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로트문화원·트롯뉴스 공동기획 ‘등려군 아시아를 노래하다’
[제3화] 홍콩과 중화권의 관문을 열다
1969년, 등려군(鄧麗君·덩리쥔·Teresa Teng)은 대만에서 이미 이름을 알린 스타였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가 하면 드라마 주제가를 불렀으며, 언론은 이듬해를 ‘등려군의 해’로 예고까지했다.
인기가 한창 높아지던 그때, 그는 홍콩으로 활동 반경을 넓혔다. 대만에서 다진 기반 위에 더 넓은 무대로 진출할 길을 찾은 것이다. 훗날 아시아 각지에서 사랑받게 될 그의 여정에서 홍콩은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작지만 강했던 홍콩 유통망
1970년대 초 홍콩의 인구는 400만 명 안팎이었다. 도시의 규모만으로는 이곳이 중화권 대중문화에서 차지한 비중을 설명하기 어렵다. 홍콩의 힘은 자본과 제작 역량, 그리고 바다 건너 여러 지역을 연결하는 글로벌 유통망에 있었다.
영국령 자유항이었던 홍콩에는 상업과 선진화된 금융을 통해 각지에서 자본이 모였다. 영화와 음반, 공연 산업도 그 토대 위에서 성장했다. 쇼브라더스와 골든하베스트 같은 영화사들이 아시아 각지로 작품을 배급하면서, 홍콩에서 만든 대중문화가 해외 관객을 만나는 길도 넓어졌다.
정치적 환경도 달랐다. 대만은 계엄 체제 아래 있었고, 중국 본토는 문화대혁명의 진통을 겪고 있었다. 홍콩 역시 검열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지만, 중국어권의 상업 대중문화가 비교적 활발하게 제작되고 유통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주요 시장은 동남아시아의 화교 사회였다. 많은 화교들이 경제를 장악하고 있던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비롯해 태국·인도네시아·필리핀 등지에는 중국어 노래와 영화를 소비하는 관객이 있었다. 지역마다 언어와 생활환경은 달랐지만, 홍콩의 제작·배급망은 흩어진 청중을 연결했다. 가수에게 홍콩에서의 활동은 여러 나라의 공연장과 음반 시장으로 진출할 기회의 땅 이었다.
언어가 공존하는 환경도 중요했다. 일상에서는 광둥어가 널리 쓰였지만, 표준중국어 영화와 노래 역시 상당한 청중을 확보하고 있었다. 표준중국어로 노래하던 등려군에게는 기존의 강점을 살리면서 새로운 언어권과 만날 수 있는 무대였다.
1969년, 등려군(鄧麗君·덩리쥔·Teresa Teng)은 대만에서 이미 이름을 알린 스타였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진행하는가 하면 드라마 주제가를 불렀으며, 언론은 이듬해를 ‘등려군의 해’로 예고까지했다.인기가 한창 높아지던 그때, 그는 홍콩으로 활동 반경을 넓혔다.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팬 찾아 홍콩 동남아시아로
이런 조건을 놓고 보면 등려군이 홍콩 진출을 서둘렀던 의미가 명확해진다. 대만에서 얻은 인기를 다른 도시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지역의 청중을 만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선택이었다.
홍콩의 음반과 영화, 방송과 공연은 서로 맞물려 움직였다. 방송에서 얼굴을 알리고, 음반으로 목소리를 전파하고, 해외 공연으로 관객을 직접 만나는 활동이 이어질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등려군의 친근한 이미지와 감미롭고 서정적인 노래는 홍콩의 시스템을 통해 더 넓은 청중에게 전해졌다.
그는 1970년대 홍콩에서 활동하며 싱가포르·말레이시아·태국 등 주변아시아권으로 공연 무대를 넓혀갔다. 음반과 방송으로 익숙해진 목소리를 공연장에서 직접 들려주면서 지역을 넘어 다양한 팬층을 쌓는 바탕이 됐다.
등려군이 처음부터 이 모든 가능성을 치밀하게 계산하고 움직였다고는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후의 행보는 홍콩 진출의 효과를 보여준다. 대만에서 출발한 가수가 국경을 넘어 중국어권 청중을 만나는 과정에서, 홍콩은 무대와 사람, 시장을 연결하는 관문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열여덟 살, 홍콩 ‘자선여왕’ 칭호
등려군이 홍콩에서 대중과 가까워지는 데에는 자선 활동도 큰 역할을 했다.
