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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윌리엄 해밀턴 쇼(서위렴 2세)’ 대위 : 한국을 조국이라고 부른 미국인
배성식 기자 ssbae100@naver.com
등록 2026-04-30 16:59
1922년 미국인 선교사의 자녀로 평양에서 출생
안정된 미래와 가족을 뒤로하고 한국전쟁에 참전
서울수복 작전 중 28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아버지와 함께 잠들어
아버지 '윌리엄 얼 쇼(좌)'와 윌리엄 해밀턴 쇼(우) 대위
서울 은평구 녹번동의 은평평화공원 한쪽에는 푸른 눈의 한 청년 동상이 조용히 서 있다.
스물여덟,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청년, 윌리엄 해밀턴 쇼(William Hamilton Shaw, 서위렴 2세)다.
화려하게 보장된 미래와 가족을 뒤로 하고, 한국을 자신의 고향이라 여기며 그 땅을 지키기 위해 삶을 바친 그의 이야기가 이곳에 남아 있다.
그는 1922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 얼 쇼(William Earl Shaw, 서위렴)의 외동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났다. 한국인 친구들과 어울려 자라며, 자연스럽게 한국을 또 하나의 고향으로 받아들였다. 생김새는 달랐지만, 그의 마음은 이 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39년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한 해밀턴 쇼(좌)가 미국 유학에 앞서 아버지 얼 쇼와 찍은 사진 / 사진 = 목원대학교
평양외국인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그 삶이 이어질 것 같았지만,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쫓겨나며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후 웨슬리안 대학교를 졸업하고,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미 해군 장교로 복무했다.
그가 운용하던 함정에는 훗날 대통령(34대)이 되는 아이젠하워가 탑승하기도 했고, 직접 안내를 맡기도 했다.
아이젠하워 장군을 태우고 함정을 운항하는 해밀턴 쇼 소위
해방 이후 그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 군정청에서 일하며, 1947년부터 2년 간 조선해양경비대사관학교(현재 해군사관학교)의 초대 교관으로 근무했다. 사관생도들에게 항해술과 영어를 가르치며, 대한민국 해군의 기초를 다지는 데 힘을 보탰다.
그 후 그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학 박사과정에 들어간다. 안정된 삶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부족함 없는 미래까지.
윌리엄 해밀턴 쇼 가족 사진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도서관에서 논문을 준비하던 그에게 한국에서 전쟁 소식이 전해졌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붙잡았다. 이미 한 차례 2차 세계대전이라는 큰 전쟁을 겪었고, 이제는 가족을 지켜야 한다고 말렸다.
이제는 자신의 삶을 살아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뛰놀던 평양의 골목,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웃고 지내던 친구들의 얼굴이었다. 전쟁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고향이 무너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결국, 그는 펜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부모님께 짧은 편지를 썼다.
“I cannot in good conscience return to my studies at Harvard while my birthplace is experiencing such a tragedy. I will not have peace of mind until peace is restored to Korea.”
“아버지, 어머니! 지금 한국인들은 전쟁 중에 자유를 지키려고 분투하고 이는데, 만약 제가 이를 도우려 흔쾌히 가지 않고 전쟁 후 평화 시에 선교사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것은 제 양심상 도저히 허락되지 않는 일입니다.”
- 쇼 대위가 부모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한국은 그에게 스쳐 지나간 나라가 아니었다.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는, 돌아가야 할 또 하나의 고향이었다.
그는 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는 곧바로 미 해군에 재입대 해 한국전쟁에 참여했다. 평양에서 태어나 한국어에 능통했던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참전 경험까지 갖춘 인물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정보장교로서 맥아더 장군을 도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인천상륙작전 후 김포로 이동 중인 맥아더 장군(왼쪽 두 번째)과 해병 대원들 / 사진 = 국가기록원
인천상륙작전 이후 이어진 서울 수복 작전에서 그는 지휘부에 남아 정보를 분석하는 임무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인 친구들이 죽어가고 있다.”라는 말과 함께 스스로 소총을 들고 최전선 해병대 수색대로 들어갔다. 그가 맡은 임무는 서울 진입에 앞서 주변에 숨어있는 적을 색출하는 가장 위험한 작전 중 하나였다.
