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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카_미야코 하루미] “좋은 노래는 설명이 필요 없다.”… 엔카를 살아 숨 쉬는 음악으로 이끌다
박강민 기자 oasis365@gmail.com
등록 2026-03-20 11:13
독특한 ‘하루미 창법’… 대중 속 생활 음악으로
재일교포 2세 당당히 밝히며 홀대 정면 대응
한국인 특유의 ‘한’, ‘정’ 정서 예술세계 구현
김연자를 직접 프로듀싱 일본진출 성공시켜
□ 일본을 울린 엔카 스타 10인 / ⑦ ‘소리의 마술사’ 미야코 하루미(都はるみ)
대한민국 최초의 트로트 전문 매체 ‘트롯뉴스(www.trotnews.co.kr)’의 2026년 신년 특별 기획, ‘일본을 울린 엔카 스타 10인’ 시리즈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연재에서 우리는 고바야시 사치코를 통해 엔카가 어떻게 화려한 ‘쇼’로 진화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날 주인공은 엔카의 높은 문턱을 낮추어 대중의 거실로, 그리고 서민의 일상 속으로 가장 깊숙이 파고든 여인입니다.
정통의 깊이를 잃지 않으면서도 유행가처럼 친숙하게 다가왔던 ‘엔카의 연인’, 미야코 하루미의 삶과 음악적 세계를 조명합니다.
미야코하루미 공연장면/사진= TBS
문턱을 낮춘 ‘모두의 엔카’로
엔카는 때로 너무 무겁고 슬퍼서 다가가기 어려운 장르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 열도는 한 여성의 목소리에 열광하며 너나 할 것 없이 흥얼거렸다. 그녀의 노래는 고급 예술의 전유물이 아닌, 빨래를 널며 부르는 노래였고 고단한 퇴근길에 콧노래로 따라 하는 ‘생활 음악’이었다.
미야코 하루미는 엔카를 ‘어려운 장르’에서 ‘즐거운 유행가’로, 그러면서도 절대 가볍지 않은 정서를 담아내는 ‘정통의 대중화’를 이끈 인물이다. 2026년, K-트로트가 남녀노소 모두가 즐기는 ‘세대 통합의 아이콘’이 된 배경에는 미야코 하루미가 보여주었던 ‘친근함과 정통성 사이의 황금비율’이 중요한 이정표로 남아 있다.
핏속의 ‘한(恨)’ 이춘미라는 이름
1948년 2월 22일 교토에서 태어난 미야코 하루미. 본명은 기타무라 하루미(北村春美)이지만, 그 이름 안에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이름이 숨겨져 있었다. 바로 한국 이름 이춘미(李春美)다.
그녀는 일제 강점기에 교토로 이주한 한국인 직물 기술자 아버지 이종택(李鐘澤)과 교토 태생의 일본인 어머니 기타무라 마츠요(北村松代) 사이에서 태어난 재일 한국인 2세였다. 아버지의 조국, 한국의 피가 그녀의 예술세계에 ‘한(恨)’과 ‘정(情)’이라는 정서를 부여하는 끊임없는 원천이 되었다.
어머니는 딸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어린 시절부터 발레, 일본 전통 무용, 민요, 낭곡 등 강도 높은 예술 영재 교육을 시켰다. 그녀가 교토 카라쿠(嘉樂)중학교에서 졸업장을 받았을 때 자신의 본명이 이춘미(李春美)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귀화하지 않고 한국 이름과 성을 지키고 있었다.
훗날 그녀의 어머니는 딸이 유명해지자 1969년 ‘주간 평범’이라는 잡지 인터뷰를 통해 “내가 조선인과 결혼해서 하루미가 어린 시절부터 차별과 멸시를 받아왔기 때문에 인기가수로 키우고 싶었다.”라며 딸 하루미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어린시절의 미야코 하루미/사진= 위키피디아
데뷔곡 ‘안코 쓰바키’의 기적
1963년 15세의 나이로 ‘제14회 콜롬비아 전국 가요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가요계에 발을 들였다.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일본 대중음악계는 발칵 뒤집혔다.