1971년, 그는 백화유(白花油) 자선 행사에서 ‘자선여왕(慈善皇后)’ 칭호를 받았다. 당시 열여덟 살로 역대 최연소였다. 대만에서 건너온 젊은 가수가 노래뿐 아니라 나눔을 통해서도 홍콩 사회에 이름을 알린 계기였다.
당시 자선 행사는 연예인과 지역 유력 인사, 언론과 방송이 한자리에 모이는 무대이기도 했다. 등려군은 이 자리에서 더 많은 사람을 만났고, 친근하고 따뜻한 이미지를 쌓았다.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둔 행보였을까. 처음의 동기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는 홍콩에서 인기를 얻은 뒤에도 자선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다. 대중과 가까워지는 계기가 됐던 나눔은 그의 삶과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됐다.
팬들은 그 꾸준함에서 진정성을 읽었고, 응원을 넘어 자신들도 나눔에 동참했다.
홍콩팬들이 자발적 팬클럽 만들다
1972년 6월 1일 드디어 홍콩에서 등려군의 첫 팬클럽 ‘청려지우회(靑麗之友會)’가 결성됐다. 회장은 장옌링(張艶玲)이었다.
팬클럽 탄생의 시발점은 텔레비전 인터뷰였다. 화면 속 등려군의 꾸밈없는 모습에 호감을 느낀 팬 50~60명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청려’는 푸른 산을 뜻하는 ‘청(靑)’과 등려군의 ‘려(麗)’를 합친 이름이었다.
회원들은 등려군의 홍콩 방문에 맞춰 모임을 열고 식사를 함께했다. 영화관이나 공연장으로 이동할 때면 곁을 지키며 그를 보호하기도 했다.
등려군 역시 팬들 사이에서 또래 친구처럼 소탈하게 어울렸다고 알려져 있다. 무대 위 가수와 객석의 관객으로 만난 관계가 일상을 나누는 사이로 가까워진 것이다.
모임은 함께 나누는 활동으로도 이어졌다. 팬클럽 수익을 자선에 쓰며, 좋아하는 가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경험을 쌓았다. 등려군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회원들이 모임을 이어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공동의 기억과 활동이 있었다.
그의 노래를 추억하는 일에 더해, 함께할 일이 남아 있었던 셈이다.
1972년 6월 1일 드디어 홍콩에서 등려군의 첫 팬클럽 ‘청려지우회(靑麗之友會)’가 결성됐다. 회장은 장옌링(張艶玲)이었다.팬클럽 탄생의 시발점은 텔레비전 인터뷰였다. 화면 속 등려군의 꾸밈없는 모습에 호감을 느낀 팬 50~60명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청려’는 푸른 산을 뜻하는 ‘청(靑)’과 등려군의 ‘려(麗)’를 합친 이름이었다./사진=온라인 커뮤니티
등려군 사후에도 활동하는 팬덤
등려군의 사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청려지우회의 오랜 역사를 한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출발과 활동에서는 팬덤을 오래 이어주는 몇 가지 조건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팬들의 자발성이다. 좋아하는 마음으로 직접 모임을 만들고 운영했기에, 회원들은 활동의 방향도 스스로 정할 수 있었다. 가수의 새로운 음반이나 공연 일정이 없어도 모임을 이어갈 여지가 있었다.
둘째는 함께 실천할 일이있었다. 자선 활동은 팬들에게 정기적으로 만나고 협력할 이유를 줬다. 등려군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다른 사람을 돕는 경험으로 확장되면서, 모임 자체에도 의미가 쌓였던 것이다.
셋째는 세대를 잇는 개방성이다. 오랫동안 활동한 회원과 뒤늦게 그의 노래를 접한 팬이 함께할 수 있어야 기억도 이어진다. 생전의 모습을 아는 이들이 경험을 전하고, 새로운 팬들이 자신의 방식으로 참여할 때 팬클럽은 추억을 보관하는 데서 더 나아갈 수 있다.
등려군의 다른 지역 팬클럽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싱가포르 팬클럽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넉 달 뒤인 1995년 9월 결성됐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넘어 영국과 호주 등지의 팬들이 참여했고, 생일 기념 모임과 고아원·양로원 방문 같은 공익 활동을 이어왔다. 가수의 부재 속에서도 새로운 모임이 생겨난 것이다.
