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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카_무라타 히데오] “노래는 시대의 아픔을 대신 짊어지는 것” 절망 속 일본인을 일으켜 세우다

박강민 기자 oasis365@gmail.com

등록 2026-04-03 10:45

어릴 때부터 “천재 소년 낭곡사”로 이름 날려

‘장기기사 삶’ 담은 ‘왕장’으로 일약 국민가수로

두 다리 잃고도 의족 착용하고 무대 오른 ‘승부사’

전후 폐허 속 민중을 위로한 ‘엔카의 아버지’

□ 일본을 울린 엔카 스타 10인 / ⑨ ‘전후 엔카의 원형’ 무라타 히데오(村田英雄)

 

대한민국 유일의 트로트 전문 매체 ‘트롯뉴스(www.trotnews.co.kr)’가 전하는 트로트 세계화 원년 2026년 신년 특별 기획, ‘일본을 울린 엔카 스타 10인’ 시리즈 아홉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화려한 무대와 애절한 고독, 그리고 현대적 세련미를 갖춘 엔카의 거성들을 만나왔습니다. 이제 시리즈의 막바지에서 우리는 가장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려 합니다.

 “엔카라는 장르의 심장은 어디서 처음 뛰기 시작했는가?” 그 해답을 쥐고 있는 인물, 전후 일본의 폐허 속에서 노래라는 유일한 지팡이로 민중을 일으켜 세운 ‘엔카의 원형’, 무라타 히데오의 웅장한 목소리를 따라가 봅니다.

 노래하는 무라타 히데오/사진=주간신조

잿더미 위에서 울린 ‘울림’

 

“노래는 잘 부르는 것이 아니다. 시대의 아픔을 대신 짊어지고, 누군가의 굽은 등을 펴주는 기둥이 되어야 한다.” - 무라타 히데오

1945년 종전 후, 일본 열도는 말 그대로 잿더미였다. 패배의 허탈감과 굶주림, 내일에 대한 공포가 지배하던 시절,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한 기교의 예술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를 버티게 해줄 위로, 그리고 이 고통이 결코 “헛되지 않다”라는 확신이었다.

그때, 일본 전통 악극인 ‘로쿄쿠(浪曲, 현악기 샤미센의 반주에 따라 서사적인 내용의 이야기를 노래와 말로 전달하는 일본 전통음악의 한 장르)’의 깊은 울림을 현대 가요에 이식하며 나타난 남자가 있었다. 바로 ‘무라타 히데오’ 이야기다. 

그는 엔카를 부르는 가수를 넘어, 엔카라는 장르의 문법과 태도, 세계관을 정립한 ‘엔카의 아버지’였다.

 

 

다섯 살부터 서민의 삶 체험

 

1929년 후쿠오카에서 태어난 무라타 히데오(본명 가지야마 이사무·梶山勇)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무대와 함께였다. 다섯 살 무렵부터 무대에 섰고, 13세에는 이미 ‘사카이 운보(酒井雲坊)’라는 예명으로 전국을 돌며 공연을 펼쳤다. 당시 일본 언론은 그를 “천재 소년 낭곡사”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부터 장터와 극장을 전전하며 서민들의 애환을 몸으로 익힌 경험은 훗날 그의 엔카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25세 무렵 ‘무라타 히데오’로 개명한 그는 1958년,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전혀 새로운 길 앞에 서게 된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한 통의 라디오 방송이었다. 일본 가요계의 거장 고가 마사오(古賀政男)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무라타의 낭곡 소리를 듣고 즉시 그를 찾았다. 무명 시절의 소리 하나가 거장을 움직인 것이다.

고가의 발탁으로 1958년 ‘무법송의 일생(無法松の一生)’으로 정식 데뷔한 무라타 히데오. 하지만 진짜 전설은 3년 뒤에 시작된다.

