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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찬미 100주년] 윤심덕, ‘튀는 노래’로 ‘화려한 패션’으로… 남성 중심의 조선에 ‘치맛바람’을 일으키다
박강민 기자 oasis365@gmail.com
등록 2026-08-05 15:38
관비 유학생 모집 수석으로 일본행 성악에 입문
귀국 후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로 활발하게 활동
이름을 내걸고 당당히 무대에선 최초 여성 스타
일거수일투족 주목 당하며 루머, 염문에 시달려
■ 트롯뉴스 특별기획 : 사의찬미 100년의 기록 - 한국 대중가요의 시작을 읽다
1926년 8월 4일 새벽 4시. 한 시대를 울린 목소리가 현해탄의 거친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누구도 그 목소리가 다시 세상을 울리게 될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뒤, 유성기 바늘 끝에서 되살아난 ‘사의찬미’는 식민지 조선 전역을 울리며 시대를 뒤흔들었다.
올해 발표 100주년을 맞은 ‘사의찬미’. 이 노래는 단순한 유행가가 아니다. 한국인이 처음으로 노래라는 그릇에 사랑과 죽음, 그리고 시대의 비극을 담아낸 한국 대중음악사의 출발점이자, 한 여인의 삶을 영원한 전설로 바꿔놓은 역사적 기록이다.
트롯뉴스는 조선 최초의 스타 윤심덕의 삶과 예술, ‘사의 찬미’ 탄생의 비밀, 100년 동안 사실과 전설이 뒤섞여 이어져 온 이야기, 그리고 오늘의 트로트와 K-POP으로 이어진 음악적 유산까지 총 10회에 걸쳐 심층 추적한다.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은 남성이 모든 무대를 지배하던 시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당당히 무대에 선 조선 최초의 여성 스타였다. / 사진=현담문고
[1편] 1926년, 조선을 멈춘 목소리
1926년 여름, 경성 거리에 한 여자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윤심덕(尹心悳). 그녀는 단지 노래를 잘하는 성악가가 아니었다. 남성이 모든 무대를 지배하던 시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당당히 무대에 선 조선 최초의 여성 스타였으며, 축음기라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대중과 가장 먼저 만난 근대의 예술가였다.
그녀의 삶은 한국 최초의 대중음악 스타가 탄생하는 과정이었고, 그 짧지만 강렬한 생애는 한 세기가 지난 오늘까지도 한국 대중음악사의 출발점으로 남아 있다.
평양의 ‘왈녀’, 교회서 음악을 접하다
윤심덕은 1897년 7월 25일, 평안도 평양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 윤석호는 나물 장사로 생계를 이었고, 모친 김 씨는 병원 허드렛일을 하며 살림을 도왔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부모는 자녀 교육만큼은 포기하지 않았다. 신학문을 배우고 음악을 접할 수 있도록 힘쓴 부모의 교육열은 훗날 한국 대중음악사의 첫 장을 여는 밑거름이 됐다.
4남매 가운데 둘째 딸이었지만 사실상 맏딸 역할을 맡았던 윤심덕은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며 음악적 감성을 키웠다.
윤심덕은 1897년 7월 25일, 평안도 평양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 윤석호(사진 우)는 나물 장사로 생계를 이었고, 모친 김 씨(사진 좌)는 병원 허드렛일을 하며 살림을 도왔다.
1910~1920년대 조선에서 서양 음악은 교회와 미션 스쿨을 통해 가장 먼저 전파됐다. 서양식 선율과 화성, 오선보(五線譜)를 접할 수 있었던 곳도 대부분 교회와 선교 학교였다. 기독교 선교의 중심지였던 평양의 예배당은 당시 조선에서 가장 앞선 음악 교육의 현장이었다. 윤심덕은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해 피아노와 성악의 기초를 배우며 음악적 재능을 키워나갔다.
그녀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6척에 가까운 장신에 서구적인 체격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6척이면 오늘날 기준으로는 키가 약 180cm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될 만큼 당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풍부한 성량과 시원한 목소리, 남성 못지않게 활달하고 거침없는 성격까지 더해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왈녀(曰女)’ 또는 ‘왈패’라고 불렀다. 노래하는 여성에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별명은 훗날 시대를 앞서간 여성에 대한 찬사이자, 기존 사회의 시선이 담긴 조롱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품게 된다.
관비 유학생 합격, 최고의 기회 잡다
평양을 떠난 윤심덕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진학해 1918년 졸업한 뒤 강원도 철원의 공립 보통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안정된 직업이었지만, 교실은 그녀의 음악적 열망을 채워주기에는 너무 좁은 무대였다. 그녀의 인생을 바꾼 전환점은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 선발시험이었다.
윤심덕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수석으로 합격하며 자신의 재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관비 유학은 조선총독부가 극소수의 인재에게만 허락한 최고의 교육 기회였으며, 여성에게는 더욱 드문 영예였다.