1979년 만들어진 말레이시아 팬클럽 회원들에게는 치앙마이 방문과 추모 모임이 등려군을 기억하는 방식이 됐다. 서로 다른 지역의 팬들은 노래와 추모, 봉사를 통해 관계를 이어갔다.
한국의 트로트 팬덤 역시 자발적인 기부와 봉사, 지역 모임을 통해 활동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등려군 팬클럽의 역사는 그 움직임을 더 긴 시간 속에서 바라보게 한다. 가수의 활동이 줄거나 멈춘 뒤에도 팬들이 함께할 이유를 어떻게 남길 것인가.
오래가는 팬덤에는 함께 쌓은 기억과 스스로 이어갈 일이 있다. 등려군을 향한 애정은 노래를 듣는 순간을 넘어 사람과 사람을 연결했고, 그 관계가 다시 그의 이름을 오래 기억하게 했던 것이다.
리무대에서 콜리세움까지 석권
1975년 등려군은 홍콩 폴리도르와 손잡았다. 이 시기 시작된 ‘도국정가(島國情歌)’시리즈는 그의 목소리를 중화권 청중에게 널리 전하며 대표적인 음반 시리즈로 자리 잡았다.
음반의 인기는 공연으로 이어졌다. 1976년 홍콩 리무대(利舞臺, 리무대는 홍콩 캐즈웨이베이 지역의 전통적 극장으로 1991년 철거됨)에서 콘서트를 열었고, 1982년에는 퀸엘리자베스 스타디움 무대에 섰다. 이듬해에는 홍콩 콜리세움에서 데뷔 15주년 기념 공연을 여섯 차례 이어갔다. 당시 홍콩 콜리세움(Hong Kong Coliseum, 홍콩체육관) 무대에 오른다는 것은 중화권 아티스트가 당대 최정상 입지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약 12,500석 규모를 채우는 것은 물론, 며칠 연속으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할 수 있는 전석 매진 능력이 입증되어야 대관이 가능하다. 장국영(Leslie Cheung), 매염방(Anita Mui), 알란 탐(Alan Tam), 사대천왕(유덕화, 장학우, 여명, 곽부성) 등 중화권 대중문화의 거장들이 공연 기록을 세우며 전설적 무대를 남긴 장소다.
등려군에게 홍콩은 이제 해외 공연을 위해 잠시 들르는 도시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대형 무대를 채우는 주활동 무대로 바뀌어 있었다.
그 사이 현지 청중과 만나는 접점도 넓어졌다. 1980년 발표한 첫 광둥어 앨범의 수록곡 ‘망기타(忘記他)’는 그녀의 대표적인 광둥어 곡이 됐다. 표준중국어 노래로 인기를 얻은 가수가 홍콩 청중의 일상 언어로도 오래 기억될 노래를 남긴 것이다.
등려군의 홍콩 안착은 음반과 공연, 언어와 대중적 관계가 함께 쌓인 결과였다. 자선 행사에서 얼굴을 알리고, 팬들과 교류하고, 현지 제작진과 음반을 만들며 활동의 기반을 다졌다. ‘대만에서 온 가수’라는 출신 배경 위에 홍콩 대중문화의 한 시대를 함께한 가수라는 평가가 더해졌다.
등려군은 1976년 홍콩 리무대(利舞臺, 리무대는 홍콩 캐즈웨이베이 지역의 전통적 극장으로 1991년 철거됨)에서 콘서트를 열었고, 1982년에는 퀸엘리자베스 스타디움 무대에 섰다. 이듬해에는 홍콩 콜리세움에서 데뷔 15주년 기념 공연을 여섯 차례 이어갔다.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화교 공동체 타고 노래 알려지다
홍콩에서 만들어진 노래는 바다 건너 동남아시아로 퍼졌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를 비롯한 동남아 각지에는 중국어 노래와 영화, 방송을 소비하는 화교 공동체가 있었다. 지역마다 언어와 문화, 매체 환경은 달랐지만 홍콩의 음반·영화 배급망은 이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등려군은 그 유통망을 통해 알려진 목소리를 직접 공연장으로 가져갔다.
싱가포르·말레이시아·태국 등을 오가며 청중을 만났고, 한동안 싱가포르에 거처를 두기도 했다. 인도네시아어로 녹음한 노래도 있었다. 음반으로 시작된 친숙함을 현지 활동으로 이어간 것이다.
