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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찬미 100주년 ④] 현해탄에 몸을 던진 두 청춘의 ‘정사’… 윤심덕과 김우진의 마지막 여정

박강민 기자 oasis365@gmail.com

등록 2026-08-13 11:02

대부호 유부남 김우진 가업 승계보다 문학 열망

윤심덕과 함께 전국 순회공연 하면서 가까워져

부산행 배에 가명 동승 후 ‘메모’ 남긴 채 사라져

언론들 “비극적 정사”로 투신자살 대대적 보도

“비극적 사랑?”, “시대에 대한 항거?” 여전히 의문

■ 트롯뉴스 특별기획 : 사의 찬미 100년의 기록 - 한국 대중가요의 시작을 읽다

 

 

[4편] 현해탄의 연인, 김우진과 윤심덕

 

한 사람은 조선 최초의 여성 성악가였고, 다른 한 사람은 조선 연극의 새로운 길을 꿈꾼 천재 극작가였다. 두 사람은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받아들일 만큼 시대는 너그럽지 않았다. 

세상은 그들의 관계를 ‘불륜’이라 규정했고, 두 사람의 이름에는 오랫동안 비난과 비극의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그 사랑을 다시 바라본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에게서 벗어나려 했던 것일까?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던 그들의 사랑은 정말 진실의 전부였을까?


사진=김우진과 윤심덕 / 온라인 커뮤니티

목포의 천재, 김우진이라는 인물

 

수산(水山) 김우진은 1897년 전남 장성에서 장성군수를 지낸 대부호 김성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목포에서 ‘목포의 경복궁’이라 불릴 만큼 거대한 99칸 저택을 소유했고, 일가가 거느린 토지는 54만 평에 달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막대한 부와 사회적 지위는 김우진에게 축복인 동시에 벗어나기 힘든 굴레였다. 부친의 뜻에 따라 가업을 잇기 위해 일본 구마모토 농업학교를 졸업했지만, 문학에 대한 열망은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진학해 서구의 근대문학과 연극 사조를 접하며 자신의 문학적 세계를 넓혀갔다.

 

귀국 후에는 집안의 토지를 관리하는 상성 합명회사 사장으로 취임해 가업을 책임져야 했다. 낮에는 회사 일을 돌보고 밤에는 글을 쓰는 이중생활이 시작됐다. 봉건적인 가풍과 예술가로서의 자유로운 영혼 사이에서 갈등할수록 그의 내면에는 깊은 번민이 쌓여갔다.

그 고뇌는 곧 그의 작품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는 ‘산돼지’, ‘난파’ 등의 희곡을 통해 기존의 신파극에서 벗어나 인간의 내면과 현실의 부조리를 탐구했으며, 서구의 근대극과 표현주의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여 한국 연극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다.

김우진은 부유한 집안의 장남이라는 운명과 자유로운 예술가로 살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에게 문학과 연극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시대와 가문의 굴레에 맞서는 하나의 탈출구였다.


사진=김우진과 아들 방한, 딸 진호 / 박금남 제공

1921년 동우회 순회공연, 운명의 만남

 

두 사람의 인연은 흔히 1921년 일본 유학생들의 연극 연구 단체인 동우회(극예술협회)의 고국 순회공연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우진은 공연단의 자금 지원과 총연출을 맡았고, 도쿄음악학교의 우등생이었던 윤심덕은 막간 공연에 참여하는 소프라노 독창자로 무대에 섰다. 두 사람은 약 40일 동안 25개 지역을 함께 돌며 공연하는 과정에서 가까워졌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설명이다.

김우진은 이미 결혼해 고향 목포에 처자식을 둔 유부남이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호감을 넘어, 서로의 예술적 이상과 현실의 고독을 이해하는 관계로 깊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가 1921년에 처음 시작됐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기록이 있다.

1969년 동아방송(DBS) 다큐멘터리 ‘한국찬가’ 윤심덕 편은 1926년 8월 5일 자 동아일보 사회면 톱기사를 소개하면서, 당시 두 사람과 가까이 지냈던 극작가 이서구의 회고를 전했다. 

이서구는 두 사람이 “정사(情死)하기 7, 8년 전부터” 관계를 맺어왔다며, 김우진이 와세다대학에, 윤심덕이 음악학교에 다니던 동경 유학 시절 사랑의 싹이 텄다고 말했다.



“일본 유학생 시절 이미 교제”설도

 

1926년을 기준으로 하면 이는 대략 1918~1919년 무렵이다. 이 회고가 정확하다면 두 사람은 1921년 순회공연보다 최소 2~3년 앞서 이미 서로 알고 지냈거나 가까운 관계였던 셈이다.

물론 이 기록만으로 두 사람의 연애가 정확히 언제 시작됐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7~8년 전’이라는 이야기는 1926년 당시의 직접 기록이 아니라, 이서구가 훗날 회고한 내용을 1969년 방송이 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신문에서 사용한 ‘교제’나 ‘관계’라는 표현이 오늘날과 같은 의미의 연인 관계였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증언은 두 사람의 사랑을 바라보는 시간 축을 바꿔놓는다. 1921년 순회공연은 두 사람의 첫 만남이라기보다, 이미 도쿄 유학생 시절부터 싹트고 있었던 관계가 더욱 깊어지는 계기였을 가능성을 열어놓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이 언제 처음 만났고 언제 연인으로 발전했는지는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1926년 사건 직후의 보도와 훗날 이서구가 남긴 회고를 함께 놓고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두 사람 사이에 특별한 인연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주목할 만하다.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랑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몇 년의 공백이 남아 있다. 그리고 바로 그 공백이 두 사람의 비극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열쇠일지도 모른다.


