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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찬미 100주년] “한 곡 더하고 싶다”… 예정에 없던 ‘사의찬미’ 녹음 후 윤심덕은 눈물을 쏟았다

박강민 기자 oasis365@gmail.com

등록 2026-08-10 16:33

일본으로 떠나던 날 이서구와 ‘넥타이 농담’ 유명

동생들 뒷바라지하려고 레코드회사와 전속계약

강렬했던 눈물의 녹음 이틀 후에 ‘투신자살’ 비보

그녀가 왜 그 노래를 고집했는지는 아직도 의문

■ 트롯뉴스 특별기획 : 사의찬미 100년의 기록 - 한국 대중가요의 시작을 읽다

 

 

[3편] 윤심덕은 왜 죽음의 노래를 불렀나

 

윤심덕! 그녀는 마지막 순간을 알고 있었을까?

1926년 여름 오사카의 한 녹음실에서, 윤심덕은 계획에 없던 노래 한 곡을 갑자기 부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사흘 뒤 그녀의 이름은 노래가 아니라 사건으로 조선을 뒤흔들었다. 당대 일본 신문이 남긴 녹음 현장의 기록을 따라간다.


일동축음기주식회사에서 발매한  '사의 찬미'앨범과 앨범자켓  / 사진=한국대중음악박물관 제공

1926년 7월, 경성역 농담 마지막이 되다

 

1926년 7월, 경성역은 일본 오사카로 음반 취입을 떠나는 윤심덕을 배웅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늘 지독한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이날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밝았다고 전해진다.

배웅 나온 극작가 이서구가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취입 잘하고 돌아올 때 고급 넥타이나 하나 사 오시오.”

윤심덕은 웃으며 되물었다.

“죽어도 사 와요?”

이서구도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그래. 죽으려거든 넥타이나 하나 사서 부치고 죽어라.”

가볍게 주고받은 한마디 농담은 며칠 뒤 전혀 다른 의미로 되돌아왔다. 윤심덕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가 약속했던 푸른 넥타이만이 사망 소식이 전해진 뒤 경성에 도착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죽음을 예감한 듯한 마지막 농담과 실제로 도착한 넥타이가 겹치면서, 이 일화는 윤심덕의 마지막 여정을 둘러싼 가장 애잔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다만 이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로 단정하기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경성역에서 오갔다는 대화와 윤심덕이 실제로 넥타이를 보내왔다는 내용은 이서구의 훗날 회고를 바탕으로 전해진 일화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직접 뒷받침하는 1926년 당시의 신문 기사나 운송기록 등 동시대 자료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장면은 확인된 사실과 후대의 증언을 구분해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떠나 이 일화가 오랫동안 전해져 온 것은, 윤심덕의 마지막 여정에 드리운 비극과 당시 사람들의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조선 최고의 스타, 그러나 생계형 예술가

 

윤심덕이 현해탄을 건넌 표면적인 이유는 닛토 레코드와의 음반 취입 계약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현실이 놓여 있었다.

평양에서 나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아버지와 병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어머니를 둔 집안에서, 실질적인 맏딸이었던 윤심덕은 가족의 생계를 짊어지고 있었다. 

미국 유학을 앞둔 여동생 윤성덕의 학비와 성악을 공부하던 남동생 윤기성의 뒷바라지도 그녀의 몫이었다.

성악가로서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화려한 명성과 달리 현실은 궁핍했다. 무대에서 얻는 수입만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조차 버거웠다. 오사카행은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절박한 선택이었다.

 

그녀가 현해탄을 건넌 데에는 어쩌면 두 가지 간절한 바람이 함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는 가족을 먹여 살릴 돈을 벌어야 한다는 책임감이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끊임없이 옥죄던 조선의 시선과 스캔들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윤심덕의 오사카행은 단순한 음반 취입을 위한 출국이 아니었다.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한 사람의 절박한 몸부림이자, 성악가로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나선 또 하나의 도전이었다.


