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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아이 도와주다 성추행범 몰린 마이클 잭슨
타블로이드 과장 보도 피부탈색 루머 등 조롱도
‘왜색’, ‘비탄조’ 등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금지곡
트로트도 권력의 재단과 탄압 속에 성장해와
영화 ‘마이클’ 돌풍, 트로트 경연 열기 등 반전
[트롯뉴스 - 트로트문화원 공동 특별기획] 마이클 잭슨이 트로트에 말하다
③ 마이클 잭슨과 트로트의 수난사
트롯뉴스와 대한민국 트로트문화원 공동기획 시리즈 ‘마이클 잭슨이 트로트에 말하다 ’ 6부작 중 3번째로, 이번엔 타블로이드 신문의 거짓 보도, 거짓소송 등으로 끊임없이 시달렸던 마이클 잭슨의 이야기를 통해 ‘금지곡’ 시대를 거쳐온 트로트의 수난사와 비교하여 살펴본다.
마이클잭슨은 유명세를 타면서 세상을 떠날때 까지 타블로이드 신문의 거짓 보도, 거짓소송 등으로 끊임없이 시달렸다/사진=마이클잭슨 공식 SNS
권력은 때때로 예술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두려운 것을 제거하려 할 때 가장 먼저 쓰는 도구는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이다. 마이클 잭슨에게는 타블로이드 언론과 거짓소송이, 한국 트로트에는 국가 권력의 검열과 금지곡 제도가 그 역할을 했다.
두 이야기는 전혀 다른 나라, 전혀 다른 시대에 벌어진 일이지만, 그 구조는 놀랍도록 같다. 예술을 향한 탄압의 문법은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반복된다.
팝의 황제를 향한 잔혹한 음모
마이클 잭슨을 둘러싼 이야기는 단순한 성공 신화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그는 세계 최고의 팝스타로 사랑받는 동시에 끊임없는 의혹과 왜곡, 그리고 낙인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 중심에는 1993년 불거진 아동 성추행 의혹 사건이 자리하고 있다.
사건의 시작은 1992년 5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였다. 도로 위에서 차량이 고장 난 마이클 잭슨 일행을 한 여성이 도와주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그녀는 준 웡(June Wong) 이었으며, 재혼한 남편 데이브 슈워츠와의 사이에서 키우던 아들 조던 챈들러는 마이클의 열렬한 팬이었다.
천식을 심하게 앓던 조던이 마이클을 꼭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을 받은 마이클은 가족과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았고, 1993년 2월에는 조던과 그의 어머니를 네버랜드로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냈다.
당시 조던의 친부 이반 챈들러는 양육비를 체납할 정도로 아들에게 무관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들이 세계적인 스타와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태도가 급변했다. 1993년 5월 그는 마이클과 친분을 쌓으며 여러 부탁을 했고,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법적 대응을 거론하며 압박하기 시작했다.
마이클잭슨은 평소에 아동들을 위한 다양한 기부활동을 폈쳤다. 사진은 1992. 독일 뮌헨 시장을 만나 빈곤아동을 위한 활동에 기부를 하는 장면 / 사진=마이클잭슨 공식 SNS
이후 공개된 녹취록에는 이반 챈들러가 “이번 일만 잘되면 큰돈을 벌 수 있다”, “그를 영원히 파멸시킬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 큰 논란을 불러왔다. 그는 연예계 전문 변호사 베리 로스먼을 선임했고, 당시 조던에게 이른바 ‘나트륨 아미탈(Sodium Amytal)’이 투여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사건 초기 이반 챈들러 측은 경찰보다 먼저 마이클 잭슨 측 법률대리인과 접촉해 거액의 합의를 요구했고, 이는 공갈성 협상이라는 논란으로 이어졌다. 이후 민사 사건은 합의로 종결됐지만, 형사 재판에서는 마이클 잭슨이 유죄 판결을 받지 않았다. 또한, 2005년 별도의 아동 성추행 사건 재판에서도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평결을 받았다.
마이클은 로테르담의 네덜란드 소피아 아동병원을 방문하고 환자들과 가족들을 만나고 병원에 10만 파운드를 기부했다. / 사진=마이클잭슨 공식 SNS
이반 챈들러는 2009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반면 조던 챈들러는 성인이 된 이후 공개적인 증언이나 법정 진술을 통해 당시 의혹을 다시 제기하지 않았으며, 사건 이후 오랫동안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진실과 별개로, 1993년 사건은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타블로이드 언론은 무죄 판결보다 자극적인 의혹을 반복적으로 조명했고, 일부 대중 역시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결국, 그는 생전 끝내 완전한 명예 회복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그의 삶과 유산을 둘러싼 논쟁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외모를 둘러싼 조롱과 왜곡
마이클 잭슨에 관한 가장 광범위한 오해 중 하나는 그의 피부 변화에 관한 것이다. 그는 1980년대부터 백반증(Vitiligo)과 루푸스(Lupus)를 앓았다. 백반증은 피부 멜라닌 색소가 파괴되는 유전성 질환이고, 루푸스는 면역계 이상으로 온몸에 염증이 생기는 만성 자가면역질환이다.
두 질환 모두 자외선에 노출되는 것을 피해야 했다. 그래서 마이클은 항상 모자와 선글라스, 우산을 들고 다녔다.