데뷔 해에 발표한 ‘안코 쓰바키는 사랑의 꽃(アンコ椿は恋の花)’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제6회 일본 레코드 대상 신인상을 수상하는 신드롬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듬해 발표한 ‘눈물의 연락선(涙の連絡船)’ 역시 155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16세 소녀는 단숨에 일본 최고의 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녀의 목소리는 독특했다.
맑고 깨끗한 미성 속에 이른바 ‘하루미 부시(하루미 창법)’라 불리는 특유의 쥐어짜는 듯한 강렬한 굴림 기교가 섞여 있었습니다. 이 창법은 일본 전통 민요의 강렬함과 현대적인 팝 멜로디의 경쾌함을 동시에 만족시켰다.
무엇보다 그녀는 밝았다. 어둡고 칙칙한 슬픔만을 강요하던 기존 엔카와 달리, 그녀는 항구 도시의 기다림과 사랑의 설렘을 비극이 아닌 ‘인생의 한 장면’으로 유쾌하게 풀어냈다. 대중은 이 똑똑하고 야무진 소녀의 목소리에서 새로운 시대의 엔카를 발견했다.
미야코하루미 데뷔앨범 'アンコ椿は恋の花'
‘하루미 부시’ 창법의 비밀
미야코 하루미의 노래가 수십 년간 차트 상위권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엔 그녀만의 치열한 음악적 언어가 숨어 있었다.
‘하루미 부시’를 구성하는 두 기둥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우나리(唸り)를 들을 수 있다. 가사의 중요한 구절이나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짐승이 포효하듯 거칠고 강력하게 긁어내는 탁성 기법으로 흉성과 두성을 섞어 강하고 투사력 있는 소리를 내는 서구 팝의 ‘벨팅(Belting)’ 기법과 유사하다. 하지만 벨팅이 파워와 음량의 극대화를 목표로 한다면, 하루미의 ‘우나리’는 한(恨)과 체념이 뒤섞인 특유의 감정적 결을 목소리에 새겨 넣는 데 그 본질이 있다.
두 번째는 고부시(小節). 음의 끝을 굴리거나 박자를 지연시켜 감정을 고조시키는 ‘지연 비브라토(Delayed Vibrato)’ 기법이다. 이 기법은 한국 트로트의 ‘꺾기’ 창법 및 ‘한’의 정서와 기술적으로 매우 유사하다. 이는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있다. 그녀의 핏속에 흐르는 한국적 감수성이 무의식중에 발현된 결과라는 해석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이 때문에 그녀의 노래는 주현미, 나훈아 등 한국 트로트 전설들의 감성과도 일맥상통하며 한국인들에게도 깊은 사랑을 받았다.
그녀의 노래는 감상용이 아니라, ‘생활 밀착형 음악’이었다. 직관적인 선율, 가사를 또박또박 전달하는 전달력, 그리고 전통 5음계의 틀을 지키되 세련된 편곡으로 젊은 층까지 포섭한 전략. 그녀가 엔카의 핵심 정서인 슬픔을 대중이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해낸 최고의 번역가로 평가되고 있는 이유다.
차별의 상처를 노래로 승화
공연하는 / 사진=산케이 신문사 제공
1969년,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그녀는 자신이 한국인의 후예임을 대중 앞에 당당히 밝히는 용기 있는 선언을 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차가운 시선과 독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리고 1976년, 더 혹독한 시련이 찾아왔다.
일본 레코드 대상 수상을 앞두고 ‘주간 산케이(週刊産經)’ 등 주간지들이 그녀의 아버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한국인을 아버지로 둔 가수에게 대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라는 노골적인 차별 여론이 들끓었다.
하지만 대중의 선택은 흔들리지 않았다. 가장 최고를 두고 다른 노래를 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결국 그해 ‘기타노 야도카라(北の宿から)’로 레코드 대상 ‘대상(大賞)’을 거머쥐었다.
당시 가수를 그만두고 싶을 만큼 큰 상처를 받았다고 그녀는 훗날 고백했다.
이때 인기 최정상이며 엔카의 여왕인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는 미야코에게 “나도 힘든 일이 늘 많았다, 기죽지 마라.”라며 격려를 했다고 알려졌다. 미소라 히바리의 격려로 다시 마음을 잡은 미야코는 그해 ‘NHK 홍백가합전’에 나와 출전자의 맨 마지막 순서를 장식하는 ‘오토리’(大トリ)에 선정되었다.
