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카_미소라 히바리] “노래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부르는 것”…패전 잿더미 속 국민을 위로하다
박강민 기자 oasis365@gmail.com
등록 2026-01-26 10:03
패전으로 굶주림과 허무에 빠진 절망 속 일본인에 희망
“노래 못하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 병마 속 불사조 공연
‘소원’ 이라던 한국공연 끝내 못하고 52세에 하늘나라로
□ 일본을 울린 엔카 스타 10인 / ① 엔카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1988년 4월 11일 도쿄돔에서 열린 피닉스(불사조) 콘서트
트로트의 세계화가 화두인 오늘날, 우리는 국경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근원적인 힘’이 무엇인지 묻게 된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가장 먼저 일본 대중음악의 성역이자, 그 자체가 하나의 장르가 된 여인, 미소라 히바리를 소환한다.
그녀는 단순히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아니었다. 패전의 잿더미 속에서 절망하던 일본인들에게 그녀의 목소리는 곧 ‘살아야 할 이유’였고, 그녀의 눈물은 곧 민중의 위로였다.
한국 최초 트로트 전문미디어 트롯뉴스(www.trotnews.co.kr)에서는 ‘트로트 세계화 원년’을 선언하면서 이웃 나라 일본의 엔카에 대한 이해를 통해 공동으로 글로벌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일본을 울린 엔카 스타 10인’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그 첫 번째 엔카 스타로 한 시대를 온몸으로 버텨내며 ‘여왕’의 왕관 뒤에 숨겨진 고독과 투쟁을 감내했던 ‘미소라 히바리(1937~1989)’의 불꽃 같았던 52년의 생애를 추적해 본다.
폐허 위에서 희망을 쏜 ‘부기우기 소녀’
미소라 히바리(본명 가토 가즈에)의 시작은 요코하마의 작은 생선가게였다.
1945년,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온 나라가 굶주림과 허무주의에 빠져 있을 때, 고작 9살의 소녀가 무대 위에 올랐다.
당시 그녀의 별명은 ‘베이비 미소라’.
그녀는 미군 부대와 극장을 돌며 당시 유행하던 재즈와 ‘부기우기(boogie-woogie, 블루스에서 파생된 재즈 음악의 한 형식)를 기가 막히게 불렀다.
당시 어른들은 “어린애가 어른의 흉내를 낸다.”라며 눈살을 찌푸리기도 하고, 심지어 1946년 9살 때는 NHK 노래자랑대회에서 링고노우타(リンゴの唄, 사과의 노래)를 불렀는데 아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예선탈락을 하기도 했다.
미소라히바리 12세에 발매한 두번째 싱글 '슬플휘파람' 히바리는 동명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하지만 대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바지 차림으로 무대를 휘저으며 노래하는 이 천재 소녀는, 패전으로 인하여 사회 전반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희망의 마스코트’였다. 12세에는 영화 ‘슬픈 휘파람’으로 데뷔하며 그녀는 전설의 서막을 알렸다.
어린 그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노래를 잘하는 ‘신동’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오빠를 잃은 수많은 일본인이 그 조그만 소녀의 목소리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일본인들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어루만지며 ‘여왕’의 자리에 오르기 시작했다.
‘혼’의 목소리로 ‘엔카’의 성(城)을 쌓다
미소라 히바리가 일본 음악사에서 차지하는 가장 큰 의미는 ‘엔카(演歌)’라는 장르의 정체성을 확립했다는 데 있다.
그녀 이전의 대중가요가 서구의 팝이나 민요의 연장선에 있었다면, 히바리는 일본 전통의 5음계와 특유의 굴림 창법(고부시(小節), 트로트의 ‘꺾기’와 유사)을 극대화하여 현대적인 엔카를 완성했다.
그녀의 노래는 세 가지 특별한 지점에서 당시 일본 대중의 심장을 울렸다.
첫 번째는 ‘참아내는 슬픔’ 이다.
히바리의 노래는 결코 과하게 울부짖지 않는다. 목소리 끝을 미세하게 떨며 슬픔을 안으로 삭여내는 그녀의 창법은 일본인들이 미덕으로 여기는 ‘인내’와 맞닿아 있었다.
두 번째는 ‘완벽한 몰입’을 들 수 있다.
그녀는 노래를 부를 때 가사 속 주인공이 되었다. 히바리의 대표곡 중 하나인 ‘슬픈 술(悲しき酒)’을 부를 때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연출이 아니라 진심 어린 고백이었다.
세 번째는 ‘장르의 파괴’이다.
그녀는 엔카에 국한되지 않고 재즈, 샹송, 록까지 섭렵하며 “히바리가 부르면 그것이 곧 장르다.”라는 격언을 만들어냈다. 그녀가 전성기 시절 발표한 수천 곡은 그대로 일본의 현대사가 되었다.
사람들은 기쁠 때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축배를 들었고, 절망할 때 그녀의 목소리에 기대어 밤을 지새웠다.
'슬픈 술(悲しき酒)' 앨범
일본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방송 퇴출’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그녀였지만 여왕의 삶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
그녀의 뒤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가장 큰 시련은 그녀의 가족과 관련된 ‘조직폭력배(야쿠자) 연루설’이었다. 당시 일본 연예계의 구조적 문제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아버지가 야쿠자 조직과 가깝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대중들의 비난을 샀다.
급기야 1973년, 일본의 공영방송 NHK는 그녀를 사실상 방송에서 퇴출(블랙리스트 등재)하는 초강수를 둔다.
