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트로트 가사엔 시공 초월한 ‘문학적 생명력’ 있어...숨겨진 의미 캐내는 과정은 보물찾기”

박강민 기자

등록 2025-12-15 16:10

같은 뿌리에서 탄생한 트로트와 엔카는 음악적-역사적으로 구별 불가능

조선 가수들 감정 표현-가창법 영향받은 엔카엔 우리 선조들 ‘지분’ 있어

“양국서 각자 진화했을 뿐 원조 논쟁은 무의미...‘왜색 콤플렉스’ 벗어나야

문화는 섞이고 스며드는 것... 트로트도 문화유산으로 재평가될 수 있어

□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장 박진수 교수 인터뷰(상)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장 박진수 교수

    

대한민국은 바야흐로 트로트 전성시대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릴 때마다 구성진 가락이 흘러나오고, 10대 소년부터 80대 노인까지 트로트 가수의 팬덤을 자처하며 열광한다. 한때 ‘뽕짝’이라 불리며 변방으로 밀려났던 이 음악은 이제 대중문화의 가장 뜨거운 중심에 서 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조명 뒤편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어쩌면 애써 외면해온 오래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바로 ‘왜색(倭色) 시비’다.

 

트로트 특유의 꺾기 창법과 2박자 리듬이 일본의 ‘엔카(演歌)’와 유사하다는 지적은 일제 강점기라는 굴욕적인 역사를 겪은 우리 민족에게 일종의 ‘원죄’이자 ‘콤플렉스’였다. “일본풍은 무조건 안 된다.”라는 국민적 정서 속에서 트로트는 사랑받으면서도 동시에 천대받는 이중적인 지위를 감내해야 했다.

 

과연 트로트는 일본의 아류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언제까지 침묵해야 하는가. 이 해묵은 논쟁에 대해 “트로트와 엔카는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쌍둥이”라고 단언하는 학자가 있다. 

문학 텍스트 분석 방법론인 ‘내러톨로지(Narratology)’를 대중음악에 접목해 트로트의 미학을 연구해온 박진수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장(일본어문학과 교수)이다.

트롯뉴스(www.trotnews.co.kr)가 가천대학교 연구실에서 박진수 교수를 만나, 트로트 100년의 서사 속에 숨겨진 역설적인 진실과 우리가 몰랐던 역사적 풍경을 들어보았다. 

 

 

‘트로트 신동’ 문학 교수, 뽕짝의 DNA를 깨우다!

 

박진수 교수의 연구실은 빽빽한 일본 문학 서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본래 그는 소설의 구조를 연구하는 정통 문학자다. 그런 그가 왜 ‘고상한’ 문학을 두고 통속적이라 치부되던 대중가요, 그것도 트로트 연구에 뛰어들었을까. 

이야기는 그의 유년 시절, 1960~70년대의 풍경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박진수 교수 연구실 


“제 아버님이 1915년생이십니다. 일제 강점기 한복판에 태어나신 분이죠. 저는 7남매 중 막내로 1965년에 태어났는데 큰형님과 나이 차이가 무려 20살이나 납니다. 그러다 보니 제 또래 아이들이 부르던 동요보다는 아버지와 형님들이 흥얼거리던 ‘흘러간 옛 노래’를 더 많이 듣고 자랐습니다. 당시 어른들이 ‘어린 녀석이 어떻게 저런 노래를 아느냐?’라며 신기해했는데, 그때 제 무의식 속에 트로트의 DNA가 깊이 박힌 것 같습니다.”

 

박 교수는 웃으며 자신을 ‘트로트 신동’이었다고 회상했다. 아버지가 흥얼거리던 1930년대의 유행가, 형들이 부르던 60~70년대의 가요들이 그의 언어적 감수성을 키운 자양분이었다. 

하지만 그저 ‘듣기 좋은 노래’였던 트로트가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 바뀐 결정적인 계기는 대학 시절 일본 연수에서 찾아왔다.

 

1984년, 고려대학교 일어일문학과 2학년이었던 박 교수는 일본 나고야의 메이지무라(明治村, 근대 건축물을 보존한 테마파크)를 방문했다. 이국적인 풍경을 거닐던 그의 귀에 낯익은 멜로디가 꽂혔다.