 

 

역사적인 곡 ‘왕장(王将)’의 탄생

 

1961년 발표된 ‘왕장(王将)’은 무라타 히데오라는 이름을 역사에 새긴 곡이다. 실존했던 천재 장기기사 사카타 산키치(坂田三吉)의 파란만장한 삶을 담은 이 노래는 가난과 패배 속에서도 끝까지 승부를 포기하지 않는 남자의 의지를 담담하게 풀어냈다.

 

왕장(王将) : 무라타히데오(村田英雄)

 

吹けば飛ぶよな 将棋の駒に

불면 날아갈듯한 장기 말에

賭けた命を 笑わば笑え

건 목숨을 웃을테면 웃어라

うまれ浪花の 八百八橋

태생은 나니외의 팔백팔 다리

月も知ってる 俺らの意気地

달님도 알고 있어 나의 오기를

 

あの手この手の 思案を胸に

이 수 저 수 생각하는 가슴에

やぶれ長屋で 今年も暮れた

찌그러진 연립주택에서 금년도 저물었네

愚痴も言わずに 女房の小春

푸념도 말하지 않는 마누라 코하루의

つくる笑顔が いじらしい

웃음짓는 얼굴이 애처롭구나~

(중략) 

 

이 곡은 전후 일본 최초의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며 무라타 히데오를 단숨에 국민 가수로 끌어올렸다. 이후 ‘인생극장(人生劇場)’, ‘부부춘추(夫婦春秋)’ 등 연이은 히트로 그는 고바야시 아키라, 미하시 미치야와 함께 전후 엔카 황금기를 이끈 중심축이 되었다.

이 노래에서 ‘장기판’은 단순한 놀이판이 아니다.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판이고, 그 위에서 묵묵히 자신의 한 수를 두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것. 무라타 히데오는 운명을 극복하자고 선동하지 않았다. 대신 “운명 또한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니, 우리는 묵묵히 우리의 자리를 지키자.”라고 말했다. 이 ‘숭고한 체념’은 패전 직후 무너진 일본인들의 자존심을 어루만지는 가장 따뜻한 위로였다.


사진=무라타 히데오의 왕장(王将)수록 앨범

청량제 같은 ‘무라타의 발성’

 

무라타 히데오의 창법을 이해하려면 그의 뿌리인 ‘로쿄쿠’를 알아야 한다. 샤미센 반주에 맞춰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 전통 예술은 노래와 대사의 경계가 모호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이 전통의 힘을 현대 가요에 접목하며 독자적인 발성을 완성했다.

그의 노래는 ‘부른다’라기보다 ‘들려준다’라는 느낌이 강하다. 매끄러운 미성 대신 굵고 직선적인 통성으로 가사 한 글자마다 무게를 실어, 듣는 이로 하여금 한 편의 대서사시를 읽는 듯한 경험을 선사했다. “가사는 듣는 사람에게 또렷하게 전해야 한다.”라는 그의 예술관이 이 창법의 본질을 압축한다.

미야코 하루미의 ‘고부시’가 한(恨)을 감싸 안는 여성의 언어였다면, 무라타의 발성은 그 한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남성의 선언이었고 할 수 있다. 

기교로 꾸미지 않은, 가슴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이 목소리는 전후 일본인들의 답답한 가슴을 뻥 뚫어주는 청량제였다.

 

혹독하지만 따뜻한 사나이

 

무라타 히데오는 후배들에게 매우 엄격하기로 유명했다. 음정을 틀리거나 무대 예의를 어기면 크게 꾸짖었다. 하지만 공연이 끝나면 조용히 용돈이나 술값을 건네며 후배를 챙기는 따뜻한 선배였다고 한다. 일본 연예계에서는 “혼낼 때는 누구보다 무섭고, 챙길 때는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라는 회고가 지금도 이어진다. 그의 노래 속 ’의리와 인정‘이 무대 위의 연기가 아니라 실제 삶 그 자체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80년대에는 뜻밖의 곳에서 인기가 솟구쳤다. 

