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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쟈니 리의 멈추지 않는 노래… 전쟁고아서 국민가수까지, 88년 생애 녹아든 ‘뜨거운 안녕’
박강민 기자 oasispool@naver.com
등록 2026-03-30 17:26
전쟁 중 미군수송선 타고 부모와 이별
‘뜨거운 안녕’은 버텨온 시간에 대한 인사
88세에 세 번의 암 투병에도 여전히 활동
반세기 노래인생 회고후배들과 함께 공연
□ 회고록 기념공연 ‘쟈니리’는 누구인가
"또다시 말해주오 사랑하고 있다고 / 별들이 나란히 손을 잡는 밤 / 기어이 가신다면 헤어집시다 / 아프게 마음 새긴 그 말 한마디 / 보내고 밤마다 울음이 나도 / 남자답게 말하리라 안녕이라고 / 뜨겁게 뜨겁게 안녕이라고~" (중략)
가수 쟈니리Johnny Lee / 2022.09.01자 시사매거진 최윤하 작가 사진 갈무리
중장년층이라면 누구나 술 한잔하고 한 번쯤 불러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국민가요가 된 노래다.
1966년 발표된 쟈니 리의 ‘뜨거운 안녕’(백영진 작사, 서영은 작곡). 그런데 이 노래가 단순한 이별 노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노래를 녹음하던 날, 쟈니 리는 헤어진 부모님 생각에 펑펑 울었다고 했다. 원곡을 들어보면 우는 목소리가 그대로 섞여 있다는 그의 고백처럼, 이 노래는 실은 한 전쟁 고아 소년이 평생 가슴에 묻어온 이산의 슬픔이자, 모든 것을 버텨온 시간에 대한 인사였다.
오는 4월 22일, 서울 용산아트홀 소극장 가람홀에서 열리는 회고록 ‘뜨거운 안녕’ 출판기념 공연을 앞두고, 대한민국 최고령 현역 레전드 가수 쟈니 리(88·본명 이영길)의 삶을 돌아본다.
홀로 부산에, 전쟁 고아원 생활
쟈니 리는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났다. 평남 진남포 외가에서 지내던 열세 살 소년에게 6·25 전쟁은 돌이킬 수 없는 이별로 다가왔다.
1·4후퇴 당시 외할머니는 손자에게 “너라도 남쪽으로 가라”라는 말을 남겼고, 소년은 홀로 미군 수송선에 몸을 실었다. 만주에 있던 부모와의 작별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홀로 부산에 내려온 그는 피난민 수용소를 거쳐, 미군이 전쟁 고아들을 위해 설립한 ‘행복산 육아원(Happy Mountain)’에서 지냈다. 이 시절의 기억은 훗날 ‘뜨거운 안녕’의 눈물이 되었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어머니가 ‘어디 다녀 올 테니까 갔다 와서 맛있는 냉면 같이 먹자’ 라고 했는데 전쟁으로 남북이 갈라졌다. 어릴 때는 피난 내려와서 어머니를 많이 불렀다. 보고 싶고, 춥고, 배고프니까.” 그의 어머니는 평양 기생 학교 출신의 ‘엔터테이너’였다. 쟈니 리의 예술적 재능은 그런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가수 쟈니리Johnny Lee / 2022.09.01자 시사매거진 최윤하 작가 사진 갈무리
미군 부대서 싹튼 음악의 씨앗
쟈니 리가 가수가 된 것은 부산역에서 우연히 시작된 한 만남 덕분이었다.
도넛과 커피를 나눠주던 미군이 소년의 손을 이끌어 부산 캠프 하이얼리어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생활하게 해준 것이다. 정식 입양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던 이 미군(라스무센으로 기억되는 이름)은 한국으로 들어오는 군수물자를 총괄하는 항만 책임자였다.
취미로 피아노를 쳤던 양아버지는 저녁마다 장교 클럽에서 연주를 했고, “쟈니, 컴 히어(이리 와)” 하고 소년을 불러 장교들 앞에서 노래를 시켰다. ‘Love Is a Many-Splendored Thing’, ‘Fly Me to the Moon’ 같은 노래를 부르던 소년에게 양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 바로 ‘쟈니’였다. 이 만남이 그의 이름과 음악의 방향을 동시에 결정했다.
1952년 양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지만, 양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수개월 만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청춘 아이돌서 스크린 스타까지
스무 살이던 1958년, 연예인을 꿈꾸며 상경한 그는 쇼 단체 ‘쇼 보트’의 단원으로 발탁되면서 미8군 무대 가수로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영어가 능숙했던 그는 가수로서뿐 아니라 사회자로도 무대에 서며 한국인보다 오히려 미군들에게 먼저 이름을 알렸다.
