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롯뉴스 특별기획 : 사의 찬미 100년의 기록-한국 대중가요의 시작을 읽다
[8편] '사의 찬미' 둘러싼 100년의 미스터리
윤심덕과 김우진의 마지막은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목격자도, 두 사람의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고, 유서로 해석되는 기록 역시 짐을 부쳐달라는 짧은 메모가 전부였다.
그럼에도 사건 직후 조선의 신문들은 두 사람의 죽음을 ‘세기의 정사(情死)’로 대서특필했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극적인 서사는 빠르게 퍼져나갔고, 사실보다 이야기가 앞서기 시작했다.
그들이 정말 함께 죽음을 선택한 것인지, 무엇이 두 사람을 현해탄으로 이끌었는지, 그리고 ‘사의 찬미’의 탄생과 마지막 여정은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100년 동안 반복된 이야기 속에서 사실과 전설은 뒤섞였다.
이제 남은 것은 그 경계를 다시 살펴보는 일이다.
1926년 8월4일 새벽4시, 일등실 3호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의 일등실 복도는 적막에 싸여 있었다.
순찰 중이던 급사가 3호 객실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안에는 승객의 자취가 없었다. 여행가방 두 개와 소지품, 팁 5원, 그리고 짧은 메모 한 장이 남아 있었다.
메모에는 “대단히 미안하나 이 짐을 본적지로 부쳐 주시오”라는 문구와 함께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 경성부 서대문정 윤수선이라는 가명이 적혀 있었다.
배는 즉시 멈추고 단정을 내려 쓰시마 인근 해역을 수색했으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종적을 찾지 못했다.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와 천재 극작가의 공식 기록은 여기서 멈춘다.
‘남녀의 정사’로 보도한 동아일보
사건 이튿날인 1926년 8월 5일, 동아일보는 2면에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사료 돋보기] 동아일보 1926년 8월 5일자 2면
제목: 현해탄 격랑 중에 청년 남녀의 정사
지난 3일 밤 11시에 하관(시모노세키)을 떠나 부산으로 향하는 관부연락선 덕수환(德壽丸)이 4일 오전 4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진하여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다.
선원들이 즉시 배를 멈추고 단정을 내려 수색하였으나 캄캄한 격랑 속에서 끝내 종적을 찾지 못하였다. 선실에 남겨진 소지품과 선객 명부를 대조하여 조사한 결과, 승선권에는 남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30), 여자는 윤수선(30)이라 기재되어 있었으나, 남겨진 유류품과 편지 등을 통해 남자는 유명한 극작가 김우진이요, 여자는 성악가 윤심덕으로 판명되었다.
윤심덕과 김우진이 시모노세키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는 관부연락선 덕수환(德壽丸)에서 투신자살했다는 소식을 대서특필한 1926년 8월 5일, 동아일보는 2면.
이 기사는 신중히 읽어야 한다.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진하여” 몸을 던졌다는 묘사는 목격 증언처럼 보이지만, 정작 실종 장면을 본 선원이나 승객이 있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배가 즉시 멈추고 수색에 나섰다는 서술과 앞의 묘사는 서로 충돌한다.
누군가 투신을 목격했다면 그 자리에서 발견되었을 것이고, 목격자가 없었다면 껴안았는지 여부를 알 방법이 없다.
이 대목은 근대 언론이 사실의 공백을 서사로 메우던 방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정사(情死)라는 결말이 먼저 상정되고, 그에 어울리는 장면이 문장으로 채워진 것이다.
같은 기사에는 김우진이 평소 “내 주위의 모든 환경이 비인간적”이라며 시대와 불화했다는 대목과, 두 사람이 8년 전부터 교제해 왔다는 서술도 함께 실렸다.
거액 현상금걸고 수색했으나 허탕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다. 김우진의 가족은 당시로서는 거액인 500원의 현상금을 걸고 대한해협 전역을 수색했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절절한 사랑의 고백이 담긴 유서도 없었다. 발견된 것은 짐 처리를 부탁하는 사무적인 메모뿐이었고, 유족들은 언론이 보도한 유서설을 강력히 부인했다.
유서도 시신도 없었으니 가족이 죽음을 믿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운 의심을 확대 재생산한 것은 유족이 아니라 호사가들과 언론이었다.
로마의 악기점 목격 확인 소동도
1931년 인터뷰에서 여동생 윤성덕은 “언니의 죽음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며, 미국 유학을 떠나는 자신에게 언니가 “이태리로 갈 터이니 소식이 끊기더라도 궁금해하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비화를 공개했다.
이 증언은 이탈리아 생존설에 불을 지폈다.