 

희곡 ‘이영녀’에 담긴 윤심덕 그림자

 

김우진이 1925년에 쓴 희곡 ‘이영녀’는 두 사람의 관계와 김우진의 내면을 이해하는 중요한 작품이다. 목포 유달산 아래 사창가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가난과 남성의 폭력, 사회의 위선 속에서 한 여성 이영녀가 파멸해가는 과정을 그린 자연주의 희곡이다. 

특히 이영녀가 겪는 수모와 “옳고 그른 것을 몰라주는 하느님이 야속하제”라는 절규는 당시 사회가 여성에게 가했던 억압과 부조리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대목을 당시 윤심덕의 처지와 대비하면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이용문과의 관계를 둘러싼 스캔들 이후 윤심덕 역시 한 예술가로 사는 삶보다 사생활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세상의 비난과 시선에 끊임없이 노출됐다. 김우진은 그런 시대의 모순과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책임을 떠넘기는 사회의 위선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셈이다.

물론 ‘이영녀’가 윤심덕을 직접 모델로 쓴 작품이라는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작품에 드러난 여성의 억압과 사회적 편견에 대한 문제의식은 당시 윤심덕이 처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그렇기에 ‘이영녀’는 두 사람의 사랑을 직접 증명하는 작품이라기보다, 김우진이 어떤 시대의 모순에 분노했고, 자신이 사랑했던 여성을 둘러싼 사회의 시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중요한 문학적 단서로 볼 수 있다. 

어쩌면 그의 작품 속에서 절규하는 이영녀의 목소리는 시대의 편견 속에서 상처받았던 윤심덕에게 보내는 간접적인 위로였을지도 모른다.


근대 극작가이자 연극이론가였던 김우진(1897∼1926)의 희곡 '이영녀' 친필 원고 / 국가유산청 제공 

1926년 8월 3일, 시모노세키 부두

 

1926년 6월, 김우진은 마침내 가족과 가업을 뒤로하고 도쿄로 떠났다. 집안의 재산과 가업을 물려받는 대신, 자신의 문학을 위해 살겠다는 결심이었다. 당시의 표현으로는 이를 ‘출분(出奔)’, 곧 가족이나 집안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나는 일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오사카에서 음반 취입을 마친 윤심덕은 도쿄에 있던 김우진에게 “당장 오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라는 전보를 보냈다고 전해진다. 

이 전보가 실제로 어떤 상황에서 보내졌는지, 두 사람이 당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지금까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이 일화는 두 사람의 관계가 마지막 순간으로 치닫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기록으로 오랫동안 전해져 왔다.


관부연락선 / 온라인 커뮤니티

그리고 8월 3일 밤 11시, 두 사람은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관부연락선에 올랐다. 승선 명부에는 각각 김수산(金水山)과 윤수선(尹水仙)이라는 가명이 적혀 있었다. 

남자의 본적은 전남 목포부 북교동,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으로 기록됐으며, 두 사람의 나이는 나란히 30세로 기재됐다.

다음 날인 8월 4일 새벽 4시 무렵, 배가 대마도 인근 해상을 지날 때였다. 두 사람은 선실에 짐과 짧은 메모를 남긴 채 자취를 감췄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흔적은 그렇게 한 장의 승선 기록과 몇 줄의 메모가 됐다. 이후 두 사람의 행방은 다시는 확인되지 않았다.


김우진이 아내에게 남긴 유서 / 온라인 커뮤니티

자유연애의 서사가 된 비극적 죽음

 

이후 두 사람의 죽음은 곧 근대적 사랑의 비극적 서사로 소비되기 시작했다. 

지식인 남녀의 자유연애와 정사(情死)라는 극적인 조합은 당대 젊은이들의 로망과 동경을 자극했고, 신문들은 사건을 연일 대서특필하며 두 사람의 사랑을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갔다.

그러나 정작 김우진과 윤심덕이 남긴 삶의 흔적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죽음을 단순히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김우진은 생전에 지인들에게 “내 주위의 모든 환경이 비인간적”이라고 토로했다. 가문의 의무와 봉건적 가부장제, 예술가로 사는 삶을 억누르는 현실 속에서 그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윤심덕 역시 여성 예술가라는 이유로 사회의 편견과 스캔들의 시선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사랑을 위한 정사였을까?

아니면 자신들을 옥죄던 시대와 현실에 대한 마지막 몸부림이었을까?

아마도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누구도 그 답을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이었을 수도 있고, 절망이었을 수도 있으며, 예술과 삶을 둘러싼 시대의 벽에서 더이상 물러설 곳을 찾지 못한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다.

 

 

봉건적 사회가 남긴 미스터리

 

윤심덕과 김우진은 자신들이 살던 시대가 요구한 삶과 자신들이 원하는 삶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던 청춘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를 단순한 연애로만 볼 수도 없고, 반대로 그들의 죽음을 시대에 대한 항거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가족과 가부장제, 사회적 시선, 예술가로서의 현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이라는 시대적 조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의 마지막 선택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명확한 답을 찾기 어렵다. 사랑이었는지, 절망이었는지, 혹은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선택이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있다. 그들의 죽음은 단순한 연애 사건을 넘어, 1920년대 조선의 자유연애와 신여성, 예술가의 삶, 그리고 봉건적 사회질서가 충돌하던 시대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야기는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그 시대가 두 사람에게 남긴 선택의 한계일 것이다.


▶ 다음 편 예고 - [5편] 「'10만 장 신화'와 음반 혁명」 100년간 정설이었던 10만 장 판매설, 과연 사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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