대표곡 ‘기타노 야도카라(北の宿から)’
미야코 하루미의 음악 인생에서 정점으로 꼽히는 곡이 바로 1975년 발표된 ‘기타노 야도카라(북쪽의 여관에서)’다. 일본 레코드 대상(大賞)을 받으며 그녀를 ‘엔카의 신’ 반열에 올린 이 노래는 이후 1980년 ‘오사카 시구레(大阪しぐれ)’로 최우수 가창 상까지 받으면서 미야코 하루미를 일본 레코드 대상 역사상 최초로 신인상·대상·최우수 가창 상을 모두 석권한 불세출의 가수로 역사에 새겼다.
키타노야도카라(北の宿から, 북녘의 여관에서)
あなた 変わりは ないですか
당신, 별고 없나요?
日每 寒さが つのります
매일 추위가 점점 심해져요
着ては もらえぬ セーターを
입어주지도 않을 스웨터를
寒さ こらえて 編んでます
추위를 참으며 짜고 있어요
女ごころの 未練でしょう
여자의 마음 미련이겠죠
あなた こいしい 北の宿
당신이 그리워요 북녘의 여관
吹雪まじりに 汽車の音
눈보라 속의 기차 소리
すすり泣くよに きこえます
흐느껴 우는 듯이 들려오네요
お酒 ならべて ただ ひとり
술잔을 나란히 놓고 그저 홀로
淚 唄など 歌います
눈물의 노래나 부르고 있어요
女ごころの 未練でしょう
여자 마음의 미련이겠죠
あなた こいしい 北の宿
당신이 그리워요 북녘의 여관
(~중략)
미야코하루미 '北の宿から' 수록앨범
가사를 듣는 순간 청취자의 머릿속에는 눈 덮인 북쪽 지방의 작은 여관방, 그리고 그곳에서 홀로 스웨터를 짜는 여인의 모습이 영화처럼 그려진다.
미야코 하루미는 감정을 과하게 쏟아내는 대신, 담담하게 그 공간의 분위기를 목소리로 채운다. 청자는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창조한 정서적 공간에 함께 머물며 자신의 상처를 투영하게 되는 것이다.
“보통 아줌마 되고 싶다” 돌연 은퇴
1965년부터 NHK 홍백가합전 20회 연속 출전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그녀는 1984년 3월, 일본 전역을 충격에 빠뜨리는 선언을 한다.
데뷔 20주년이자 인기 절정이던 그 해, 36세의 미야코 하루미는 돌연 “보통의 아줌마가 되고 싶다(普通のおばさんになりたい).”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은퇴를 발표했다. 이때도 미소라 히바리는 “너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니 꼭 행복해야 한다.”라고 응원해 주었다고 한다.
NHK 홍백가합전의 마지막 무대에서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작별을 고할 때, 일본인들은 마치 가족의 한 사람이 떠나가는 듯한 큰 상실감을 느꼈다. 은퇴를 선언한 미야코 하루미가 출전하여 ‘부부 고갯길’(夫婦坂)이란 노래를 부르던 시점의 ‘NHK 홍백가합전’이 84.4%라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대중이 얼마나 하루미의 은퇴를 아쉬워했는지 알 수 있다.
은퇴 선언 이후 1987년, 음악 프로듀서로 변신하여 한국의 가수 김연자를 직접 프로듀싱하며 그녀의 일본 시장 진출을 이끌었다. 자신의 혈통적 배경이 작용한 것인지, 그녀는 후배 한국 가수의 손을 잡고 한일 음악 교류의 가교역할을 자처했다.
하지만 운명은 그녀를 평범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1989년, 같은 재일 한국인 후예라는 설이 있던 일본 국민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가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대의 목소리를 이어가야 한다.”라는 대중의 열망에 응답하며, 그녀는 그해 12월 NHK 홍백가합전을 통해 화려하게 복귀했다. 스타라는 왕관을 잠시 내려놓고 한 인간으로서 보낸 그 5년의 공백은, 그녀의 목소리에 ‘삶의 무게’와 ‘회복의 온기’를 더해주었다.
