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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카_야시로 아키] "가수가 무대서 왜 울어?… 관객들이 울 수 있도록 슬퍼도 견뎌내야지"

박강민 기자 oasis365@gmail.com

등록 2026-02-27 16:40

울지 않고 울리는 목소리로 ‘격정’대신 절제와 품격의 미학

1979년 발표 '남자의 마음' 담은 명곡 ‘배의 노래’로 빅 히트

재즈, 힙합등 장르 넘나들고 화가로서도 예술성 인정받아

이미자의 ‘한’, 주현미의 ‘감성’ 등 한국 트로트 정서 맞닿아

 

□ 일본을 울린 엔카스타 10인 / ⑤ 블루스 가희 야시로 아키(八代亜紀)

 

“가수는 무대 위에서 울어서는 안 됩니다…관객이 울 수 있도록 가수는 그 슬픔을 끝까지 견뎌내야 합니다.” 밤늦은 시간 고속도로를 달리는 대형 트럭의 라디오에서, 혹은 비 내리는 선술집 구석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이의 어깨 위로 안개처럼 내려앉던 목소리가 있었다. 

그녀의 노래에는 화려한 기교나 서슬 퍼런 격정성 대신, 감정을 밖으로 터뜨리지 않고 안으로 꾹꾹 눌러 담는 ‘절제의 미학’이 배어 있다. 

대한민국 유일의 트로트 전문 매체 ‘트롯뉴스(www.trotnews.co.kr)’가 2026년 신년 특별 기획 ‘일본을 울린 엔카스타 10인’의 다섯 번째 주인공으로 선정한 인물은 바로 여성 엔카가 도달할 수 있는 감정의 가장 깊은 심연을 보여준 여인, 야시로 아키(八代亜紀)입니다. 


사진 : 일본 음반 대상에서 비의 자치를 열창하는 야시로 아키

버스안내원 하던 소녀 무작정 상경

1950년 일본 구마모토현 야쓰시로시에서 하시모토 아키요라는 본명으로 태어난 그녀는 훗날 고향의 이름을 따 자신의 예명을 지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에서 버스 안내원으로 일하던 15세의 소녀는 가수의 꿈을 품고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쓴 채 무작정 도쿄로 상경했다. 

도쿄 긴자의 클럽에서 재즈 스탠다드를 부르며 밤무대를 전전하던 그녀는 1971년 마침내 정식으로 데뷔했지만, 대중의 반응은 한동안 차갑기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무엇이 있어도 노래로 승부한다”는 다짐을 가슴에 품고 긴 무명 시절을 견뎌냈고, 결국 TV 오디션 프로그램인 전일본 가요 선수권에 출전해 10주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자신의 실력을 세상에 증명했다. 

 

트럭커들의 ‘영원한 여신’ 등극

무명 시절 카바레와 클럽에서 매일 밤 목격했던 술 취한 이들의 넋두리와 고단한 노동자들의 한숨은, 그녀에게 노래가 단순한 기교를 넘어선 ‘삶의 증언’이어야 함을 가르쳐주었다. 

마침내 1973년, 12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눈물 사랑(なみだ恋)’이 빅히트를 기록하며 스타덤에 올랐을 때, 대중은 유독 허스키하고 깊은 울림을 주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자신들이 흘렸던 눈물의 냄새를 맡으며 짙은 위로를 받았다. 

특히 영화 ‘트럭 야로(트럭 운전사)’ 시리즈에서 멋진 여성 트럭커로 출연했던 그녀는 전국 트럭 운전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그들의 ‘영원한 여신’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야시로 아키 가창의 핵심은 단연 ‘미니멀리즘’과 ‘절제’에 있다. 고음을 내지르거나 과도한 꺾기로 청중의 감정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부르는 가사 한 마디 한 마디에 담긴 감정의 농도는 마치 90%까지 차오른 물컵이 찰랑거리며 넘치지 않는 것처럼 긴장감을 자아냈다. 

노래 중간중간 효과적으로 배치된 침묵과 호흡의 여백은 청취자의 추억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되었고, 이는 엔카를 단순한 유행가에서 정신적 밀도가 높은 예술로 격상시키는데 기여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경영하고 있던 구마가와 운송의 차 앞에서 사진에 담는 야쓰시로 씨

그녀를 상징하는 명곡 ‘후나우타’

이러한 그녀를 상징하는 단 하나의 명곡은 1979년에 발표된 ‘후나우타(舟唄, 배의 노래)’다. 작사가 아쿠 유(阿久 悠)와 작곡가 하마 케이스케(浜 圭介)가 콤비를 이뤄 탄생시킨 이 곡은 야시로 아키가 부른 최초의 ‘남자의 노래(男歌)’로, 발표되자마자 그녀가 첫 소절을 듣고 대히트를 직감했을 만큼 강렬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舟唄 (후나우타 / 뱃노래) 

 

お酒はぬるめの 燗がいい

술은 미지근하게 데운 게 좋고

肴はあぶった イカでいい

안주는 구운 오징어면 좋아

女は無口な ひとがいい

여자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 좋아

灯りはぼんやり 灯りゃいい

불빛은 희미하게 켜지면 좋아

しみじみ飲めば しみじみと

깊이 느끼며 마시면 깊이 있게

想い出だけが 行き過ぎる

추억만이 지나가네

涙がポロリと こぼれたら

눈물이 툭 하고 떨어진다면

歌いだすのさ 舟唄を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 뱃노래를~

 

“안주는 구운 오징어면 족하고, 술은 미지근한 정도가 좋네”라는 소박한 가사를 그녀는 마치 스스로에게 속삭이듯 낮게 읊조렸다. 