매년 연말 일본 최고의 무대인 ‘홍백가합전’에서 그녀의 모습이 사라진 사건은 일본 전역을 충격에 빠뜨렸다.
하지만 정작 히바리는 여왕의 품격을 잃지 않고 어려운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다.
“방송이 나를 버린다면, 나는 거리로 나가겠다. 내 노래를 기다리는 단 한 사람의 관객만 있다면 그곳이 나의 무대다.”라고 일갈한 어느 가수의 말처럼 그녀는 대도시의 화려한 무대 대신 일본 전역의 소도시와 시골 마을을 도는 순회공연을 시작했다.
방송과 권력이 그녀를 외면할 때, 민중은 더욱 뜨겁게 그녀를 안아주었다.
이 시기를 거치며 미소라 히바리는 ‘국가가 만든 스타’가 아닌, ‘민중이 지켜낸 가수’로 거듭났다. 시련과 방송 퇴출 사건은 오히려 그녀의 위상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마지막 울림으로 남긴 ‘불사조 콘서트’
1980년대 후반, 그녀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하지만 평소 “노래를 그만둔다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던 것처럼 만성 간염과 대퇴골두 괴사라는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그녀는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1988년, 도쿄돔에서 열린 ‘피닉스(불사조) 콘서트’는 일본 음악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으로 기록된다.
제대로 걷기조차 힘든 몸으로 무대 뒤에서 산소호흡기를 달고 버티던 그녀는, 조명이 켜지는 순간 마치 마법처럼 우아하게 걸어 나와 5만여 명의 관객 앞에서 경이적인 40곡 이상의 완벽한 열창을 선보였다.
죽음을 예감한 듯한 그녀의 마지막 투혼이었다.
그리고 1989년, 그녀의 마지막 유작이 된 ‘강물의 흐름처럼(川の流れのように, ‘흐르는 강물처럼’으로 표기하기도 한다)’이 세상에 나왔다.
일본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 중 하나인 이 곡은 한국에서도 가수 이화숙이 ‘흐르는 강물처럼’으로 번안해서 불렀으며 최근 MBN 한일가왕전에서 일본인 가수 우타고코로 리에와 신승태가 듀엣으로 부르는 등 한국인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다.
도쿄돔에서 열린 피닉스(불사조) 콘서트
‘강물의 흐름처럼(川の流れのように)
“나도 모르게 걸어왔네 좁고 긴 이 길을
뒤돌면 아득히 먼 고향이 보이네
울퉁불퉁한 길과 구불구불한 길
지도조차 없는 그것 또한 인생
아아 강물의 흐름처럼
잔잔하게 수많은 세월은 지나네
아아 강물의 흐름처럼
하염없이 하늘은 황혼으로 물들 뿐이네~”
이 노래는 발표 직후 일본의 새로운 시대(헤이세이)를 여는 찬가이자, 한 시대를 마무리하는 진혼곡이 되었다.
그녀는 이 노래를 남기고 그해 6월, 52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그녀의 장례식은 5만여 명의 팬들이 운집한 가운데 일본의 모든 방송사의 생중계 속에 진행되었다.
“노래는 마음으로 부르는 것이지 기술이 아니다”라며 전후 실의에 빠진 일본인들의 영혼을 달래준 국민가수이자 일본 대중음악의 상징인 미소라 히바리는 이른 나이에 그렇게 영원히 잠들었다.
일본 정부는 여성 최초로 그녀에게 ‘국민영예상’을 수여하며 전설의 마지막을 예우했다.
일본 도토산코에 있는 미소라 히바리 노래비(좌), 후쿠시마현이와키시에설치된미소라히바리유영비(우)
국경을 넘어 마음을 잇는 ‘노래의 힘’
미소라 히바리의 삶은 한국과 한국의 트로트 역사와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녀의 창법은 한국의 초기 트로트 대가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특히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와의 정서적 교감은 유명하다.
그녀의 아버지가 한국인이라는 등, 혈통에 관한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정확히 확인된 사실은 없다.
다만, 그녀는 연예 활동 내내 한국공연을 꿈꾸며 한국을 그리워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1987년 추진되었던 세종문화회관 ‘미소라 히바리 한국콘서트’가 무산되는가 하면 88올림픽 전야제인 ‘국제 아시아 가요 대전’에 일본 대표로 참가하려 했던 것도 좌절되면서 한국공연을 꿈꾸며 준비했던 ‘돌아와요 부산항에’ 와 ‘도라지타령’ 등은 끝내 한국 무대에서 부르지 못했다.
그녀는 이제 많은 일본인의 가슴속에 남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부른 노래가 국경을 넘어 인간 본연의 ‘슬픔’과 ‘희망’을 건드렸다는 사실이다.
미소라 히바리는 우리에게 말한다.
대중음악은 단순히 귀를 즐겁게 하는 오락이 아니라, 한 시대를 견디게 하는 ‘공동체의 심장박동’이어야 한다고…
트로트가 세계화를 꿈꾸는 2026년 현재, 우리는 기술적인 완성도보다 먼저 미소라 히바리가 보여준 ‘관객과의 진심 어린 소통’을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녀의 노래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의 거리를 흐르고, 한국의 팬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진심’으로 지어 올린 ‘성’이기 때문이다.
미소라히바리관전경
➭다음 편 예고: 〔일본을 울린 엔카 스타 10인〕 제2편 – 이시카와 사유리(石川さゆり) “정통 엔카의 미학, 절제된 비극” — 목소리 하나로 시린 겨울 바다와 뜨거운 연정을 그려내며 엔카의 품격을 완성한 그녀의 음악 세계를 살펴봅니다.
박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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