경성에는 로마에서 조선인 부부가 잡화점 혹은 악기점을 운영하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소문은 일본 언론에까지 옮겨붙었다.
[사료 돋보기] 아사히신문 1930년 12월 7일자 도쿄 조간 11면
헤드라인: 저승인가 이승인가 / 6년 전 현해탄에서 정사한 조선 희곡가 부부가 살아있다
[경성 특전]현해탄을 건너던 관부연락선 덕수환에서 투신자살한 와세다대 출신의 조선 극작가 김우진 씨와 그의 연인인 도쿄음악학교 출신의 성악가 윤심덕 양이 현재 이탈리아 로마에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두 사람이 로마에 생존해 있으며 부부 금슬 좋게 작은 가게를 열고 생활하는 모습을 발견했다는 현지 체류 지인의 전언이 김우진 씨의 본가로 날아든 것이다. 이에 김 씨의 친형 김익진 씨는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총독부 외사과에 출두하여 로마 주재 일본 대사관 측에 사실 조회를 간곡히 요청했다.
윤심덕과 김우진이 이탈리아 로마에 살고있다는 생존설을 보도한 아사히신문 1930년 12월 7일자 도쿄 조간 11면
주목할 점은 이것이 소문 수준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외교 절차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김우진의 동생 김철진과 김익진은 조선총독부를 통해 주이탈리아 일본대사관에 공식 조회를 의뢰했다. 한 달여 뒤 돌아온 회신은 “로마에는 그런 사람이 없으며 악기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기사 자체에도 흥미로운 오류가 있다.
아사히신문은 사건을 ‘6년 전’이자 ‘8월 2일’로 적었으나, 실제로는 4년 전인 1926년 8월 4일이다. 사건이 이미 사실보다 기억과 소문의 영역으로 넘어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34년에도 김옥균의 손자를 자처하는 소년이 로마에서 두 사람을 보았다고 주장하며 소동을 일으켰으나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그럼에도 대중은 믿음을 놓지 않았다. 식민지의 억압 속에서 해피엔딩을 갈구하던 당대인의 심리적 위안이었던 셈이다.
'삼천리' 1932년 5월호 '이태리 총영사가 조사한 윤심덕씨 생사
모살설과 상업적 이용설까지
또 하나의 끈질긴 의혹은 레코드사 배후설이다.
윤심덕이 사라진 지 일주일 만에 음반이 발매되었고, 닛토레코드는 그 비극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녹음 일정에 없던 ‘사의 찬미’가 갑자기 추가되었다는 점과, 실종과 발매 시점이 지나치게 정확히 맞아떨어진다는 점이 의심의 근거였다. 음반사가 홍보를 위해 두 사람의 죽음을 조작했거나 심지어 살해했을 가능성까지 제기되었다.
다만 이 주장은 5편에서 검증한 판매량 문제와 함께 재고할 필요가 있다. 실제 판매고가 통설의 10만 장이 아니라 6년간 1만 3,000장 수준이었다면, 살인까지 감행할 만한 사전 계산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음반사가 벌인 것은 사후의 기민한 마케팅이었지 사전의 음모였다고 단정할 근거는 아직 없다.
윤심덕이 죽은 직후인 1926년 10월 15일 발행된 '일동타임쓰'제1권제4호, '사의 찬미'음반을 비롯, 윤심덕 특별호처럼 꾸몄다.
진실보다 더 강했던 ‘이야기’
두 사람이 그날 새벽 실제로 바다에 몸을 던졌는지, 혹은 세상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을 꿈꾸며 사라진 것인지는 끝내 확인되지 않았다. 목격자도, 시신도, 두 사람의 마지막을 명확히 설명해줄 결정적인 기록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진실은 이야기의 힘을 더욱 키웠다. 사건 직후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비극적 사랑’과 ‘정사’라는 서사로 소비됐고, 그 이야기는 신문과 잡지를 넘어 소설·영화·드라마·뮤지컬로 끊임없이 변주됐다. 그렇게 윤심덕과 김우진은 한국 대중문화사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비극적 인물로 남았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가 그날 새벽의 현해탄을 되돌아보는 이유는 단순히 두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들의 마지막에는 사랑과 예술, 가족과 사회적 억압, 자유를 향한 욕망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그 선택을 둘러싼 질문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현해탄에 남겨진 것은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이 아니라, 그 마지막을 둘러싼 끝없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이야말로 ‘사의 찬미’와 윤심덕·김우진의 이야기를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살아 있게 만든 가장 강력한 힘인지도 모른다.
⇨ 다음 편 예고 - [9편] 「미디어가 재창조한 윤심덕 신드롬」 1969년부터 오늘의 대학로까지, 100년 동안 다시 태어난 윤심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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