이것이 타블로이드에는 “피부를 탈색했다.”라는 루머로 변질했다. 의학적 사실이 언론의 재창조를 거쳐 그를 ‘자신의 인종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의 외모를 둘러싼 조롱과 왜곡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1996 월드투어에나선 마이클잭슨 / 사진=마이클잭슨 공식 SNS
마이클 잭슨은 이를 알면서도 침묵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1993년 그래미 수상 소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에 대해 쓰인 모든 것들을 읽지 않기 때문에, 저는 세상이 저를 그렇게 이상하고 기괴하게 생각하는지 몰랐어요.” 이 말은 미디어 폭력의 잔혹함을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한국 트로트의 제도적 탄압
한국 트로트는 미디어 폭력보다 더 직접적인 형태의 탄압을 받았다. 국가 권력이 직접 음악을 재단하고 심판했다. 과거 문화공보부의 금지곡 지정 제도는 트로트 장르를 직접 겨냥했다. 금지 이유는 세 가지 주요 카테고리로 나뉜다.
첫째, ‘왜색(倭色)’이다.
일본 음악처럼 들린다는 이유였다. 특정 리듬 패턴이나 멜로디 라인이 일본 엔카와 유사하다는 판단하에 금지됐다. 그러나 이 기준 자체가 자의적이었다. 트로트는 한국적 정서와 일본 음악이 식민지 시대라는 역사적 맥락에서 결합해 형성된 장르였다. 그 뿌리를 ‘왜색’으로 단정하는 것은 장르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둘째, ‘비탄조(悲嘆調)’이다.
지나치게 슬프고 우울한 음악이 사회 분위기를 저해한다는 이유였다. 국가가 국민의 감정을 통제하려 한 것이다. 삶의 무게와 서러움을 노래하는 트로트의 본질 자체가 검열의 표적이 됐다.
셋째, ‘저속하다’라는 이유였다. 기준은 모호했고, 적용은 자의적이었다. 유행하는 트로트를 선제적으로 차단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분석도 있다.
이 금지곡 제도는 마이클 잭슨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MTV에서 출연 배제됐던 것과 같은 구조를 가진다.
권력이 자신이 불편한 음악을 공식 채널에서 밀어내는 방식. 차이가 있다면 MTV는 시청률과 광고 압박에 결국 무릎을 꿇었고, 한국의 금지곡 제도는 국가 권력의 이름으로 훨씬 더 오래 지속됐다는 점이다.
가짜뉴스와 사이버 렉카의 표적
언론 폭력의 형태는 바뀌었지만, 본질은 같다. 마이클 잭슨이 타블로이드의 과장된 보도로 피해를 입었다면, 오늘날 트로트 가수들은 유튜브 사이버 렉카와 가짜뉴스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사이버 렉카는 팩트 확인 없이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특정 연예인을 공격해 조회 수를 올리는 채널을 말한다.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포장하고, 한 번 생산된 콘텐츠는 무한 복제된다. 가수가 법적으로 대응해도 이미 퍼진 이미지는 되돌리기 어렵다.
마이클 잭슨이 1993년 타블로이드에 시달렸던 것과 지금 일부 트로트 가수들이 유튜브 렉카에 시달리는 것은 미디어 환경만 다를 뿐 같은 구조다. 자극적인 의혹이 진실을 압도하고, 의혹이 반복되면서 이미지가 굳어지고, 그 이미지가 실제 활동에 타격을 입힌다.
트롯뉴스는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갖고 있다. 검증되지 않은 의혹으로 아티스트를 공격하는 것은 언론이 아니다. 그것은 산업이다. 마이클 잭슨의 사례는 그 산업이 얼마나 강력하게 한 예술가를 파괴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탄압과 복권 거치며 재조명되다
마이클 잭슨은 사후에 다시 평가받고 있다. 거짓소송의 실체가 드러나고, 그의 예술적 업적이 재조명되면서 세계는 다시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2026년 4월 개봉한 전기영화 ‘Michael’이 그 복권을 가장 극적으로 증명한다. 베를린 월드 프리미어에는 그를 둘러싼 의혹이 여전히 일부에서 거론되는 가운데서도 수천 명의 팬이 모였고, 영화는 보헤미안 랩소디를 넘어선 9억 1천만 달러 이상의 흥행을 기록하며 그의 음악적 유산이 의혹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라이온스 게이트는 영화의 성공에 힘입어 그의 후반 생애를 다룰 속편 제작까지 공식화했다. 한 시대를 흔들었던 거짓 의혹이, 결국 그의 음악과 예술 앞에서 무너진 것이다.
026년 4월 개봉한 전기영화 ‘Michael’은 영화는 보헤미안 랩소디를 넘어선 9억 1천만 달러 이상의 흥행을 기록하며 그의 음악적 유산이 의혹보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 사진=영화 마이클 포스터. IMDb제공
한국 트로트도 같은 과정을 겪었다. 수십 년간 낙인과 검열을 견딘 끝에, 트로트는 지금 대중음악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 ’현역가왕’, ‘무명전설’ 등의 오디션프로그램 흥행과 임영웅의 등장, 그리고 트로트 전문 뉴스 매체 ‘트롯뉴스’의 창간까지, 이것들은 트로트의 복권을 상징하는 장면들이다.
대중문화는 시간이 지나야 제대로 평가받는다.
마이클 잭슨이 그것을 증명했고, 트로트가 그것을 다시 증명하고 있다.
탄압받은 예술은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른 뒤 더 강하게 귀환한다는 것을. 그래서 탄압의 역사는 치욕이 아니라 자부심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 다음 편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휴머니즘과 사회적 메시지가 오늘날 트로트 팬덤의 선한 영향력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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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민
기자
oasis36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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