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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샐러드] 140년간 영어를 배우고도 말하지 못하는 나라, 연간 15조 원의 역설

배성식 기자 ssbae100@naver.com

등록 2026-10-30 15:49

통역에 의존했던 영어교육의 시작

출세와 신분 상승의 사다리가 된 영어

일제강점기가 뿌린 문법·독해 교육

대학 입시와 15조 원, 회화교육의 실패

 육영공원 재직 당시 교사 헐버트(맨 왼쪽)와 학생들

영어를 배우는 데 막대한 돈과 시간을 투자하지만, 막상 외국인을 만나면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수년간 영어를 공부하고, 학원에서는 단어와 문법을 외우며, 대학 입시에서는 어려운 독해 문제를 푼다. 그런데 정작 영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연간 15조 원 규모로 알려진 영어 사교육 시장. 이처럼 거대한 시장에도 한국인의 영어 실력이 기대만큼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교육 방법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개화기 조선에서 시작된 영어교육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대학 입시 중심의 교육문화로 굳어진 역사를 만나게 된다.

 

영어를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과목으로 만들어 온 역사. 한국 영어교육의 역설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외국인과의 소통조차 통역에 의존했던 영어교육의 출발

 

1882년 조선은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는 미국 측과 직접 영어로 협상할 수 있는 인력이 거의 없었다. 결국, 청나라의 통역과 외교적 중개에 의존해야 했고, 조선은 국제 외교 무대에서 언어의 장벽을 절감했다. 


 1882년 미국과의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모습

이듬해인 1883년, 고종은 민영식을 단장으로 홍영식, 유길준 등이 참여하는 사절단을 구성해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했다. 푸트 미국 공사의 조선 부임에 대한 답례이자 미국의 문물과 제도를 직접 살펴보고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길을 찾으려는 목적이었다. 보빙사는 6월 인천을 출발해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8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조선의 사절단에게 미국은 그야말로 새로운 세계였다. 마침 완공한 거대한 브루클린교와 고층 건물의 엘리베이터, 전기로 밝혀진 도시의 밤은 당시 조선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특히 백열전구가 밝히는 거리와 건물의 모습은 서양의 앞선 기술 수준을 실감하게 했다.

 

 '아서' 대통령을 향해 절을 하고 있는 보빙사 일행 / 뉴욕 헤럴드 1883년 9월 19일 자

보빙사 일행은 기차를 타고 대륙을 가로질러 워싱턴으로 이동해 미국 아서 대통령을 만났으며, 이후 뉴욕과 보스턴 등 주요 도시도 둘러봤다. 광활한 대륙을 가로지르는 철도와 발달한 산업시설은 조선 사절단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의 방문은 단순한 외국 여행이 아니었다. 조선이 앞으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하게 떠오른 것이 바로 영어였다. 서양의 기술과 제도를 이해하고 외교와 통상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외국어를 직접 읽고 듣고 소통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출세와 신분 상승의 기회가 된 영어

 

보빙사의 귀국 이후 고종은 영어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마침내 1886년 관립 근대 교육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고 미국인 교사들을 초빙했다. 길모어, 번커, 헐버트 등 선교사들이 영어와 서양의 학문을 가르쳤다. 근대적 서양식 교육을 도입한 관립 교육기관이었다.

당시 영어는 단순한 외국어가 아니었다. 서양의 지식을 받아들이고 외교와 통상에 참여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었다. 고종이 직접 영어 시험을 주관할 만큼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은 외국인을 상대하는 일자리를 얻거나 관직에 진출하는 데 유리했다. 영어가 신분과 기회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상을 보여주는 인물이 알렌의 하인이었던 이하영이다. 그는 부산에서 떡상자를 하면서 알렌에게 외국어를 익힌 뒤 외교관의 길로 들어섰고, 대한제국 시기 외부대신과 법부대신까지 지냈다. 천민 출신으로 알려진 그가 외국어 능력을 바탕으로 고위 관료에 오른 사실은 당시 사람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출세가 곧 애국적인 행보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하영은 을사늑약(1905년) 전후의 격동기에 고위 관료로 활동했으며, 훗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았다.

 

 1888년 미국을 방문한 주미공사 외교관들, 앞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이하영

그럼에도 영어가 출세의 통로라는 인식은 사회 전반으로 퍼져 나갔다. 영어를 조금이라도 할 줄 아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높은 대우를 받는다는 사실은 영어 공부에 대한 열망을 키웠다. 영어는 지식의 언어이자 출세의 언어가 되어 갔다.

 

 

일제강점기, 문법·독해 중심 교육의 뿌리

 

그러나 영어교육이 본격적으로 뿌리내리기도 전에 역사의 흐름이 바뀌었다.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하면서 교육제도 역시 일제의 통제 아래 놓였다. 영어교육의 환경도 달라졌다. 서양인 교사들이 떠나고 일본인 교사들이 영어교육을 담당하는 사례가 늘면서 영어를 실제로 사용하는 환경보다는 교실에서 문법을 설명하고 문장을 해석하는 교육이 중심이 되기 쉬웠다.