일본으로 건너간 윤심덕은 아오야마학원을 거쳐 도쿄음악학교(현 도쿄예술대학) 갑종사범과에 입학했다. 우에노 공원의 벚꽃이 흩날리던 교정에서 그녀는 본격적으로 서양 성악을 익히며, 언젠가 조선 최초의 오페라 무대를 이끌 대형 성악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윤심덕은 관비유학생 선발에서 1등을 기록하며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사진은 도쿄음악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윤심덕(앞줄 흰 옷)
국사편찬위원회는 그녀를 “조선총독부 관비생으로 일본에 유학해 관립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면서, 신극단 토월회 배우로도 활동한 소프라노”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한 줄의 기록에는 윤심덕이라는 인물의 특별함이 오롯이 담겨 있다.
유학생이자 성악가였고, 배우이자 음반 가수였던 그녀는 근대 조선이 탄생시킨 가장 현대적인 문화예술인이었다. 유학과 성악, 연극과 음반 산업이 한 사람의 삶 속에서 교차했던 윤심덕은, 1920년대 ‘신여성’을 상징하는 가장 선명한 초상이었다.
“옥쟁반에 구르는 구슬 소리” 찬사 얻다
1923년 귀국한 윤심덕에게 쏟아진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그해 봄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열린 독창회는 그녀의 이름을 조선 전역에 각인시켰다.
슈베르트 가곡을 비롯한 서양 성악곡이 조선 여성의 목소리로 울려 퍼진 그 무대는 “옥쟁반에 구르는 구슬 소리”라는 찬사를 얻었다.
음악회에서 노래한 여성이 그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고 수준의 음악 교육기관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귀국해 소프라노로 본격 활동한 경우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라는 호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23년 봄부터 1924년 겨울까지가 성악가 윤심덕의 전성기였다.
그녀는 경성여자사범학교 음악 교사로 재직하며 전국의 무대를 누볐고, 베토벤 탄생 150주년 기념 음악회 같은 대형 무대에서 홍난파·김영환 등 1세대 연주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당대 기록은 이 시기 성악계의 진용을 소프라노 윤심덕·한기주·송성심, 테너 안기영·권태호·현제명, 바리톤 윤기성·김문보로 전한다. 바리톤 윤기성은 그녀의 남동생이었다.
전용 공연장은 없었다.
음악회는 학교 강당과 예배당, 호텔 홀, 경성공회당, 극장 단성사 같은 공간을 빌려 열렸다. 그럼에도 1920년대 경성은 서양음악이 본격적으로 수입·공연되기 시작한 전환기의 도시였고, 윤심덕이 그 최전선에 서 있었다.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의 수난과 낙인
대중은 그러나 윤심덕의 음악보다 그녀가 입은 최신 유행의 양장과 화려한 삶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당당한 걸음걸이와 세련된 옷차림은 경성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신문 사회면과 잡지의 단골 소재가 됐다.
기획사도, 매니저도, 연예 산업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대중의 호기심과 언론의 집중 조명이 맞물리며 한 예술가를 ‘스타’로 만들어가는 구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윤심덕은 한국 근대 대중문화에서 이러한 스타 시스템의 원형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가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었다.
엄격한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하던 식민지 조선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여성은 쉽게 비난의 대상이 됐다. ‘신여성’이라는 이름은 한편으로는 시대를 앞서간 여성의 상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여성을 향한 사회적 낙인이기도 했다.
자유연애를 긍정하고 남성들과도 거리낌 없이 교류했던 윤심덕의 삶은 호사가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근거 없는 출생의 비밀부터 각종 염문설까지,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사실처럼 퍼져나갔다.
노래보다 비극적 사랑으로 주목받다
결정적인 사건은 1925년에 벌어졌다.
동생의 일본 유학을 돕기 위해 재력가 이용문을 찾아간 일이 와전되면서 이른바 ‘첩 가담설’이 퍼진 것이다. 당시 일부 언론과 잡지는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사실인 양 다루며 윤심덕을 도덕적으로 비난했다.
특히 잡지 ‘개벽’은 그녀를 이용문의 ‘애첩’으로 단정하는 원색적인 기사를 실었고, “예술가인지 예술가(穢術嫁)인지”라는 모욕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 ‘예술가_穢術嫁’는 예술가_藝術家를 빗댄 조롱 표현으로, ‘더러운 재주로 시집간 여자’라는 비하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성악가였던 윤심덕은 어느 순간 음악보다 사생활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무대에서 보여준 예술적 성취보다 사적인 삶이 더 큰 뉴스가 되었고, 시대를 앞서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비난과 편견의 중심에 서야 했다.
돌이켜보면 윤심덕은 한국 최초의 대중적 스타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언론과 여론이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이미지 소비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그녀를 둘러싼 숱한 소문과 스캔들은 한 예술가의 삶을 집어삼켰고, 1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보다 비극적인 사랑을 먼저 떠 올린다.