윤심덕의 여동생 윤성덕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사의찬미’는 녹음 예정곡이 아니었다

 

녹음은 오사카시 스미요시(住吉)에 있던 일동축음기주식회사, 즉 닛토 레코드의 취입실에서 진행됐다. 이 회사는 1925년부터 ‘제비표 조선 레코드’라는 상표로 조선 음반을 발매하며 조선 시장을 본격적으로 개척하고 있었다.

당시 윤심덕의 취입곡은 번안가요를 중심으로 10여 곡이 예정돼 있었다. 

다만 일부 자료는 전체 취입곡을 26곡으로 기록하고 있어, 곡 수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분명한 것은 ‘사의찬미’가 처음부터 녹음 예정에 포함된 곡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예정된 곡들의 취입을 모두 마친 뒤, 윤심덕이 한 곡을 더 녹음하고 싶다고 요청하면서 이 노래가 녹음됐다. 반주는 미국 유학길에 일본을 거쳐 가던 여동생 윤성덕이 피아노로 맡았다.

 

 

 아사히신문이 기록한 눈물의 녹음 현장

 

그날 녹음실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오랫동안 관계자들의 전언과 후대의 기록을 통해 전해져 왔다. 그러나 윤심덕의 죽음 직후, 당시 일본 언론이 녹음 현장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전한 기록도 남아 있다. 특히 사건 직후인 1926년 8월 7일자 아사히신문 도쿄 석간 2면에는 윤심덕의 마지막 녹음 순간을 묘사한 기사가 실렸다.

 

[사료 돋보기] 아사히 신문 1926년 8월 7일자 도쿄 석간 2면

 

헤드라인 | 현해탄에서 투신한 윤심덕
부제 | 조선 노래 '사의찬미'를 취입할 무렵

 

지난 3일, 달 밝은 조선해협에서 투신 정사(情死)를 감행한 조선이 낳은 유일한 소프라노 가수 윤심덕.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 오사카 스미요시에 위치한 닛토축음기 회사의 녹음실에서 단아한 양장 차림으로 구슬픈 선율을 물결치듯 뿜어내며 조선 노래 '사의찬미'를 불렀다. 그녀 곁에서는 하나뿐인 여동생 윤성덕이 무심히 반주의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는 그 찰나, 심덕의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고 한다. (사진은 그날 녹음 당시의 윤심덕)


일본의 아사히 신문 1926년 8월 7일자  도쿄 석간 2면에 보도된 윤심덕 투신자살 관련 보도  / 사진=아사히 신문 

신문은 지난 3일 달 밝은 조선해협에서 투신 정사를 감행한 윤심덕을 ‘조선이 낳은 유일한 소프라노 가수’라고 소개하면서,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 오사카 스미요시에 있는 닛토축음기 회사의 녹음실에서 ‘사의찬미’를 취입했다고 전했다.

 

기사에 따르면 윤심덕은 단아한 양장 차림으로 구슬픈 선율을 부르듯 노래했고, 곁에서는 하나뿐인 여동생 윤성덕이 피아노 반주를 맡았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는 순간, 윤심덕의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고 전한다.

짧은 기사지만, 이 기록은 윤심덕의 마지막 녹음 현장을 당대 일본 언론이 어떻게 바라봤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특히 윤심덕이 ‘사의찬미’를 녹음할 당시 동생 윤성덕이 직접 피아노 반주를 했다는 점, 그리고 노래가 끝난 뒤 윤심덕이 눈물을 흘렸다는 장면은 다른 기록과 함께 당시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다만 이 기사의 서술을 모두 객관적 사실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노래가 끝난 순간 눈물을 흘렸다.’라는 대목은 신문이 취재해 전한 현장 묘사이지만, 그 장면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별도의 녹음실 기록이나 관계자의 동시대 증언이 현재까지 충분히 확인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는 당시 일본 언론이 전한 현장 기록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녹음 날짜는 왜 엇갈리는가

 