이 과정에서 영어를 실제로 사용하는 능력과 영어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는 능력 사이에 간극이 생겼다. 

문법 규칙을 외우고 문장을 해석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정작 영어로 대화하는 능력은 충분히 길러지지 않는 교육 방식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 학생들에게 익숙한 영어의 1형식부터 5형식까지의 문장 구조도 이러한 문법 중심 교육문화와 연결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본의 영어교육자 ‘호소에 이쓰키(細江逸記)’는 20세기 초 영문법 체계를 정리한 인물로, 그의 문법 연구와 저술은 일본 영어교육에 영향을 미쳤다. 

다만 오늘날 한국의 5형식 문법이 그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져 그대로 입시에 도입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영어 문장을 분석하고 규칙을 적용해 정답을 찾는 방식이 교육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문법·독해 중심의 학습 방식은 대학 입시와 만나면서 더욱 강화됐다. 

일제강점기 유일한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현재 서울대학교)의 입학시험에서도 영어는 일본어, 수학 등과 함께 중요한 과목이었다. 제한된 정원 속에서 지원자를 선발해야 했던 만큼 객관적인 평가와 변별력이 필요했다. 

문법과 독해는 학생들의 실력을 점수로 구분하기에 적합했지만, 실제 회화 능력은 다수의 학생을 대상으로 일관되게 평가하기 어려웠다. 결국, 영어는 의사소통의 도구인 동시에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얻기 위한 과목으로 자리 잡아 갔다.

 

 

대학 입시가 굳힌 시험 영어, 15조 원의 역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은 독자적인 교육제도를 만들어 갔지만, 이미 뿌리내린 시험 중심의 학습문화까지 단기간에 바꾸기는 어려웠다. 대학 진학은 사회적 지위와 직업을 결정하는 중요한 통로였고, 영어는 대학 입시의 주요 과목으로 자리 잡았다. 학교에서는 제한된 시간에 많은 학생을 가르쳐야 했고, 시험에서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가 필요했다. 문법과 독해는 이러한 조건에 잘 맞는 영역이었다.

 

대학 입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사교육도 발달했다. 학원은 학교 수업에서 부족한 문법 지식과 문제풀이 요령을 보충했고, 학생들은 더 많은 단어와 더 어려운 지문을 공부했다. 입시 경쟁이 심해질수록 사교육 시장도 커졌다. 오늘날 연간 15조 원 규모로 알려진 영어 사교육 시장은 이러한 구조가 얼마나 강력하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연간 15조 원 규모로 알려진 영어 사교육 시장 / 사진=AI 활용

이러한 교육 방식은 대학 입시에만 머물지 않았다. 취업과 승진에서도 토익과 토플 등 각종 영어시험 점수가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활용됐다. 영어를 잘한다는 말의 의미도 달라졌다. 외국인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사람보다 어려운 문법 문제를 풀고 긴 지문을 정확하게 해석하는 사람이 영어를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받기 쉬웠다.

학교와 학원에서 문법과 어휘, 독해 문제를 반복해서 풀지만, 영어로 질문하고 대답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연습은 상대적으로 뒷전으로 밀렸다. 영어를 오랫동안 공부하고도 외국인 앞에서 입을 열지 못하는 모순이 반복되는 이유다.

 

결국, 한국 영어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영어를 소통의 도구가 아니라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과목으로 가르쳐 왔다는 데 있다. 교육비를 더 투입하고 공부 시간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영어교육의 목적과 평가 기준부터 바꾸지 않는다면 15조 원을 20조 원으로 늘려도 회화 실력이 획기적으로 나아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조미통상수호조약은 불평등 조약이 아닌 최초의 자발적인 조약으로 현재 인천 차이나타운 자유공원 인근의 삼국지 벽화 거리 옆에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장소를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정확한 위치는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3가 8-3(제물량로232번길 23)이다.


조약 체결 장소는 그동안 1982년에는 화도진공원, 2006년에는 현재의 올림포스호텔 부지로 알려지는 등 논란이 이어져 왔다. 그러나 2013년 관세청 서울세관의 김성수 씨가 미국과 일본의 해관(海關) 관련 고문서를 발굴하면서 새로운 역사적 근거가 제시됐다. 

이를 바탕으로 인천시가 학술세미나를 개최해 관련 자료를 검토했고, 마침내 현재의 장소를 조약 체결지로 확정했다.


 조미수호통상조약체결지 표지석 / 사진=인천시 제공 

배성식 / 여행 작가



평소 여행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 한국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정보를 모아 2022년에 아빠들을 위한 주말 놀거리, 먹거리 프로젝트 <아빠와 함께하는 두근두근 보물찾기>를 발간하였다.

2024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 최대의 언론사 그룹인 여행요미우리출판사를 통해 한국의 관광명소와 외국인들이 꼭 경험해 볼 만한 곳들을 소개한 ‘한국의 핫 플레이스 51’을 일본어 <韓国のホットプレイス51>로 공동 발간했다.

이메일 ssbae100@naver.com 

인스타그램 @k_stargram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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