일본의 유명 방송인 비트 다케시가 라디오에서 무라타의 투박한 말투와 압도적인 존재감을 코미디 소재로 즐겨 다루면서, 오히려 젊은 세대 사이에서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 더우니까 창문 좀 열어!‘라고 했다”, “중간에 역이 없나? 역 도시락을 사야 하는데” 같은 과장된 에피소드들이 유통되었지만, 대중은 웃으면서도 그 인간적인 투박함에 오히려 정을 느꼈다. 전설이 된 인물만이 가질 수 있는 친근함이었다.


1961년 첫 출전 홍백가합전에서의 무라타히데오 / 사진=NHK

당뇨로 다리 잃는 혹독한 시련

 

화려한 전성기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 그의 말년이었다. 

오랜 당뇨병과의 사투 끝에 1996년 오른쪽 다리를, 2000년에는 왼쪽 다리까지 절단해야 했다. 가수에게, 더욱이 ‘사나이의 기개’를 온몸으로 표현해 온 그에게 이 상실은 너무나 혹독한 시련이었다.

그러나 무라타 히데오는 병상에서 “살아 있는 한 다시 무대에 오른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지켰다. 

의족을 착용한 채 다시 무대에 선 그의 모습에 일본 언론은 일제히 “무라타 히데오, 마지막까지 사나이였다.”라고 평했다. 그의 대표곡 ‘왕장’의 가사처럼, 그는 끝까지 자신의 장기판 위에서 한 수를 포기하지 않은 승부사였다.

 

공연하는 무라타 히데오/사진=공동 통신사

남인수·고복수와 무라타 히데오

 

무라타 히데오가 전후 일본의 목소리였다면, 한국에는 남인수와 고복수라는 거성이 있었다. 두 나라의 전후 가요는 놀라울 정도로 닮은 구조를 보인다.

남인수의 ‘이별의 부산정거장’이나 고복수의 ‘타향살이’는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은 한국인들의 유랑과 상실을 대변했다. 무라타 히데오가 전쟁 이후의 허무를 노래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방식이다.

이들의 노래는 개인의 연애사보다 ‘시대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선 가녀린 인간’의 모습을 담았고, 슬픔의 원인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있음을 노래함으로써 집단적 치유를 끌어냈다.

두 나라의 선구자들은 노래를 통해 성급하게 희망을 약속하지 않았다. 대신 “우리가 지금 살아남아 있다.”라는 사실 그 자체를 축복하며, 내일을 위한 정서적 에너지를 비축하게 했다. 

이것이 트로트와 엔카가 국경을 넘어 공명하는 가장 오래된 이유이기도 하다.

 

 

트로트 세계화를 위한 교훈

 

무라타 히데오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세운 엔카의 뼈대는 튼튼하게 남아 있다. K-트로트의 세계화를 준비하는 지금, 우리는 왜 다시 이 투박하고 거친 거장의 목소리에 주목해야 할까? 그의 노래는 본질적인 답을 준다. 

 

대중음악이 기술적 세련미와 화려한 퍼포먼스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왜 이 노래가 태어났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무라타 히데오의 노래는 살기 위해, 버티기 위해,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민중의 마음을 대신 전하기 위해 태어났다.

“나는 낭곡의 피를 엔카로 옮겨 놓은 사람.” 그 한 문장이 무라타 히데오라는 거장의 전부를 담고 있다. 이 ‘근원적인 진심’이야말로 국경을 넘고 언어의 장벽을 허무는 트로트 세계화의 핵심 엔진으로 삼아야 할 교훈이다.


무라타 영웅 기념관에서 고인의 사진에 수국을 헌화하는 방문자/ 사진=사가현 가라쓰시에서, 미네시타 키유키 촬영

➭ 다음 편 예고: '일본을 울린 엔카 스타 10인' 최종회 -호소카와 타카시(細川たかし) "전통을 지켜낸 마지막 자존심, 폭포수 같은 가창력의 끝판왕" -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할 정통파 엔카의 수호자, 그의 음악 인생을 완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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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민

박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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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수

박진수 1개월 전

엔카 시리즈가 끝나가니 너무나도 아쉽습니다. 매회마다 재미있게 읽었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모르던 것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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