그러나 윤심덕이 남긴 진짜 유산은 스캔들이 아니라 음악이었다. 그리고 그 음악은 1926년 여름 오사카의 작은 녹음실에서 역사로 남게 된다.
생계를 책임져야 할 어린 가장의 선택
그러나 무대 뒤의 현실은 냉혹했다.
조선에서 성악가는 존경받는 예술가였지만, 그것이 곧 경제적 안정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돌아왔지만, 기대했던 교사 발령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한 번 무대에 올라 받은 사례비만으로는 평양에서 경성으로 터전을 옮긴 부모와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어려웠다.
특히 미국 유학을 꿈꾸던 여동생 윤성덕과 성악을 공부하던 남동생 윤기성의 학비는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윤심덕은 화려한 무대 위의 스타이기 전에, 가족의 삶을 책임져야 했던 생계형 예술가였다.
닛토 레코드사에서 윤심덕이 '사의찬미' 등 10여 곡의 노래를 취입하기로 되었을 때 피아노 반주는 동생 성덕이 맡기로 했다. 윤심덕(좌)과 동생 윤성덕(우)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그녀가 선택한 곳은 연극 무대였다. 바로 극단 토월회였다.
당시 조선 사회에서 여배우는 여전히 편견 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다. 그런 시대에 국비 유학을 다녀온 정통 성악가가 배우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은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그녀는 “조선 예술의 전당에 한 모퉁이의 무엇이라도 되겠다.”라는 포부를 밝혔지만, 막상 무대에 오른 뒤에는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혹평도 받아야 했다.
윤심덕은 가족의 삶을 책임져야 했던 상황에서 돈을 벌기 위해 극단 '토월회'에 들어가 활동을 하게 된다.
일본 닛토(日東) 레코드와 전속 계약
그리고 1926년, 윤심덕은 또 하나의 선택을 한다. 일본 닛토(日東) 레코드와 전속 계약을 맺은 것이다.
당시 음반 가수라는 직업은 오늘날처럼 대중 스타로 인정받는 분야가 아니었다. 전통적인 예술의 기준에서는 오히려 낮게 평가받던 영역이었다. 그러나 윤심덕은 현실과 예술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그것은 생계를 위한 현실적인 결정이자, 자신의 목소리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한 시대를 앞선 도전이었다.
그녀가 오사카행 배에 오른 1926년은 조선 사회가 거대한 변화를 겪던 해였다. 봄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장례가 치러졌고, 6월 10일에는 6·10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1919년 3·1운동 이후 깊어진 상실감과 식민지 현실에 대한 불안이 사회 곳곳을 감싸고 있던 시기였다.
바로 그 격변의 한가운데서 한 여성 예술가의 목소리가 유성기 음반에 새겨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단순한 한 장의 음반을 넘어 조선 대중음악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됐다.
훗날 많은 연구자가 1926년을 한국 근대 대중문화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1926년 7월 말 '사의찬미' 등 음반 13장을 취입하기 위해 일본 오사카에 건너가 일동축음기회사에서 녹음하고 있다. 윤심덕 사망 후인 1926년 10월 15일 '일동타임쓰' 제1권 4호에 실린 사진이다. / 출처=현담문고
하지만 윤심덕의 이름은 새로운 시대를 연 예술가로만 기억되지 않았다.
그녀가 경성역을 떠나던 마지막 순간, 배웅 나온 극작가 이서구와 나눈 짧은 대화는 훗날 또 다른 전설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그녀는 과연 마지막 순간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해 여름, 현해탄에서 시작된 비극은 어떻게 하나의 노래와 함께 영원한 신화가 되었을까?
[참고] 이서구(李瑞求)는 누구인가?
이서구(1899~1981)는 근대 한국 대중문화사의 기틀을 놓은 언론인이자 극작가, 작사가다.
경성을 대표하던 모던보이이자 극단 토월회의 핵심 멤버로 활동하며 윤심덕·김우진 등 유학파 예술가들과 깊이 교유했다. 윤심덕이 오사카행 열차에 오르기 직전 경성역에서 주고받은 ‘푸른 넥타이’의 농담은 한국 대중문화사에서 가장 서글픈 인연의 일화로 남았다.
훗날 이서구는 윤심덕이 경성역에서 푸른 넥타이를 맨 자신을 바라보며 죽음을 암시하는 농담을 건넸다고 회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일화는 당시 기록이 아니라 수십 년 뒤 남긴 회고에 근거한 것이어서,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보다는 후대에 전해진 증언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다음 편 예고 - [2편] 「‘사의찬미’ 탄생의 비밀」 루마니아의 경쾌한 왈츠가 어떻게 한 시대의 비극을 상징하는 노래가 될 수 있었는지, 번안 가요 ‘사의찬미’의 탄생 비밀을 원본 가사지와 함께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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