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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찬미 100주년 ⑤] 음반 발매 후 초판 즉시 매진… 축음기 보급 등 관련 산업 전반에 큰 영향

박강민 기자 oasis365@gmail.com

등록 2026-08-18 15:18

당시 유성기 보급 2000대 불과…가격 집 한 채 값

10만 장 판매설 등은 당시 상황으로 볼 때는 ‘무리’

당시 보도로는 6년 동안 1만3,000여 장 판매기록

유성기 수요자극, 1930년대엔 10만 대까지 늘어나

유행가·신민요 등 대중가요 음반 적극 발매 계기로

■ 트롯뉴스 특별기획 : 사의찬미 100년의 기록 - 한국 대중가요의 시작을 읽다

 

[5편] '10만 장 신화'와 음반 혁명

 

‘사의찬미’ 앨범이 발매되고 10만 장이 팔렸다는 이야기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너무나 익숙한 숫자다. 지난 100년 가까이 이 숫자는 ‘사의찬미’의 폭발적인 인기를 증명하는 기록처럼 반복되어왔다.

하지만 트롯뉴스가 당대 신문과 음반 관련 자료를 다시 들여다본 결과, 10만 장이라는 판매량은 확정된 사실로 보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사의찬미’의 역사적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판매량의 숫자 너머에 있다. 

‘사의찬미’는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음반의 성공이 곧 사회적 현상이 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준 사건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일동축음기주식회사에서 발매한 '사의찬미' 앨범  / 사진=한국대중음악박물관 제공 유성기 한 대가 집값 맞먹던 시절

 

‘사의찬미’의 판매량을 제대로 가늠하려면 먼저 1920년대 조선의 음반 시장이 어떤 환경에 놓여 있었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음반판매를 추정할 수 있는 유성기는 극소수의 상류층만 소유할 수 있었던 고가의 사치품이었다.

 

▷휴대용 유성기: 30~40원

▷거실 거치용 유성기: 50~60원

▷최고급 동양 유성기: 225원(소설가 김동인이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짐)

 

당시 물가와 비교하면 그 가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쌀 한 가마(약 80kg)가 8~10원, 일반 노동자의 월급이 10~20원, 교원 월급은 30~50원 정도였으며, 주택 한 채의 가격은 100~200원 수준이었다.

휴대용 유성기 한 대가 노동자 월급의 두세 배에 달했고, 고급 유성기는 교원 월급을 훌쩍 넘어섰다. 김동인이 소유했다는 225원짜리 최고급 동양 유성기는 당시 주택 한 채 값에 맞먹는 수준이었다.

음반 역시 서민에게 부담스러운 상품이었다. 당시 음반 한 장의 가격은 대략 1원 안팎이었다. 노동자의 하루나 이틀 치 임금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열 장을 구입한다고 계산하면 일반 노동자의 한 달 월급에 가까운 금액이 들어갔다.

더구나 1926년 이전 조선에 보급된 유성기는 2,000대 안팎에 불과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악을 듣기 위해 유성기와 음반을 구입하는 일 자체가 아직 대중적인 소비 행위가 아니었다.

 

대다수 서민에게 음악은 여전히 다방과 주점, 극장과 공연장에서 직접 듣는 생음악이었다. 음반은 음악을 소유하고 반복해서 듣는 새로운 문화였지만, 아직은 극히 제한된 계층이 누릴 수 있는 신흥 소비재에 가까웠다.

이런 시장에서 ‘사의찬미’가 과연 10만 장이나 팔릴 수 있었을까.

바로 이 질문에서 ‘10만 장 판매설’에 대한 검증은 시작된다.

 

 

음반 ‘10만 장 판매설’은 사실일까

 

‘사의찬미’가 10만 장 팔렸다는 이야기는 지난 수십 년간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정설처럼 반복되어왔다. 그러나 당대의 음반 보급 환경과 실제 판매기록을 대조하면 이 숫자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1926년 이전 조선에 보급된 유성기가 약 2,000대였다는 기록을 기준으로 단순 계산하면, 10만 장은 유성기 한 대당 50장 판매에 해당한다. 물론 한 대의 유성기를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했고, 해외 판매나 유성기 보급량 이상의 음반 소비도 가능했기 때문에 이 계산만으로 10만 장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당시 시장규모를 감안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수치임은 분명하다.

 

반면 보다 구체적인 당대 기록이 있다. 

1932년 ‘삼천리’ 잡지 4월호에 당시 인기 레코드의 판매량을 소개하면서 ‘사의찬미’가 1926년 발매 이후 약 6년 동안 1만3,000여 장 판매됐다고 기록했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자료 가운데 가장 구체적인 판매량 기록이다.