본격적인 음반 취입은 1966년부터였다. 첫 취입곡은 영화 ‘황야의 무법자’ 테마를 번안한 ‘방랑의 휘파람’.
이 곡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신세기레코드사 전속가수가 된 그는 ‘뜨거운 안녕’을 비롯해 ‘예이예이예이’, ‘제3지대’, ‘내일은 해가 뜬다’ 등을 연이어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아리랑 잡지 독수리상, 동아방송 가요상, 각종 주간지 가요상을 휩쓸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잘생긴 외모와 타고난 가창력, 멋진 스테이지 매너로 단숨에 청춘 아이돌 스타로 떠오른 그는 같은 해 김응천 감독의 영화 ‘청춘대학’(원제 ‘비틀즈 한국에 오다’)에 남석훈, 유주용, 트위스트 김과 함께 주연으로 발탁되며 스크린에도 진출했다.
20년만의 귀국, 복면가왕 가왕에
전성기를 누리던 1974년, 쟈니 리는 미국 LA로 건너갔다.
LA를 거쳐 뉴욕, 시카고 등지를 전전하던 그는 1978년 작곡가 박춘석의 권유로 예명 ‘이훈’으로 재즈 독집 음반 ‘어느 날’을 발표했으나 반향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이후 하와이로 건너가 라이브 바를 운영하며 20년을 보냈다.
20년 만의 귀국은 2004년이었다.
‘내일은 해가 뜬다’로 가수 활동을 재개한 그는 2021년 ‘바보 사랑’을 발표하며 여전히 무대를 이어갔다.
그리고 같은 해 MBC ‘복면가왕’에 ‘빈대떡 신사’로 출연, 포레스텔라 배두훈·서인영·SG워너비 김용준 등 쟁쟁한 실력자들을 연이어 꺾고 3연승 가왕에 등극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쟈니리는 20년만에 귀국한 2004년 MBC 복면가왕에 출연해 가왕에 등극했다 / 사진=MBC 복면가왕
식도암 세 번의 고비 버텨낸 생애
세 번의 이혼 끝에 1998년 만난 현재의 부인 윤삼숙(79) 씨는 그의 삶의 버팀목이 되었다.
식도암 수술을 세 번 받으며 8년 간의 혹독한 고비를 넘긴 것도 아내의 헌신 덕분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부인 윤삼숙 씨는 2011년 전남 해남 땅끝 마을에 거처를 마련하고, 집 안에 드럼과 전자 건반이 갖춰진 작업실을 두어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 쟈니 리는 서울에서 유튜브와 방송, 클럽 출연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는 탓에 겨울철에만 해남에 내려와 부부가 함께 지낸다.
부인은 “암 수술을 세 번이나 했는데 암을 이겨내고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 앞으로 100살까지 활동을 한다고 해서 아마 우리 부부가 해남에서 함께 사는 날은 남편이 100살 된 다음이 될 것 같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쟈니 리는 “나는 자유인이다. 집사람을 만나서 가정이 있다는 거 자체가 행복하다.”라며 아내를 향한 고마움을 숨기지 않았다.
병마 지나온 한 사람의 인생 기록
이번 회고록 ‘뜨거운 안녕’은 단순한 연예계 회상록이 아니다.
전쟁과 이산, 떠돌이의 삶, 무대와 사랑, 병마를 지나온 한 사람의 온전한 생애 기록이다. 주최 측은 이 노래를 ‘이별의 노래’가 아닌 ‘버텨온 시간에 대한 인사’로 재 해석한다.
그 해석은 쟈니 리의 삶 전체를 알고 나면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만주에서 혼자 수송선을 탔던 열세 살 소년이, 구순을 앞둔 나이에도 여전히 무대 위에서 “뜨겁게 뜨겁게 안녕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쟈니 리의 삶과 노래는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의 명암이다.
가수 쟈니리Johnny Lee / 2022.09.01자 시사매거진 최윤하 작가 사진 갈무리
쟈니 리의 회고록 ‘뜨거운 안녕’ 출판 기념 공연은 오는 4월 22일(수) 서울 용산아트홀 소극장 가람홀에서 열린다. 태진아·임희숙·이철식(둘다섯)·조문철 등 후배 가수들이 특별 출연하며, 사회는 예우회 회장 조갑출과 가수 우린이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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