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래 그 사연] ‘방미’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 금지곡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지우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려 살아남은 노래
양희수 기자 soo142@naver.com
등록 2026-02-04 14:44
원곡은 심수봉 작사, 작곡, 노래한 <순자의 가을>
또 한 번 심수봉의 활동을 제약한 노래
작사, 작곡, 가수, 제목 모두 바꿔 살아남은 명곡
매년 가을이면 어김없이 라디오와 거리 곳곳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방미의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는 1983년 발표된 그의 6집 앨범 타이틀곡이다. 앨범의 앞면 1번 트랙에 실린 이 곡은 발표 직후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같은 해 11월 20일부터 KBS 「가요톱10」에서 5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방미는 이 노래로 그해 MBC ‘10대 가수’에 선정되며 전성기를 맞는다.
방미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수록 6집 앨범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는 가을 특유의 쓸쓸함과 떠나간 연인을 향한 그리움, 외로움과 상실감을 담담하면서도 진솔하게 풀어낸 노래다. 당시 스물세 살이던 방미는 앳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예쁜 미모와 대비되는 허스키한 음색으로 이 곡을 애절하게 불러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결과 이 노래는 가을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계절의 노래’로 자리 잡으며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
10·26 이후, 다시 무대에 오른 심수봉
그러나 이 가볍고 담담한 가을 노래에는 대중이 미처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출발점이 있다.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의 원곡은 심수봉이 작사·작곡하고 직접 부른 〈순자의 가을〉로, 1979년 KBS 라디오 드라마 「여인극장 – 순자의 가을」의 주제가로 사용된 곡이다.
1978년 대학가요제를 통해 단숨에 주목받은 심수봉은 이듬해 10·26 사건의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활동 금지를 당하며 무대에서 사라진다. 이후 1980년 6월,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의 주제가를 담은 음반으로 재기를 시도했고, 이 음반에는 영화 주제가 3곡과 함께 〈순자의 가을〉도 수록돼 있었다.
영화 출연과 주제가 참여는 큰 화제를 모았고, 작품은 5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한다. 홍콩 수출로까지 이어지며 심수봉의 재기는 순조로워 보였다. 그러나 상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0년 6월 17일 '순자의 가을'수록된 심수봉 앨범
제5공화국 출범 이후 〈순자의 가을〉은 방송 금지 처분을 받는다. 제목에 등장하는 ‘순자’라는 이름이 당시 대통령 부인의 이름과 같다는 이유였다. 정치적 메시지도, 비판도 없었지만, 노래는 금지됐고, 심수봉의 방송 출연 역시 다시 막혔다.
음반사는 제목을 〈사랑의 가을〉로 바꾸거나 라벨만 수정하는 등 여러 방법을 시도했지만, 심수봉의 이름으로는 어떤 노래도 심의를 통과할 수 없었다. 결국, 선택된 방식은 곡을 다른 가수의 이름으로 다시 발표하는 것이었다. 제목은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로 바뀌었고, 작사·작곡 또한 서판석·심미경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표기됐다.
사진=KBS '불후의 명곡'
그리고 1983년, 이 노래는 방미의 6집 타이틀곡으로 세상에 나온다. 편곡은 이정선이 맡았고, 코러스와 피아노에는 심수봉이 참여했지만, 그의 이름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노래는 그렇게 원작자의 흔적을 지운 채 완전히 ‘익명’이 된다. 다만 도입부에서 방미가 아닌 또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그것이 심수봉이다.
한국 대중가요사에는 이처럼 히트곡의 주인이 바뀐 사례가 적지 않다. 그 이면에는 검열과 금지, 정치적 상황, 그리고 음반 산업의 계산이 겹쳐 있다. 〈순자의 가을〉은 그 모든 조건이 교차한 자리에서 태어난 노래였다.
그러면 왜 ‘방미’였을까?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방미는 1978년 MBC 공채 2기 코미디언으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1980년 영국 밴드 이럽션(Eruption)의 〈One Way Ticket〉을 번안한 〈날 보러와요〉가 큰 인기를 얻으며 가수로 전향했고, 이후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 〈주저하지 말아요〉, 〈계절이 두 번 바뀌면〉, 〈뜬 소문〉 등의 곡으로 1980년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꾸준히 가수 활동을 이어오다 1990년대 돌연 미국으로 건너가 부동산과 주얼리 사업으로 재테크에 성공한 사례로 알려졌고, 현재는 유튜버로도 활동 중이다.
이 노래를 부를 가수는 노래보다 앞서 드러나서는 안 됐다. 이른바 튀는 매력이나 강한 개성, 화려한 서사는 필요하지 않았다. 방미는 과장되지 않았고,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도 않았다. 어딘가 비어 있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이 노래를 자신의 이야기로 끌어오지 않고, ‘순자’라는 인물 안으로 조용히 스며든다. 그 결과 이 곡은 특정 가수의 삶을 담기보다, 듣는 이 각자의 기억과 감정을 담아내는 그릇이 되었다.
KBS2TV 1983 가요대상 화면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이 흐르며 방미의 개인사가 알려지자, 대중은 이 노래를 ‘사연 있는 가수의 노래’로 다시 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자’라는 이름은 특정 개인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낸 수많은 여성들의 공통된 이름에 가까웠다. 감정보다 상황을 앞세우고, 자신의 마음보다 참고 견디는 일을 먼저 배워야 했던 사람들. 여기에 ‘가을’이라는 계절이 겹쳐졌다.
결국 이 노래는 누군가의 이름을 지워 살아남았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빌려 더 오래 남았다. 〈올 가을엔 사랑할 거야〉가 지금까지도 가을마다 불리는 이유는 비극적인 사연 때문이 아니다. 사연이 없어 보이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누구의 사연이든 담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시대가 허락한 가장 조용한 생존 방식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올 가을엔 사랑할거야
가수 : 방미 / 작사, 작곡 : 심수봉
묻지 말아요 내 나이는 묻지 말아요
올가을엔 사랑할거야
나 홀로 가는 길은 너무 쓸쓸해 너무 쓸쓸해
창 밖엔 눈물 짓는 나를 닮은 단풍잎 하나 아~
가을은 소리없이 본체만체 흘러만 가는데
애타게 떠오르는 떠나간 그리운 사람
그래도 다시는 언젠가는 사랑을 할꺼야
사랑을 할거야
울지 말아요 오늘밤만은 울지 말아요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그대가 없이 가는 길은 쓸쓸해 너무 쓸쓸해
달빛은 화사하게 겨울가로등 불빛을 받아
오늘도 소리없이 변함도없이
애타게 떠오르는 떠나간 그리운 사람 아~
그래도 다시 언젠가는 사랑을 할거야
사랑할거야
양희수
기자
soo14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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