당시 레코드 한 장의 가격은 1원 50전~2원에 달했다. 오늘날의 구매력과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음반이 서민에게 결코 값싼 상품이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1만3,000장은 충분히 이례적인 대형 히트 기록이다. 특히 조선어 음반 가운데 1만 장을 넘어선 기록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그렇다면 널리 알려진 ‘10만 장’은 어디에서 나온 숫자일까? 현재까지 확인된 자료만으로는 최초 출처를 명확히 특정하기 어렵다. 후대의 언론 보도와 연구·소개 자료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되면서 하나의 통설로 굳어진 것으로 보인다. 

재판(再版)과 복각, 누적 판매량까지 모두 포함했을 가능성을 들어 3만~5만 장 정도를 추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원출처가 확인되지 않아 사실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해당 수치가 초판 기준인지, 재판과 복각을 포함한 누적 판매량인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팩트 체크] ‘사의찬미’ 판매량, 무엇이 확인되고 무엇이 확인되지 않는가?

 

△ 확인되는 것 : 1932년 잡지 ‘삼천리’ 기록에 따르면 발매 후 약 6년간 1만3,000여 장이 판매됐다. 현재 확인 가능한 가장 구체적인 당대 판매기록이다.

△ 확인되지 않는 것 : 널리 알려진 ‘10만 장 판매설’은 최초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 당시 유성기 보급 규모와 비교하면 매우 큰 수치지만, 단순히 유성기 대수만으로 판매량을 부정할 수도 없다.

△ 추정에 불과한 것 : 재판·복각·누적 판매까지 포함하면 3만~5만 장에 이를 수 있다는 견해가 있으나, 현재로서는 이를 입증할 사료가 부족하다.

 

위와 같은 확인에도 분명한 사실은 판매량의 최종 숫자와 관계없이 ‘사의찬미’가 당시 음반 시장을 강하게 흔든 대형 히트작이었다는 사실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초판 500장이 단기간에 매진됐고, 뒷면에 찬송가 ‘부활의 기쁨’을 수록한 재판이 곧바로 발매됐다. 또한, 윤심덕이 생전에 녹음한 곡들을 담은 음반들이 짧은 기간에 잇따라 출시됐다.

 

결국 ‘10만 장’이라는 숫자는 검증이 필요하지만, ‘사의 찬미’가 당시 조선 음반 시장에서 전례 없는 반향을 일으켰다는 사실까지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료가 보여주는 것은 ‘10만 장’이라는 거대한 숫자보다, 당시의 작은 음반 시장에서 1만3,000여 장이라는 판매량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기록이었는가이다.


사의 찬미음반 판매량에 관한 1932년 이기세의 기사

 

축음기 없는데 음반 구매한 이유?

 

기록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축음기가 없는 사람들까지 ‘사의찬미’ 음반을 구입했다는 것이다.

재생할 기계도 없는데 왜 음반을 샀을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윤심덕을 기억하고 추모하려는 마음이었을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시 대중에게 음반을 소유한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문화적 경험이자 하나의 상징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사의찬미’는 단순한 음악 상품을 넘어선다. 음반은 더이상 ‘음악을 듣기 위한 물건’에만 머물지 않고, 스타를 기억하고 그 시대의 사건을 간직하는 물건이 되기 시작했다.

100년 뒤 K-pop 팬덤이 앨범과 포토카드, 굿즈를 수집하며 음악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현상과도 닮아있다. 

물론 당시의 음반 구매와 오늘날의 팬덤 소비를 동일하게 볼 수는 없지만, 좋아하는 가수와 그가 남긴 이야기를 ‘소유’하고 싶어 하는 소비의 원형이 이미 1920년대에도 나타나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사의찬미’의 성공을 설명하는 데 중요한 것은 판매량의 숫자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왜 그 음반을 사고 싶어 했는가. 그 질문을 들여다보면 ‘사의찬미’가 단순한 히트곡을 넘어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최초의 스타 음반이자 사회적 현상이 된 이유가 보인다.


일동축음기주식회사에서 발매한 '사의찬미' 앨범과 앨범자켓 / 사진=한국대중음악박물관 제공 

 

유성기 보급 확대, 일본 자본 진출

 

닛토 레코드는 윤심덕의 실종과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음반을 판매했다. 가수의 죽음과 음반 발매가 맞물린 절묘한 타이밍은 대중의 호기심과 추모 심리를 자극했고, ‘사의찬미’를 단순한 신곡이 아닌 사회적 사건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음반이 남긴 산업적 변화는 판매량 논쟁보다 더 중요하다.

