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롯뉴스 특별기획: 사의 찬미 100년의 기록-한국 대중가요의 시작을 읽다
[10편·최종회] 100년의 유산, '사의찬미'가 남긴 것
트로트도 K-POP도 없던 시절, 한국인은 노래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대중과 나누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00년. 유성기 2,000대에 불과했던 나라는 이제 세계를 향해 음악을 수출하고, 연간 1억 장이 넘는 음반을 만들어내는 나라가 됐다. 그 거대한 변화의 출발점에는 3분 남짓한 노래 한 곡, 윤심덕의 ‘사의찬미’가 서 있다.
가십에서 국가유산 등록 등 이어져
지난 한 세기 동안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야기는 ‘현해탄 정사(情死)’라는 자극적인 이름 아래 통속적 스캔들과 비극적 사랑의 서사로 소비돼왔다.
그러나 ‘사의찬미’ 100주년을 맞은 오늘, 두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지고 있다.
윤심덕은 한국 근대 대중음악과 성악 사의 선구자로, 김우진은 한국 근대극의 문을 연 극작가로 각자의 예술적 성취를 중심으로 다시 조명되고 있다. 두 사람의 삶과 죽음 역시 더 하나의 비극적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식민지 조선의 근대 예술가들이 겪었던 시대적 갈등과 고뇌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읽힌다.
특히 김우진에 대한 문학사적 재평가는 국가유산 등록으로도 이어졌다.
2025년 11월 13일 김우진이 남긴 희곡 친필 원고 ‘이영녀’, ‘산돼지’, ‘난파’, ‘두덕이 시인의 환멸’ 등 4편이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최종 등록됐다. 한국 문학사와 공연사에서 희곡 친필 원고가 국가유산으로 등록된 첫 사례다.
국가유산청은 이들 원고가 일본 신파극의 영향에서 벗어나 서구 근대극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려 했던 선구적 시대정신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극작가 김우진이 남긴 작품과 문학사적 가치를 국가유산으로 인정한 것이다. 윤심덕과 직접 관련된 국가유산 지정은 아니지만, 한동안 ‘현해탄 사건’의 한 인물로만 기억돼온 김우진을 독립된 근대 예술가로 복원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윤심덕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이름을 김우진과 죽음에만 가둬둘 것이 아니라 조선 최초의 전문 소프라노 가운데 한 사람이자, ‘사의찬미’를 통해 한국 근대 대중음악사의 중요한 장면을 남긴 예술가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등록 예고된 희곡은 '두덕이 시인의 환멸', '이영녀', '난파', '산돼지' 등 1925∼1926년작 4편이다. 사진은 '두덕이 시인의 환멸'(왼쪽)과 '이영녀'. / 사진=국가유산청 제공
유성기서 스트리밍까지 100년의 변화
‘사의찬미’가 보여준 것은 단순히 한 곡의 성공이 아니었다. 노래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것이 음반의 구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강렬하게 증명했다. 한국 대중음악 산업의 가능성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100년, 한국인이 음악을 듣고 소유하는 방식은 여섯 차례의 큰 변화를 거쳤다.
SP 유성기 시대(1926~1960년대 중반)
음반 한 면에 한 곡, 길어야 3~5분이었다. 1928년 전기녹음 방식이 도입되면서 음질은 크게 향상됐고, 일제강점기 제작된 한국음악 유성기 음반은 약 6,500종에 이른다. 노래가 공연장을 벗어나 가정으로 들어오기 시작한 시대였다.
LP 시대(1958~1990년대 초)
1958년 공보실 레코오드 제작소가 제작한 12인치 ‘KBS 레코드 시리즈 No.1’은 국내 LP의 효시로 꼽힌다. 한 장의 음반에 담을 수 있는 음악이 크게 늘어나면서 사람들은 노래 한 곡이 아니라 ‘앨범’을 듣고 소유하기 시작했다. 1960~70년대 다방과 레코드 가게는 새로운 음악을 만나는 청년문화의 거점이 됐다.
카세트 시대(1980년대)
음악은 마침내 집 밖으로 나왔다. 1979년 등장한 소니 워크맨은 어디서나 혼자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한국에서는 1980년 조용필 1집 ‘창밖의 여자’가 약 11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최초의 밀리언셀러로 이름을 올렸다.
CD 시대(1990~2001년)
음반 시장은 본격적인 대량 소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1989년 한국음반산업협회의 공식 판매량 집계가 시작되면서 ‘기록의 시대’도 열렸다. 1995년 김건모 3집 ‘잘못된 만남’은 330만 장 판매 기록으로 한국 기네스북에 올랐고, 1997년 국내 음반 시장 규모는 4,104억 원으로 정점을 찍었다.