타지에서 살고 있는 화교에게 중국어 노래는 오락이면서 추억의 기억을 나누는 매개이기도 했다. 서로 다른 나라에 살더라도 익숙한 말로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는 목소리에서 공통의 정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등려군의 부드러운 발음과 친밀한 감정 표현은 그 접점을 넓혔다.
그렇다고 동남아시아의 인기가 홍콩에서 자동으로 따라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등려군은 순회공연과 현지 활동으로 길을 다졌다. 홍콩이라는 거점의 효용은 여러 시장을 연결하는 기반을 활용하면서 탄탄한 유통망을 통해 청중과의 관계를 넓혀갈 수 있었다.
거점을 다지며 새로운 무대로
등려군은 대만에서 인기를 얻은 뒤 홍콩과 동남아시아로 무대를 넓혔고, 그 과정에서 일본 진출도 준비했다. 그런 과정에서 여러 지역의 활동은 상당 기간 겹쳐 있었다.
한 시장을 완전히 장악한 뒤 다음 시장으로 옮겼다기보다는, 기반을 다지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무대를 갈망하고 도전했다.
홍콩에서 쌓은 음반과 공연 경력, 제작진과의 관계, 동남아시아의 팬층은 새로운 도전의 버팀목이 됐다. 일본에서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언어와 가창법을 익히고 신인으로 출발해야 했지만, 다른 지역에서 이어온 활동까지 처음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었다.
1979년 불미스런 여권 사건으로 일본 활동이 중단됐을 때도 홍콩과 동남아시아에는 그의 노래를 기다리는 청중이 있었다. 여러 지역에 쌓아둔 기반은 한 시장에서의 위기가 음악 활동 전체의 중단으로 번지는 것을 막아주는 힘이 됐다.
이 경험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시장을 넓히는 속도보다 관계를 쌓는 방식이다.
등려군은 각 지역에서 음반을 내고 공연하는 데 더해 언어를 익히고, 현지 제작진과 협업하고, 팬들과 만났다. 해외 활동이 쌓일수록 다음 무대로 나아갈 발판도 단단해졌다.
공연 기다리는 진짜 팬 만들어야
등려군의 성과를 설명할 때는 대형 공연의 관객 수와 음반 판매량, 플래티넘 인증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다만 오래된 판매 기록은 집계 지역과 기간, 출하량과 실판매량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정식 음반과 복제 음원의 유통 규모를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기도 어렵다.
수치의 범위를 구분하더라도 홍콩에서 이룬 성취의 흐름은 분명하다.
‘도국정가’ 시리즈로 대표되는 음반 활동, 광둥어 노래의 성공, 리무대에서 콜리세움으로 이어진 공연이 서로 맞물렸다. 홍콩에서 쌓은 인지도는 동남아시아의 청중을 만나는 데 힘이 됐고, 그곳에서 얻은 지지는 다시 그의 활동 기반을 넓혔다.
오늘의 트로트가 참고할 대목도 여기에 있다. 해외 공연 한 번의 흥행을 넘어, 다음 음반과 다음 공연을 기다리는 진짜 팬층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현지에서 함께 일할 제작진과 유통망, 팬들과의 지속적인 접점을 어떻게 쌓을 것인가.
등려군에게 홍콩은 그 답을 만들어간 도시였다. 대만에서 출발한 목소리가 여러 나라의 일상으로 들어가는 길목이었고, 새로운 무대에 도전할 때 돌아와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기반이었다.
등려군이 홍콩에서 쌓은 인지도는 동남아시아의 청중을 만나는 데 힘이 됐고, 그곳에서 얻은 지지는 다시 그의 활동 기반을 넓혔다./사진=온라인 커뮤니티
현지팬들과 지속적인 교류 중요
등려군의 활동은 한국 트로트의 해외 진출 방법에도 의미있는 질문을 던진다.
해외 공연을 마친 뒤, 그곳에 무엇이 남는가.
교민 관객을 만나는 순회공연은 중요한 출발점이다. 익숙한 노래로 고향의 정서를 나누고 해외 수요를 확인할 수 있다. 그 경험을 현지 관객으로 넓혀가려면 공연 사이의 시간을 채울 활동도 필요하다. 현지 제작진과의 협업, 꾸준한 음원 발매, 방송과 매체 출연, 팬들과의 지속적인 교류가 다음 공연의 기반이 된다.