녹음 시점을 놓고도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 

국내의 일부 기록은 1926년 8월 1일 취입설을 전하고 있지만, 아사히 신문은 윤심덕이 사망하기 이틀 전 녹음했다고 보도했다. 사망 시점 역시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아사히 신문은 윤심덕이 8월 3일 현해탄에서 투신했다고 보도한 반면, 국내 언론 보도와 후대의 연구에서는 8월 3일 밤 관부연락선에 승선해 8월 4일 새벽 실종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처럼 날짜가 엇갈리는 것은 당시 일본과 조선에서 보도가 전해진 시점과 취재 경로, 그리고 사건 발생 직후의 정보 혼선 등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연재에서는 여러 기록을 대조하되, 관부연락선 승선 및 사건 관련 기록을 기준으로 8월 3일 밤 승선, 8월 4일 새벽 실종이라는 시간축을 중심으로 서술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날짜의 하루 차이를 넘어, 윤심덕이 생애 마지막 순간에 남긴 노래가 바로 ‘사의찬미’였다는 사실이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이 노래가 특별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어쩌면 그 마지막 녹음 현장에 남겨진 이 짧은 기록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사(決死)의 절창” 죽음 내세워 음반을 팔다

 

윤심덕이 현해탄에서 사라진 지 일주일 남짓 만에, 그녀의 마지막 노래가 담긴 음반이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닛토 레코드는 음반과 함께 배포한 홍보물에 그녀의 죽음을 전면에 내세웠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아도 노골적인 문구였다.

 

 

[사료 돋보기] 1926년 닛토 레코드 음반 홍보물 문구

 

尹心悳 孃의 決死의 絶唱
(윤심덕 양의 결사의 절창)

「死의 讚美」를 最後로 부르고 蒼海에 몸을 던진 朝鮮 唯一의 「쏘푸라노」 名歌手 故 尹心悳 孃
('사의 찬미'를 최후로 부르고 푸른 바다에 몸을 던진 조선 유일의 '소프라노' 명가수 고 윤심덕 양)

大阪市住吉 日東蓄音器株式會社


1926년 윤심덕 사후 2주만에 나온 '사의 찬미' 음반 광고(왼쪽) /사진= 김문성 제공

가수의 죽음을 그대로 상품의 언어로 옮긴 이 문구는 충격적이다. 

한 예술가의 마지막 노래와 비극적인 죽음이 하나의 서사로 묶여 음반 판매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이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예술가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에 얽힌 이야기가 음악과 함께 상품으로 소비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다. 

노래 자체뿐 아니라 가수의 삶과 비극, 마지막 순간에 얽힌 이야기가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하나의 상품 가치가 된 것이다. 오늘날 음악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토리텔링 마케팅’의 원형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유작이 된 3분의 ’미스터리‘

 

그리고 남은 것은 한 곡의 노래였다.

빛바랜 가사지에는 죽음을 목전에 둔 한 예술가의 목소리가 활자로 기록돼 있다. 서양의 왈츠 선율에 실린 짙은 비애와 허무의 정서는 훗날 한국 대중가요가 슬픔과 한을 노래하고, 그 감정을 통해 대중에게 위로와 카타르시스를 전하는 중요한 정서적 토양 가운데 하나로 이어졌다.

 

윤심덕이 왜 자신의 마지막 녹음으로 이 노래를 선택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죽음을 예감했기 때문이었을까? 이미 마음속으로 결심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오래 품어온 노래 한 곡을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것일까?

확인할 수 있는 답은 없다. 다만 한 가지 장면만은 100년의 시간을 건너 우리 앞에 남아 있다.

 

노래가 끝나는 순간, 윤심덕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는 당시의 기록이다. 그 눈물이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예감이었는지, 이별이었는지, 아니면 노래에 몰입한 한 예술가의 감정이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알 수 없음 때문에, 마지막 3분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는다.

노래는 끝났지만, 그 순간의 의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윤심덕이 남긴 마지막 노래는 그렇게 한 시대의 비극을 넘어, 한국 대중음악사에 가장 오래된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로 남았다.


▶ 다음 편 예고 - [4편] 「현해탄의 연인, 김우진과 윤심덕」 목포의 천재 극작가는 왜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에게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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