디지털 충격기(2000~2010년)
MP3와 인터넷은 음악산업의 질서를 송두리째 바꿨다. 2000년 소리바다의 등장과 온라인 음원 공유 확산으로 기존 음반 시장은 급격히 위축됐다. 4,104억 원에 달했던 시장 규모는 2006년 848억 원까지 줄었고, 2001년 이후 국내에서 밀리언셀러 음반도 오랫동안 자취를 감췄다. 음악의 중심이 ‘소유’에서 ‘파일’과 ‘접속’으로 이동한 시기였다.
팬덤형 피지컬 부활기(2010년대~현재)
사라질 것 같았던 음반은 뜻밖의 방식으로 부활했다. 2011년 682만 장이던 연간 피지컬 앨범 출하량은 2023년 약 1억 장 규모로 폭증했다. 세븐틴의 ‘FML’은 2023년 620만 장 이상 판매되며 한국 대중음악사에 새로운 기록을 남겼다. 세계 음악 시장이 스트리밍 중심으로 재편되는 동안 한국에서는 오히려 ‘소장하는 음반’이 다시 성장하는 역설이 나타났다.
100년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
숫자만 놓고 보면 1926년 ‘사의찬미’의 1만3,000장과 2023년 한 앨범의 600만 장대 판매 사이에는 100년이라는 거대한 간 극이 있다. 듣는 기계도, 음반의 형태도, 음악을 만나는 방식도 완전히 달라졌다.
하지만 그 100년을 관통하는 대중의 마음은 놀라울 만큼 닮아있다.
축음기가 없는 사람까지 윤심덕의 음반을 샀던 이유와 스트리밍으로 언제든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오늘의 팬들이 앨범을 다시 사는 이유에는 공통점이 있다. 음반이 단순히 음악을 재생하기 위한 도구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음반은 좋아하는 노래와 가수를 향한 마음의 증표였고, 자신이 사랑한 시대와 감정을 간직하는 물건이었다. 노래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 안에 담긴 기억과 감정, 그리고 이야기를 함께 소유한다는 의미였다.
유성기에서 LP와 카세트, CD를 거쳐 스트리밍의 시대까지 기술은 끊임없이 변했다. 그러나 음악에 마음을 얹고, 그 마음을 어떤 형태로든 간직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100년 전 ‘사의찬미’는 그 오래된 문법의 시작을 보여준 노래였다.
그리고 그 문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동축음기주식회사에서 발매한 '사의찬미' 앨범과 앨범자켓 / 사진=한국대중음악박물관 제공
트로트에서 K-POP까지 흐르는 정서
‘사의찬미’의 흥행은 음반이라는 새로운 매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크게 끌어올렸다. 이후 축음기와 음반 시장이 확대되면서 일본 엔카를 비롯한 외래 대중음악의 정서와 형식도 조선에 빠르게 유입됐고, 그것은 다시 한국인의 언어와 감정 속에서 변형되며 트로트가 뿌리내리는 문화적·산업적 토대가 됐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을 비롯해 이후 한국 대중가요를 관통한 것은 사랑과 이별, 상실과 그리움이었다. 흔히 ‘한(恨)’이라 불리는 이 정서는 한국인의 삶과 시대적 경험을 품으며 오랫동안 대중음악의 중요한 감성적 토대로 자리 잡았다.
놀라운 것은 100년 전의 이 슬픔이 오늘날 세계를 무대로 하는 K-POP에서도 다른 모습으로 되살아난다는 점이다. K-POP은 화려한 퍼포먼스와 세련된 사운드로 대표되지만, 그 안에는 외로움과 상실, 불안과 좌절, 다시 일어서려는 욕망을 노래하는 작품도 적지 않다.
“광막한 황야를 달리는” 고립감과 “칼 우에 춤추는” 위태로움은 1926년 윤심덕의 언어이지만, 경쟁과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의 청춘에게도 낯설지 않은 감정이다. 시대와 음악의 형식은 달라졌지만, 인간이 느끼는 불안과 고독은 100년의 세월을 넘어 반복되고 있다.
‘사의찬미’에서 선명하게 드러난 이 슬픔의 미학은 이후 트로트와 발라드, 그리고 오늘의 K-POP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음악적 언어로 변주되어왔다. 한국 대중음악은 슬픔과 그리움, 한과 고독을 단순한 절망에 머물게 하지 않고 노래와 위로, 때로는 다시 살아갈 힘으로 바꾸어 왔다.