등려군의 일본 활동에서도 이런 준비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일본어로 생활하며 언어를 익혔고, 현지 방송과 음반 제작의 관행을 배웠다. 첫 음반부터 기대한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었지만, 다음 곡을 준비하고 무대에 서며 청중과의 접점을 넓혔다.
해외에 뿌리내렸는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국적을 잊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현지 청중이 그의 노래를 자신의 일상 속 음악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활동을 기다리는가가 더 중요하다. 등려군은 일본과 홍콩에서 그런 관계를 오랜 시간 쌓았다.
K-트로트에도 공연의 성과를 지속적인 활동으로 연결하는 설계가 필요하다. 일회성 객석채우는데 급급하지 말고 다시 찾아갈 이유와 다시 듣고 싶은 노래를 남겨야 한다.
인기가수도 늘 새로움이 필요하다
1980년 등려군이 첫 광둥어 앨범을 발표한 선택도 이 맥락에서 돌아볼 만하다.
그는 이미 표준중국어 노래로 홍콩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방식으로도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굳이 광둥어를 익혀 새로운 음반을 준비했다. 현재의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현지 청중에게 다가가는 폭을 넓힌 것이다.
당시는 홍콩의 음악 시장도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19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쉬관제(許冠傑), 뤄원(羅文) 등의 활약과 함께 광둥어 대중가요인 ‘칸토팝(칸토팝(Cantopop)은 광둥어로 부르는 대중음악을 뜻하는데 ‘광둥어(Cantonese)’와 ‘대중음악(Pop)’을 합친 말로, 주로 홍콩에서 발전했다)이 성장했다. 일상에서 쓰는 말로 자신들의 삶과 감정을 노래하는 음악에 홍콩 청중의 호응이 커졌다.
등려군이 광둥어로 노래한 선택은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었다. 그가 변화의 방향을 어디까지 의식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광둥어 앨범은 홍콩 청중이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언어로 그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계기가 됐다.
대표곡 ‘망기타(忘記他)’는 그 성과를 보여준다. 서툰 새로운 언어의 발음과 정서를 익히면서도 자신의 음색을 살린 노래는 등려군의 광둥어 가창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았다.
이 선택이 주는 시사점은 단순한 외국어 학습을 넘어선다. 청중의 취향과 음악을 듣는 환경이 달라지는 만큼 가수 역시 자신의 표현을 넓혀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트로트에도 필요한 질문이다. 지금의 팬들과 관계를 이어가면서 새로운 세대와는 어떤 음악으로 만날 것인가. 해외 청중에게는 어떤 언어와 이야기로 다가갈 것인가. 등려군이 광둥어를 배운 과정은 이미 사랑받는 가수에게도 늘 새로운 배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홍콩이 등려군에게 남긴 것
홍콩은 등려군에게 해외 활동의 거점이자 삶의 공간이었다.
스탠리에 있던 그의 집은 사후에도 팬들이 기억하는 장소로 남았고, 마담투소 홍콩에 마련된 밀랍인형은 그와 이 도시의 인연을 전한다.
그는 홍콩에서 음반을 만들고 공연했으며, 새로운 언어로 노래하고 팬들과 관계를 쌓았다. 그 경험은 동남아시아의 청중을 만나는 길로 이어졌고, 다른 시장에 도전할 때도 버팀목이 됐다.
홍콩에서 등려군이 얻은 것은 더 넓은 시장과 함께 오래 이어질 관계였다. 대만에서 건너온 젊은 가수의 목소리가 도시의 일상과 기억에 스며들었고, 그 기억은 그가 떠난 뒤에도 남았다.
트로트가 해외진출 하려면
해외 진출의 단위는 ‘공연’을 넘어 ‘시장’이어야 한다.
등려군은 현지어를 배우고, 현지 음반사와 협업하고, 자선 행사에 참여하고, 팬들과 식사를 나누며 활동의 기반을 다졌다. 그렇게 쌓은 관계는 새로운 무대에 도전할 때도 버팀목이 됐다. 여러 나라에서 한 번씩 공연하는 것만큼, 한 나라에서 다음 노래를 기다리는 청중을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해외 진출의 성과는 방문한 나라의 수보다, 떠난 뒤에도 남아 있는 관계의 연속성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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