“분명히 우리 근대 가요인 ‘학도가(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였습니다. 가슴이 뛰었죠. ‘아니, 왜 일본 한복판에서 우리 민족의 계몽가요가 나오지?’ 하고 의아해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곡은 1900년에 발표된 일본의 ‘철도창가’였습니다. 일본의 곡이 한국으로 건너와 가사만 바뀌어 불렸던 것이죠. 그때 처음으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한일 간의 대중음악이 단순히 영향을 주고받은 수준이 아니라, 국경을 넘어 서로 깊이 얽혀 있다는 사실을 체감한 순간이었습니다.”


일본 유학(도쿄대학교)당시 총장님과 함께


이후 일본 유학을 거쳐 2001년 교단에 선 그는, 일본 문학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소설 읽기를 힘들어하자 대중가요 가사를 텍스트로 가져오는 시도를 했다. 그제야 학생들의 반응이 좋았다. 그는 “노래 가사야말로 가장 압축적이고 대중적이며, 강력한 힘을 가진 문학 텍스트”임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대중음악 연구, 특히 트로트와 엔카의 비교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문세에서 심수봉까지 ‘내러톨로지’로 읽는 노래의 이면

 

박 교수의 연구 방식은 독특하다. 그는 음악적 기교보다는 가사가 전달하는 ‘이야기’에 주목한다. 그가 사용하는 도구는 ‘내러톨로지(Narratology, 서사학)’다. 이는 ‘무엇(내용)’을 말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형식)’ 말하느냐를 분석해 텍스트 이면에 숨겨진 심층적 의미를 찾아내는 학문이다.

“소설이나 영화만 서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무심코 흥얼거리는 노래 가사에도 화자가 있고, 청자가 있고, 시점이 있습니다. 심지어 화자는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왜 하필 이 시점에서, 이런 어조로 이야기를 하는지를 따져보면 노래가 품은 진짜 의미가 보입니다.”

 

그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했다. 이문세의 명곡 ‘사랑이 지나가면’이 대표적이다.

“노래 도입부에서 화자는 ‘그 사람 나를 보아도 나는 그 사람을 몰라요’라고 말합니다. 대상을 철저히 3인칭인 ‘그 사람’으로 지칭하며 타인처럼 대하죠. 이성적으로 거리를 두려는 노력입니다. 그런데 노래의 클라이맥스로 가면 갑자기 ‘그대 나를 알아도’라며 2인칭 ‘그대’로 호칭이 바뀝니다. 3인칭에서 2인칭으로, 이 짧은 호칭의 변화 속에 작사가의 무의식적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터져 나오며 대상과의 심리적 거리가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죠.”

 

박 교수는 심수봉의 명곡들 또한 훌륭한 분석 텍스트라고 강조했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봅시다. 이것은 단순한 유행가가 아닙니다. 남자는 떠나고 여자는 기다린다는 통속적인 내용을 넘어, ‘부유(浮遊)하는 존재’로서의 남성과 ‘정착(定着)하는 존재’로서의 여성이 갖는 만남과 이별의 철학적 구조를 담고 있습니다.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처럼, 우리 트로트 가사들도 시공간을 초월해 보편적 정서를 건드리는 ‘문학적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구자로서 그 숨겨진 의미를 캐내는 과정은 보물찾기처럼 즐거운 일입니다.”

 

 

트로트와 엔카는 1920년대 경성과 도쿄의 ‘공동 창작물’

 

화제는 자연스럽게 트로트와 엔카의 관계, 그 민감한 ‘원조 논쟁’으로 이어졌다. 대중들 사이에는 여전히 ‘트로트가 일본풍이냐 아니냐’, ‘엔카의 아류냐 아니냐’를 두고 설왕설래가 오간다. 이에 대해 박 교수는 학자로서 냉철하고도 명쾌한 정의를 내렸다.