100년 전 한 여가수가 노래했던 개인의 절망은 그렇게 시간을 건너, 오늘날 세계의 청춘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감정으로 확장됐다.
그것이 ‘사의찬미’가 남긴 또 하나의 100년 유산이다.
100년 전 한 여가수가 노래했던 개인의 절망은 그렇게 시간을 건너, 오늘날 세계의 청춘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감정으로 확장됐다. / 사진=한국대중음악박물관
다음 100년을 위한 과제 아카이빙
트로트는 오늘 전 국민이 향유하는 장르가 되었지만, 그 뿌리에 대한 학술적·제도적 정리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사의찬미’ 100주년이 던지는 가장 실질적인 과제가 여기에 있다.
음반과 가사지, 신문 기사와 공연 프로그램 같은 1차 사료의 체계적 아카이빙, 초기 유성기 음반의 디지털 복원, 그리고 한국 트로트와 일본 엔카가 20세기 초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서로를 비추며 성장했는지에 대한 비교 연구가 시급하다.
두 장르가 공유하는 정서와 형식의 뿌리를 국제적 맥락에서 규명하는 작업은, 우리 대중음악의 위상을 문화유산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100년 전 오사카의 녹음실에서 눈물을 쏟으며 노래한 한 여성의 목소리가 지금도 우리 가슴을 울린다면, 그 목소리를 제대로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은 이 시대의 몫이다.
윤심덕이 남긴 3분의 노래는 100년 동안 멈추지 않았다.
성악가 출신이라는 배경 덕분에 이 곡은 탄생부터 클래식과 대중가요의 경계에 서 있었고, 그 덕에 트로트 전설들과 재즈 아티스트, 팝페라 테너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후배들이 자신의 색으로 이 곡을 다시 불렀다.
100년 전 고물 축음기에서 지지직거리며 흘러나오던 소리는 이제 스트리밍 서비스와 대형 콘서트 무대 위에서도 여전히 살아 숨 쉰다. 매체가 여섯 번 바뀌는 동안 살아남은 노래는 많지 않다.
2026년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
우리가 100주년을 맞아 다시 윤심덕과 김우진을 부르는 이유는 과거를 추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100년의 세월을 뚫고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차즈러 가느냐.”
이 물음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공허를 느끼는 오늘의 우리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윤심덕에게 죽음이 최후의 자유를 향한 결단이었듯, 그녀의 노래는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주체적인 삶의 가치를 일깨운다.
결국 ‘사의찬미’가 남긴 것은 죽음의 그림자가 아니라, 죽음을 담보로 해서라도 얻고 싶었던 예술적 자유와 인간적 존엄에 대한 열망이다.
현해탄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 두 연인의 시신조차 찾지 못했지만, 그들이 남긴 노래와 글은 이제 대한민국의 국가유산이 되어 살아남았다.
2026년, ‘사의찬미’ 100주년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윤심덕이 열었던 무대는 앞으로의 100년에도 한국 대중음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를 위로하고, 깨우며, 함께 노래할 것이다. (끝)
[사의찬미 100주년 특별기획 시리즈를 마치며]
총 10회에 걸쳐 연재한 《사의찬미 100년의 기록- 한국 대중가요의 시작을 읽다》를 마친다.
이번 기획은 100년간 되풀이되어 온 통설을 그대로 옮기지 않겠다는 원칙에서 출발했다. 1926년 닛토레코드 음반의 원본 가사지, 같은 해 8월 5일 자 동아일보와 8월 7일 자 아사히신문의 보도, 1930년 12월 7일 자 아사히신문의 로마 생존설 기사 등 1차 사료를 직접 확인해 본문에 반영했고, 정설처럼 굳어진 10만 장 판매설을 당대 기록과 대조해 검증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숫자의 진위보다 중요한 사실이었다. 한 예술가의 3분짜리 노래가 어떻게 한 시대의 정서를 대변하고, 산업을 낳고, 100년 뒤의 우리에게까지 도착했는가 하는 것이다.
트롯뉴스와 사단법인 대한민국 트로트문화원은 앞으로도 우리 대중음악의 역사적 뿌리를 찾아 그 가치를 조명하는 기획을 이어갈 것이다. 100년 전 현해탄을 건너온 노래가 오늘의 트로트와 K-POP 안에서 여전히 숨 쉬고 있음을, 기록으로 증명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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