 

첫째, 유성기 시장의 확대다. 

‘사의찬미’의 인기는 음반을 듣기 위한 유성기 수요를 자극했고, 1926년 이전 2,000대 안팎이던 조선의 유성기는 1930년대 중반 10만 대 규모로 성장했다. 노래가 기계를 팔고, 기계가 다시 음반 시장을 키우는 선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둘째, 일본 음반 자본의 조선 진출이 본격화됐다. 

1925년 닛토가 ‘제비표 조선 레코드’로 조선 시장에 진출한 데 이어 1927년 콜롬비아, 1928년 빅터가 잇따라 진출했다. 특히 1928년 전기 취입 방식이 도입되면서 음질과 제작 규모가 크게 향상됐고, 조선에서 제작되는 음반의 종류도 빠르게 늘어났다.

 

셋째, 음반의 상품 기획 자체가 달라졌다. 

‘사의찬미’ 이전에는 전통음악과 민요가 음반 시장의 중심이었지만, 이후 유행가와 신민요 등 새로운 대중가요가 적극적으로 음반화되기 시작했다. 대중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읽고 그 취향에 맞춰 음악을 상품으로 만드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여기에 1927년 경성방송국 개국까지 더해지면서 음반·공연·방송이 서로 연결되는 근대 대중음악의 미디어 생태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결국, ‘사의찬미’의 진정한 산업적 의미는 몇 장이 팔렸느냐에만 있지 않다. 이 한 장의 음반을 계기로 스타, 음반, 유성기, 방송, 광고가 하나의 시장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황성옛터’, ‘목포의 눈물’ 등 히트

 

‘사의찬미’가 열어젖힌 음반 시장에서는 새로운 대중가요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1932년 이애리수의 ‘황성옛터’는 빅터 레코드에서 ‘황성의 적(跡)’이라는 제목으로 발매돼 큰 인기를 얻었고, 1934년에는 고복수의 ‘타향살이’, 1935년에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잇따라 히트했다. 

특히 이들 곡은 서양 곡의 번안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정서와 이야기를 담은 창작 대중가요도 음반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사의 찬미’에서 시작된 음반 시장의 변화가 이제 유행가·신민요 등 조선인의 감정과 삶을 담은 대중가요 시장으로 확장된 것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변화의 이면에는 음반 자본의 치밀한 시장 전략도 있었다.

당시 음반회사는 음반만 판매한 것이 아니었다. 음반을 재생하려면 축음기가 필요했고, 음반의 보급은 자연스럽게 축음기 판매와 연결됐다. ‘사의찬미’의 폭발적인 인기는 음반과 축음기를 함께 판매하는 새로운 음악 소비시장이 조선에 형성되는 과정과 맞물려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윤심덕의 비극적 죽음이 음반판매를 위한 강력한 마케팅 소재로 활용됐다는 사실은, 예술가의 삶과 죽음마저 상품의 서사로 전환할 수 있었던 당시 음반산업의 냉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음악 산업의 시대’ 진입 분기점

 

그렇다면 다시 ‘10만 장’이라는 숫자로 돌아가 보자.

현재 확인되는 당대 기록만으로는 이 숫자를 판매량으로 확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100년 가까이 이 숫자가 반복됐다는 사실 자체도 흥미롭다. 

어쩌면 10만 장은 정확한 판매 통계라기보다 사람들이 ‘사의찬미’에 부여해온 역사적 무게가 숫자의 형태로 굳어진 결과인지도 모른다.

 

1932년 보도가 전하는 ‘6년 만에 1만 3,000장’이라는 판매기록은 오늘날 기준으로는 소박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2016년 ‘사의찬미’ 유성기 원반이 경매에서 5,600만 원이라는 거액에 낙찰된 사건은 그 음반이 지닌 상징적 가치가 살아있음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사의 찬미’는 단지 몇 장이 팔렸는가 하는 판매 수량의 잣대로만 평가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다. 

 

많은 국민들이 노래 한 곡을 소장하기 위해 주머니를 털고, 축음기를 사들이며, 한 가수의 비극적인 삶과 죽음에 자신의 절망과 감정을 동일시하기 시작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결국, 윤심덕의 ‘사의찬미’는 한국 대중음악사가 단순히 ‘노래를 만들어 부르던 시대’를 지나, 대중이 음원을 구매하고 문화로 소모하는 ‘음악 산업의 시대’로 진입했음을 알린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 다음 편 예고 -[6편] 「비극인가, 자유인가」 100년간 자살 예고곡으로 읽혀온 이 노래를 처음부터 다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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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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