전통을 넘어 ‘종합 예술가’로
1990년 복귀 이후의 미야코 하루미는 훨씬 깊고 넓은 음악적 영토를 구축하게 된다. 과거의 히트곡과 전통 엔카의 틀에 안주하지 않고, 팝·록·아방가르드 요소를 자신의 음악에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문학과의 결합: ‘자슈몬(邪宗門, 사교문)’에서는 일본 시인 미치우라 모토코의 단카(31음절 일본 전통시)를 노래 도입부에 삽입하는 대담한 시도를 선보였다. 금지된 사랑의 고뇌와 인간적 욕망을 도발적인 언어로 묘사하며, 관능미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자전적 서사의 투영: ‘오타루 운하’와 ‘천년의 고도’ 등 팝스 조로 편곡된 곡들에는 자신의 실제 나이, 가업이었던 베 짜기, 잃어버린 고향 교토, 불교적 세계관 등 자신의 삶과 직결된 키워드가 촘촘히 엮여 있다. 누군가 만들어준 곡을 수동적으로 부르던 과거와 달리, 기획 과정에 직접 참여하여 스스로 인생을 음악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롱 콘서트’의 신화: 음악적 실험의 정점은 닛세이 극장(日生劇場), 오사카 쇼치쿠좌 등에서 한 달에 걸쳐 진행된 ‘롱 콘서트’ 시리즈였다. 한 맺힌 유행가를 부르는 가수를 넘어, 불교 철학과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을 극적으로 연출하는 종합 예술가로서의 역량을 과시한 무대들이었다.
미야코하루미 공연 모습/사진=선뮤직 제공
아버지의 고향 한국공연 무산
그리고 1995년, 그녀는 또 하나의 간절한 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한일 국교 정상화 30돌 기념행사로 미야코의 내한 공연을 추진했다. 그녀에게 한국은 언제나 ‘아버지의 조국’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대중가요 공연을 제한하던 한국 내 법의 벽에 막혀 공연은 무산되었다. 이 아쉬운 역사는 그녀의 음악적 뿌리가 어디를 향해 있었는지를 웅변하는 대목으로 남아 있다.
2005년 예술 선장 문부과학대신상, 2010년 자수포장(紫綬褒章) 수여. 일본 정부는 뒤늦게, 그러나 분명히 그녀를 일본의 소중한 문화 자산으로 예우했다.
한국 남진·주현미와의 접점
미야코 하루미의 음악적 위치는 한국 트로트 역사에서 남진의 쇼맨십과 주현미의 대중적 친화력이 결합된 모델로 해석될 수 있다. 정통 트로트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뛰어난 대중적 감각으로 ‘전 세대의 오빠, 언니’로 군림하며 화려한 퍼포먼스보다 대중과의 교감을 중시했던 점은 남진과 닮아있다.
‘안코 쓰바키’에서 보여준 경쾌한 리듬과 간드러진 기교는 주현미가 ‘비 내리는 영동교’ 등에서 보여준 세련된 정통 트로트의 대중화 전략과 흡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출연한 수많은 방송 무대 연출은 훗날 한국의 ‘가요무대’나 최신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들의 감성적 기반이 되었다.
‘예술성’보다 ‘친화력’이 중요
미야코 하루미는 엔카를 박물관의 유물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오늘의 음악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그녀는 전문가의 칭송보다 시장통 어머니들의 콧노래를 더 소중히 여겼다.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으면서도 꺾이지 않았고, 그 상처를 오히려 더 깊은 노래로 승화시켰다.
K-트로트가 세계화를 향해 나아가는 2026년, 미야코 하루미가 던지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좋은 노래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한 번 듣고 바로 가슴에 닿아야 한다.”
트로트가 글로벌 킬러 콘텐츠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고도의 예술성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전 세계인의 일상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친화력’이 필요하다.
유행과 정통 사이에서 절묘한 줄타기를 하며 모두를 울고 웃게 했던 미야코 하루미. 핏속에 흐르는 한국의 ‘한(恨)’과 일본 엔카의 정서를 하나의 목소리로 녹여낸 그녀의 음악 인생은, 트로트가 대중과 만나는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방식을 우리에게 여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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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 예고: ‘일본을 울린 엔카 스타 10인’ 제8편 – 후지 케이코(藤圭子) “심연을 걷는 목소리, 비극의 화신” — 엔카 역사상 가장 어둡고도 찬란했던 별, 그녀가 노래한 절망의 미학을 탐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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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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