1981년 명작 영화 ‘역(STATION)’에서 고독한 형사 역의 다카쿠라 켄(高倉健, 일본의 전설적인 국민배우)이 선술집에 앉아 이 노래를 듣는 장면은 일본 영화사의 영원한 명장면으로 꼽힌다. 재미있는 사실은, 술집에서 술을 들이켜대는 남자의 마음을 그토록 완벽하게 노래했던 그녀가 정작 “구운 오징어는 좋아하지만 술은 한 방울도 못 마신다”고 고백했다는 점이다. 

이는 경험을 뛰어넘어 오직 목소리만으로 대중을 깊은 정서적 심연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그녀의 압도적인 표현력을 보여준다.


'후나우타' 수록 앨범

교도소등 위문하며 그늘진 곳 위로

하지만 야시로 아키를 단순히 ‘엔카의 여왕’이라는 틀 안에만 가두기에는 그녀의 예술적 스펙트럼이 너무나 넓었다. 클럽 시절 다져진 감각을 살려 일본 재즈계의 전설들과 함께 라이브 앨범을 내고, R&B와 힙합 요소를 접목한 앨범을 발표하는가 하면,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나 로버트 존슨(Robert Johnson)의 블루스 명곡을 완벽하게 커버하며 장르의 경계를 자유롭게 허물었다. 

그녀의 재능은 무대 아래에서도 빛났다. 화가로서도 깊은 조예를 지녔던 그녀는 프랑스의 세계적인 미술전인 ‘르 살롱(Le Salon)’에 5년 연속 입선하고 일본 연예인 최초로 영구 정회원 자격을 얻을 만큼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뒤에도 늘 “오늘을 즐겁게(今日を楽しく)”라는 긍정의 철학을 잃지 않았던 그녀는, 1980년대부터 평생에 걸쳐 일본 전국의 여자 교도소와 소년원 위문 공연을 다니며 사회의 그늘진 곳을 자신의 따뜻한 목소리로 어루만졌다.

 

몽골 대초원서 발전기 틀고 콘서트

그녀의 이런 이타적이고 깊은 행보는 말년의 몽골 공연 에피소드에서 절정에 달한다. 2015년 몽골의 민주화 영웅이자 예술가인 ‘서서르바람’을 만나 우주와 자연의 섭리를 담은 몽골 노래 ‘자마스(JAMAAS, 진실)’를 접한 그녀는 큰 전율을 느꼈고, 이 곡을 일본어로 번안해 부르기로 결심했다. 

2016년 몽골 문화 대사로 임명된 그녀는 몽골 국립 오페라 극장에서의 공연을 마친 뒤, 수도에서 100km 떨어진 몽골의 대초원 한가운데서 물도 전기도 없이 발전차에 의지한 채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 초원을 달리던 말과 양 떼가 그녀의 노랫소리에 몰려드는 진풍경 속에서, 그녀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치매를 앓고 계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노래를 불렀다고 회고했다. 이는 국경과 언어를 초월해 진심으로 위로를 전하고자 했던 그녀의 위대한 음악적 여정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사진 : 쓰노다요시오아프로

사후 누드앨범 상술 팬들이 막아

이처럼 한평생 대중의 상처를 보듬던 야시로 아키는 지난 2023년 12월 30일, 급속 진행성 간질성 폐렴으로 인해 73세의 나이로 아쉽게 세상을 떠났다. 

별세 이후 한 음반사가 그녀가 20대 시절 촬영했던 누드 사진을 추모 앨범의 특전으로 끼워 팔려는 몰상식한 만행을 저질러 사회적 공분을 사기도 했는데, 고인의 전 소속사와 수많은 팬들이 격렬히 분노하며 법적 대응에 나선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대중이 그녀의 품격과 명예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고 지키려 하는지를 방증하는 일화이기도 하다.


 야시로 아키 씨의 동상

 “진정한 감동은 감정의 밀도서 나온다”

한국 트로트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야시로 아키의 음악은 이미자 선생이 한국 여인들의 한을 엘레지로 승화시킨 것과 궤를 같이하면서도, 슬픔을 연약함으로 소비하지 않고 스스로의 고독을 책임지는 주체적인 내면적 독립성을 더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감정을 억누르다 결정적인 순간 호흡으로 풀어내는 그녀의 방식은 주현미로 대표되는 세련된 한국의 정통 트로트의 감성과도 맞닿아 있다. 

2026년, K-트롯이 글로벌 시장을 향해 화려한 퍼포먼스와 고음 대결에 집중하고 있는 지금, “진정한 감동은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라 감정의 밀도에서 나온다”는 야시로 아키의 삶과 노래는 우리에게 깊은 화두를 던지고 있다. 

화려한 조명이 꺼진 뒤에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머물며 위로를 건네는 ‘감정의 체력’이야말로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음악의 본질일 것이다. 

비가 내리는 외로운 밤이면, 삶을 예술로 승화시켰던 그녀의 허스키하고 따스한 목소리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우리의 곁을 지킬 것이다. 


 

➭다음 편 예고: ‘일본을 울린 엔카스타 10인’제6편 – 고바야시 사치코(小林幸子) “엔카는 쇼(Show)다!” — 상상을 초월하는 화려한 무대 장치와 퍼포먼스, 엔카를 종합 예술로 승화시킨 ‘무대의 여왕’ 사치코의 모든 것.

 

  

 

박강민

박강민

기자

oasis36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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