 

“음악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트로트와 엔카는 구별이 불가능합니다. 중요한 것은 트로트와 엔카가 각각 따로 만들어진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1920~30년대 제국 일본의 음반 시장이라는 하나의 생태계에서 탄생해서 해방 이후 둘 또는 그 이상으로 분화된 것입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20년대 당시 음반 시장은 국경으로 나뉘어 있지 않았다. 한국, 일본, 대만, 중국의 창작자와 가수들은 하나의 거대한 시장 안에서 활동했다. 같은 스튜디오에서 녹음하고, 같은 악단이 반주하고, 같은 레이블(음반사)에서 유통했다. 당시엔 ‘트로트’니 ‘엔카’니 하는 용어조차 없었고, 그저 ‘유행가(流行歌)’로 통칭 되었다.

“누가 먼저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했다가, 1945년 해방 이후 정치적으로 나라가 갈라지면서 한국에선 트로트로, 일본에선 엔카로 각자 진화한 것입니다. 1960년대 이후 서구 팝 음악이 들어오면서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나중에 붙여진 이름일 뿐, 본질은 같습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일본과 대립했지만, 문화적으로는 끊임없이 상호 침투하고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2018년 도쿄에서 열린 한일 오피니언리더 세미나(박진수 교수 맨 왼쪽) / 사진제공 = 박진수 교수


엔카의 아버지, 그 뿌리는 ‘조선의 소리’였다

 

박 교수는 여기서 대중들이 잘 모르는, 그러나 매우 중요한 역사적 아이러니를 지적했다. 우리가 엔카를 ‘왜색’이라며 배척했듯, 일본 내에서도 엔카의 뿌리를 한국으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중심에는 ‘엔카의 아버지’로 불리는 일본의 대 작곡가 ‘고가 마사오(古賀政男)’가 있다.

“고가 마사오는 일본 후쿠오카 출신이지만, 일곱 살 때인 1911년 한국으로 건너와 인천과 서울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를 다녔죠.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어린 시절 한국에서 들었던 ‘거지들의 노래(각설이 타령이나 민요로 추정)’와 노동요, 그 애절한 가락에서 깊은 음악적 영감을 받았다고요. 심지어 본인 스스로 ‘나의 음악적 원류는 조선에 있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엔카의 대부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박 교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생각해 보십시오. 일본 엔카의 상징인 ‘고가 멜로디’의 밑바닥에 조선의 한(恨)과 정서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요. 이것은 매우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한국인은 트로트가 일본 것이라며 거부감을 느꼈지만, 정작 일본인은 그 멜로디에서 한국적인 정서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성애 씨가 일본에서 활동할 때 앨범 재킷에 ‘엔카의 원류를 찾아서’라는 문구가 쓰였을 만큼, 일본인들 상당수는 엔카의 뿌리가 한국에 닿아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가수들은 일본 시장을 주름잡았다. ‘사의 찬미’의 윤심덕은 일본에서 녹음했고, 채규엽, 이난영, 남인수 등 당대 최고의 가수들은 일본식 예명으로 활동하며 엔카의 형성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조선 가수들의 뛰어난 감정 표현과 서사적 가창법은 엔카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니 엔카에는 분명 우리 선조들의 ‘지분’이 있습니다. 트로트와 엔카는 일방적인 모방이 아니라, 1930년대 당시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이 함께 만들어낸 ‘공동 창작물’이자 ‘협업의 결과’입니다. 이제 와서 ‘원조가 어디냐’, ‘왜색이다’를 따지는 것은 그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낸 우리 예술가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콤플렉스를 넘어서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박진수 교수는 1부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대중음악 연구가 ‘자국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대중음악사, 일본 대중음악사를 따로 떼어놓고 보면 설명되지 않는 빈칸들이 너무 많습니다. 국경을 넘어 ‘동아시아 대중음악사’라는 큰 틀에서 볼 때, 비로소 문화의 흐름이 보입니다. 

문화는 고정된 소유물이 아닙니다. 물처럼 흐르고, 섞이고, 서로 스며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왜색 콤플렉스’를 내려놓고 역사를 있는 그대로 직시할 때, 트로트는 단순한 유행가가 아니라 100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동아시아의 거대한 문화유산으로 재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는 2부_하에서 계속됩니다. ‘루돌프’와 ‘단팥빵’으로 본 한일 문화의 차이, 그리고 K-트로트의 세계화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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