1950년 9월 22일 아침.
서울 탈환을 위해 은평구 녹번리 일대에서 수색 작전을 벌이던 그는 매복해있던 북한군의 총탄에 가슴을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스물여덟의 나이였다. 한국 땅을 다시 밟은 지 불과 일주일 만의 일이었다. 하버드에서 이어질 학문적 미래도,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도, 모두 차가운 서울의 진흙 속에서 멈춰 섰다.
그의 죽음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것은 부모와 가족들의 선택이었다. 보통의 부모라면 아들을 잃은 땅을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 윌리엄 얼 쇼 목사는 아들의 시신을 미국으로 데려가지 않고, 서울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했다. “한국을 사랑했던 아들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내 윌리엄 얼 쇼(뒤)와 해밀턴 쇼의 무덤(앞)
이후 아버지는 아들의 전사 조의금과 사재, 그리고 수많은 이들의 도움을 모아 대전의 신학교(현 목원대학교)에 해밀턴 기념 예배당을 세우고, 세브란스병원 등을 지원하며 전쟁 이후 한국 사회의 재건에 힘썼다. 지금도 그를 기리는 예배당과 기념물들은 남아 있다.
1957년 부활절에 헌당된 대전 목산 언덕 윌리엄 해밀턴 쇼 기념교회 / 사진 = 목원대학교
아버지 역시 한국전쟁 당시 미군 군목으로 참전해 한국군 군종 제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당시 해밀턴 얼 쇼의 끊임없는 군종 제도의 요구와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으로 시작되었고, 군종 제도는 오랜 전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군인들의 든든한 정신적 버팀목이 되었다.
해밀턴 쇼의 아내 ‘후아니타(Juanita, 서화순)’ 여사 또한 남편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하버드 대학에서 학업을 이화여대 교수와 세브란스병원 자원봉사자로 평생을 한국을 위해 헌신했다. 아들 로빈손 쇼와 며느리도 하버드대에서 한국사로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서 장학 사업과 한국과 미국 양국간 학술 교류에 힘쓰는 등 60여 명의 넘는 많은 얼 쇼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한국과의 인연을 이어가며 그의 뜻을 실천하고 있다.
그의 희생은 한국과 미국 양국에서 모두 기려졌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는 충무무공훈장을, 미국 정부로부터는 은성무공훈장을 추서 받았으며, 2015년에는 ‘호국영웅 우표’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5년 호국영웅 해밀턴 쇼 기념 우표 / 사진 = 우체국
은평평화공원 내의 그의 동상에는 안정된 삶을 뒤로 하고, 스스로 선택한 전쟁터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에게 딱 들어맞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 요한복음 15장 13절 -
해밀턴 쇼 대위의 동영상과 기념비가 있는 은평평화공원 / 사진 = 한국관광공사
참고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은 합정역 7번 출구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의미 깊은 장소로, 한국을 자신의 조국처럼 사랑하며 헌신한 이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성지이다. 언더우드, 해밀턴 부자와 같은 선교사들뿐만 아니라 언론, 교육, 의료, 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헌신한 외국인들이 이곳에 잠들어 있다. 한국을 위해 헌신한 이들의 삶을 직접 느끼고 싶다면,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방문해 보기를 추천한다.
배성식 / 여행 작가
평소 여행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 한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모아 2022년에 아빠들을 위한 주말 놀거리, 먹거리 프로젝트 <아빠와 함께하는 두근두근 보물찾기>를 발간하였다.
2024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 최대의 언론사 그룹인 여행요미우리출판사를 통해 한국의 관광명소와 외국인들이 꼭 경험해 볼 만한 곳들을 소개한 ‘한국의 핫 플레이스 51’을 일본어 <韓国のホットプレイス51>로 공동 발간했다.
인스타그램 @k_stargram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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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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