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 후 경복궁보다 먼저 지은 곳
조선왕조 500년 시간을 기록하고 상징하는 곳
우리나라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사진 출처 = 영화 '나랏말싸미'
사극을 보면 신하들이 왕에게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옵소서~” 혹은 “전하! 종사가 위태롭습니다”라고 종종 읍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시청자 대부분은 정확한 의미와 그 깊이를 알지 못한다.
이 표현이 조선의 국가 경영 철학에 해당할 만큼 얼마나 무게감 있고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종묘와 사직을 이해해야 한다.
태조 이성계가 1392년 조선을 건국하고 나라의 기강을 일신하기 위하여 1394년 한양 천도를 결정하고, 1395년 정도전이 한양도성을 설계할 때 북악(백악)을 진산으로 삼고 목멱산(남산)을 안산으로 삼아 법궁인 경복궁을 짓고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단을 두었고, 1936년 한양도성을 완공하였다.
유교 국가의 도시 구성 원리인 ‘좌묘우사(左墓右社)’를 충실히 따름으로써 제왕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도리를 녹였다.
남면으로 경복궁 왼쪽은 종묘, 오른쪽은 사직단 '좌묘우사'
국가의 사당, 종묘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당을 지어서 혼을 모시고, 묘를 만들어 백을 모시는 형태로 조상을 섬겼다. 사당에서는 조상의 혼이 깃든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데 개인의 사당은 가묘, 왕실의 사당은 종묘(宗廟)가 된다.
종묘의 정전
종묘는 국가의 사당으로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 추존왕과 왕비의 신주를 봉안한 사당으로 궁궐의 왼쪽(동쪽)에 두었다. 정전, 전사청, 재궁, 향관청 외에 별묘인 영녕전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종묘는 원래 ‘정전’을 일컫는 말이었다. 태조의 묘가 있다고 해서 ‘태묘’라고도 불렸다.
종묘
종묘를 항공 사진으로 보면 동쪽은 낙산, 서쪽은 인왕산, 남쪽은 남산, 북쪽은 북악산(백악) 뒤로 북한산의 줄기가 흘러 내려와 꽃처럼 피어나는 곳이 바로 종묘이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의 뿌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러한 역사적 상징성 때문에 종묘는 우리나라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 vs ‘종’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광인효현숙경영정순헌철고순’
학창시절, 외우기 쉽게 익히던 조선의 27명 왕의 계보이다. 왕의 이름은 여러 개가 있는데, 실제 받은 이름, 주상 혹은 존호, 그리고 죽은 뒤에 명나라 혹은 신하들이 내리는 ‘시호’가 있다.
우리가 위에서 외웠던 이름은 왕이 죽고 국상(3년)을 치른 후 종묘에 기록되는 ‘묘호’로서 가장 공식적인 이름이다.
묘호에 올리는 이름은 ‘유공왈조(有功曰祖) 유덕왈종(有德曰宗)’이라는 나름의 기준과 원칙이 있었다. 나라에 공이 많으면 ‘조’, 나라에 덕이 많으면 ‘종’자를 붙인다는 뜻인데 태조를 제외하면, 별 원칙 없이 그때그때 정치적 상황에 의해 ‘종(宗)’이거나 종이었어야 할 임금 몇 명이 ‘조(祖)’로 바뀌었다. 태조(이성계)를 포함해 조를 붙인 왕은 세조, 선조, 인조, 순조, 영조, 정조 등 7명이다.
태조 이성계의 고조부(목조), 증조부(익조), 조부(도조), 부(환조)는 왕으로 추존되면서 이성계를 포함해 ‘조’가 다섯 명. 여기에 세종 때 지은 ‘용비어천가’(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최초의 작품이자 최초의 장편 영웅 서사시)는 세종의 아버지 태종까지 여섯 명을 칭송하며 첫 문장을 ‘해동 육룡이 나르샤’로 시작한다.
