 부담이었고, 누구도 그 부담을 대신 덜어줄 수 없었다. 어느 순간에는 “이 정도면 됐다”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지만, 딸은 좀처럼 자신에게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완성도에 집착하는 태도가 그 자신에게는 고통이 되기도 했다. 등려군은 198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줄였고, 마흔둘에 세상을 떠났다. 이를 완벽주의의 결과로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어머니의 증언은 우리가 사랑하는 목소리 뒤에 당사자가 감당해야 했던 엄청난 부담도 있었음을 알수 있게 해준다.
그의 작업 방식에서 배울 점과 그가 치른 대가는 함께 살펴야 한다. 오늘까지 사랑받는 노래에는 거듭 듣고 고쳐 부른 시간이 담겨 있다. 그 성취를 기억하는 일과 자신을 끝없이 몰아붙이는 태도를 권하는 일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
등려군은 1980년대 후반부터 활동을 줄였고, 마흔둘에 세상을 떠났다. 이를 완벽주의의 결과로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어머니의 증언은 우리가 사랑하는 목소리 뒤에 당사자가 감당해야 했던 엄청난 부담도 있었음을 알수 있게 해준다 사진은 등려군 동상 /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미공개 음원, 제작진이 지킨 원칙
등려군이 세상을 떠난 뒤, 그가 남긴 미공개 음원을 정리하던 제작진도 비슷한 질문과 마주했다. 이 목소리를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들려줘야 하는가.
작업을 맡은 프로듀서 리샤우취안이 가장 고민한 것은 기술보다 태도였다. 자신에게 엄격했던 가수의 녹음을 다루면서도, 정작 그에게 의견을 묻거나 다시 불러달라고 요청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었다. 생전이라면 마지막까지 거듭해서 확인했을 결과물을 제작진이 대신 판단해야 했다.
그들이 택한 원칙은 남겨진 목소리를 최대한 그대로 살리는 것이었다. 전해지는 제작 과정에 따르면 보컬에는 편집이나 수정을 가하지 않았고, 헤드폰에서 새어 들어간 소리도 남겼다. 녹음 당시의 간이 반주를 정식 연주로 바꾸되, 등려군이 부른 흔적은 보존했다.
서양 곡을 완성할 때는 여러 나라의 음악가가 참여했다. 생전에 다양한 나라의 음악가들과 협업하고 싶어 했던 그의 뜻을 고려한 것이다. 싱가포르의 기타리스트, 말레이시아의 베이시스트, 호주의 코러스가 연주와 화음을 보탰고, 믹싱은 생전 그의 앨범을 담당했던 일본 엔지니어에게 맡겼다.
이 작업은 등려군의 완벽주의를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었다. 대신 제작진이 그 기준을 얼마나 무겁게 받아들였는지 보여준다. 남겨진 목소리를 존중하면서, 그가 들었어도 납득할 만한 음악을 만들려는 고민이었다.
기술이 대신할 수 없는 판단
오늘날의 음반 제작 환경은 등려군이 활동하던 시절과 크게 달라졌다. 음정을 보정하고 여러 번의 녹음을 조합하는 기술은 제작의 가능성을 넓혔다. 그러나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곡을 완성하는 마지막 판단까지 대신해주지는 않는다.
등려군이 재녹음으로 다듬으려 했던 것도 음정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발음과 호흡, 감정의 흐름까지 살피며 청중에게 들려줄 노래를 골랐다. 소리가 정확한지와 노래가 마음에 닿는지는 서로 연결돼 있으면서도 다른 문제다.
방송과 행사, 발매 일정이 촘촘하게 이어지는 제작 현장에서는 충분히 듣고 수정할 시간을 확보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제작 기간이 길수록 좋은 노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짧은 시간에 완성한 명곡도 있고, 오래 공들여도 아쉬움이 남는 곡도 있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무엇을 기준으로 완성을 판단하느냐다.
일정에 맞춰 내놓을 수 있는가. 가수의 장점을 충분히 담았는가. 반복해서 들어도 감정이 살아 있는가. 등려군의 작업 과정은 이런 질문을 끝까지 놓지 않는 태도의 가치를 보여준다.
[트로트가 배워야 할 것]
등려군이 ‘10년 뒤에도 들을 노래’를 명시적인 기준으로 삼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녹음이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지금, 그가 한 곡의 완성에 들인 시간과 열정과 판단을 돌아볼 이유는 충분하다.
이미 비용을 들였다는 이유로 아쉬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필요하다면 다시 부르거나 발표를 미루는 선택.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제작 환경과 책임이 오늘의 트로트에도 필요하다.
오래 남는 노래는 발표한 곡의 수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떤 곡을 세상에 내놓고, 어떤 녹음은 더 다듬을지 판단하는 과정에서 가수의 음악 세계가 켜켜이 쌓인다. 등려군이 남긴 것은 아름다운 목소리와 함께, 그 목소리를 청중에게 들려주기 전까지 기울였던 끝없는 정성이었다.
[다음 회 예고]
제3회 '홍콩, 중화권의 관문을 열다'. 열여덟 살에 최연소 '자선여왕'이 되고, 1972년 첫 팬클럽이 결성되며, 홍콩 콜리세움을 6회 연속 매진시키기까지. 한 시장을 완전히 장악한 뒤 다음 시장으로 이동하는 '교두보 전략'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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