훈민정음으로 기록된 최초의 작품 '용비어천가'
27명의 왕 중에서 태조(이성계)는 조선을 건국, 세조는 ‘계유정난’(1453년 수양대군이 김종서·황보인 등 반대파를 제거해 정권을 장악한 공으로, 단종 폐위의 직접적 원인), 선조는 임진왜란 극복, 인조는 병자호란 극복, 순조는 1811년 ‘홍경래의 난’ 수습, 영조와 정조는 조선 시대에는 영종과 정종이였는데,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우면서 영조와 정조를 ‘조’로 격상시켰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종대왕실록’과 ‘정종(正宗)대왕실록’으로 되어 있다.
영종대왕실록(좌)과 정종대왕실록(우)
궁궐과 종묘는 왕과 조선을 상징하고 이미 쓰임이 다한 곳이지만 차이가 있다면, 궁궐은 주인인 왕의 동선을 따라 내국인, 외국인이든 한복을 입고 가볍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지만 신이 주인인 종묘는 왕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 엄숙하고 경건한 장소이다.
경복궁(좌)과 종묘(우)
궁궐과 달리 종묘의 모든 건축물에는 현판이 걸려 있지 않고, 화려한 단청도 없이 단순한 색으로 칠해져 있다.
심지어 연못에 물고기도 없다.
사직단
경복궁을 기준으로 오른쪽(서쪽)에 있는 ‘사직(社稷)단’은 국가 발전, 백성들의 편안한 삶,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땅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 ‘직(稷)’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나라에 커다란 변고, 경사,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가 일어났을 때도 사직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두 개의 단을 나란히 만들어 동쪽에는 ‘토지의 신’에게, 서쪽에는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사직단 입구 홍살문
사직의 위상은 정조 사후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왕권이 약해지면서 크게 낮아졌다. 일반인 역시 국가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사직단(왼쪽은 곡식의 신, 오른쪽은 토지의 신)
《삼국사기》에 고구려에 국사를 세웠고, 신라 때도 사직단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이미 삼국시대부터 사직단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동래구 사직동 등 지방에도 사직단을 설치했다. 사직공원 내에는 종로도서관, 시립어린이도서관을 비롯해 몇몇 공공건물이 들어서 있다.
활터인 황학정과 단군성전, 이이, 신사임당의 동상도 있다.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우에 국가 경영의 두 축인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는 것은 조선에서 국가의 근본과 기강을 바로잡는 행위였다. 종묘는 왕을 기준으로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 쭉 거슬러 올라가면 태조까지 임금의 자격과 시간을 생각하게 하는 공간이다.
사직은 땅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인 만큼 국토와 경제, 백성의 삶에 대한 의무를 상징하는 곳이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산실 종묘 '정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전하! 종묘사직을 보존하옵소서~”는 “제발 종묘를 생각하시어 긴 시간 동안 역대 왕들이 쌓아놓은 위업을 망치지 말라”라는 의미, 사직은 “이 국토를 잘 지키고, 백성들 먹여 살리는데 책임을 다하라”라는 엄청난 압박감과 부담감을 주는 표현이다.
한마디로 “임금으로서 자격을 생각하고 의무를 다하라”라는 왕위의 막중함을 알고 신중하게 처신하라는 것이다.
배성식 / 여행작가
평소 여행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 한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모아 2022년에 아빠들을 위한 주말 놀거리, 먹거리 프로젝트 <아빠와 함께하는 두근두근 보물찾기>를 발간하였다.
2024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 최대의 언론사 그룹인 여행요미우리출판사를 통해 한국의 관광명소와 외국인들이 꼭 경험해 볼 만한 곳들을 소개한 ‘한국의 핫 플레이스 51’을 일본어 <韓国のホットプレイス51>로 공동 발간했다.
이메일 ssbae100@naver.com / 인스타그램 @k_stargram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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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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